민주화 대통령들, 차례로 ‘건국’을 공격
민주화 대통령들, 차례로 ‘건국’을 공격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08.14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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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민족주의 물결에 떠밀려 실종된 건국

“문민정부가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고, 그 이전 1공화국에서부터 6공화국의 노태우 정권까지는 부끄럽고 청산되어야 할 역사”(김영삼 정부) 

1987년 6월 항쟁과 6·29 선언으로 본격적인 민주화 시대가 개막되었다. 1987년 10월, 전두환 시절 제정됐던 7년 단임 헌법이 폐기되고 새 헌법이 제정되어 6공화국이 출범했다.

이때 개정된 헌법 전문(前文)에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명문화 했다. 제헌헌법 이래 견지해 왔던 ‘위대한 독립정신의 계승’을 ‘상해 임정 법통 계승’으로 바꿔놓음으로써 오늘날 임정 추종세럭과 좌파 세력들이 1948년 건국 부정론의 근거로 활용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헌법 전문 내용이 등장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1982년 일본 역사교과서에 일제의 대륙 침략을 정당화하는 내용이 실리면서 우리 사회에 반일(反日) 민족주의 정서가 급격히 높아졌다. 국민들의 민족주의적 열망은 성금 모금으로 이어졌고, 국민 성금을 바탕으로 1987년 충남 천안에 독립기념관이 들어섰다.

독립기념관 개관을 전후로 언론들은 한민족 독립운동사를 활발하게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런 시대 분위기에서 6공 헌법 개정작업이 시작되자 중경 임시정부 출신인 김준엽 전(前) 고려대 총장이 헌법개정위원회와 접촉하여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내용을 집어넣은 것이다. 

이때부터 반일 민족주의가 뜨겁게 달아 올라 1995년 광복절 경축식에서는 중앙청과 국립박물관으로 활용되던 구(舊) 조선총독부 청사의 첨탑 돔을 철거하는 행사로 절정을 이뤘다.

같은 날 김대중 야당 대표는 동아일보(1995년 8월 15일자)에 김구를 절세의 애국자로, 그리고 미군정, 이승만 박사 통치,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까지 친일파 세력이 중심이 되어 이 나라를 지배해 온 역사에 대한 청산을 요구하는 기고문을 실었다. 

▲ 대한민국 건국을 욕보인 민주화 대통령들. 김영삼 대통령: “1공화국부터 노태우 정권까지는 부끄럽고 청산되어야 할 역사”. 김대중 대통령: 건국에 끝까지 참여하지 않은 김구 선양에 앞장. 노무현 대통령: “대한민국 역사는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했던 굴욕의 역사”

국가 정통성 부정한 김영삼 정부 

반일 민족주의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친일파의 역사로 매도하고, 그 역사에 대한 청산을 요구하는 정치 공세로 이어졌고,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하는 역사관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건국사를 부정하는 논리를 꿰뚫어 보면 그 안에는 외세를 끌어들여 통일을 방해한 남한은 민족 반역세력이고, 통일 국가를 수립하려고 노력한 북한에 한민족의 전통성이 있다는 역사관이 숨어 있다. 

문민정부를 슬로건으로 출범한 김영삼 대통령은 5·16 이후 30여 년 만의 첫 민간인 출신 대통령이라는 자부심이 지나치게 강했다. 그는 1993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사에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 어떤 이념이나 어떤 사상도 민족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발언하여 충격을 줬다.

이 내용을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동맹국인 미국보다 주적(主敵)인 북한이 더 우월적 위치에 있음을 만천하에 공포한 것이다. 

게다가 김영삼 정부는 “문민정부가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고, 그 이전 1공화국에서부터 6공화국의 노태우 정권까지는 부끄럽고 청산되어야 할 역사”라고 주장했다. 문민정부가 상해 임정의 법통을 이어받았다는 주장은 건국대통령부터 박정희, 전두환 정부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상해 임정의 법통을 이어받은 문민정부가 신한국을 창조한다는 이데올로기를 상징화하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던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했다. 일제는 조선을 병탄한 후 1926년 경복궁의 일부를 헐어내고 그 전면에 웅장한 조선총독부 건물을 세웠다. 이 건물은 일제 만행의 상징이자 치욕의 현장이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철거 논의가 제기된 바 있다. 

문제는 해방 후 옛 조선총독부 건물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이 이뤄졌고, 정부 수립 후엔 이름을 중앙청으로 바꿔 초대 대한민국 행정부가 이 건물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6·25 때 크게 부서졌던 것을 수리하여 박정희 정부가 사용하다가 전두환 정부 때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용도 변경하여 역사 유물을 전시하고 있었다.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추진된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는 역설적으로 대한민국 건국의 현장과 근대화의 상징을 없애는 결과를 가져왔다. 

1995년 10월 19일 박계동 민주당 의원이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계좌를 폭로하면서 전직 대통령 비자금 사건 수사가 개시돼 11월 16일 노태우가 구속됐고, 12·12와 5·18에 대한 역사적 심판도 이뤄져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11월 24일 김영삼 대통령은 광주 민주화운동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처리하기 위한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하면서 이른바 ‘역사바로세우기’라는 슬로건을 들고 나왔다. 

‘제2의 건국’ 위해 ‘제1의 건국’ 기념한 김대중 정부 

김영삼 대통령은 ‘역사바로세우기’라는 명분 아래 과거를 전면 부정하고 “1공화국부터 노태우 정권까지를 부끄럽고 청산되어야 할 역사”라고 선언함으로써 국가 정체성 상실의 계기를 제공했다. 

1998년 2월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은 임기 초부터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병행을 기본 이념으로 하는 제2의 건국을 주창했다. 제2의 건국을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1948년의 제1의 건국을 기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998년 광복절을 ‘정부수립 50주년’으로 경축했고, 문화관광부는 <대한민국 50년 격동 반세기>라는 사진자료집을 출간했는데, 이 책의 머리말에 “올해는 광복 53주년, 대한민국 건국 및 정부수립 50주년 되는 해”라고 명기했다. 교통부는 ‘건국 50주년 기념’을 새긴 5종의 고속도로 통행카드를 발행했다. 

민간에서도 그 해 4월 이철승 씨를 회장으로 하여 ‘대한민국 건국 50주년 기념사업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 단체는 8월 15일 국립묘지에 안장된 이승만 대통령 묘소에서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 묘비 제막식’을 가졌으며, 그날 오후 정부 행사와 별도로 ‘건국 50주년 경축대회’를 가졌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은 ‘정부수립 50년’의 일환으로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적극 부각시켰다. 그런 노력은 2002년 백범기념관 설립으로 절정에 달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제2의 건국의 역사적 전제로서 제1의 건국을 인정하고 평가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제1의 건국을 반대하고, 건국에 끝까지 참여하지 않은 김구를 선양(宣揚)하는 일에 적극 나섰다는 점이다. 또 6·25를 “실패한 통일전쟁”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좌파 진보의 통일관을 대변했다. 

틈만 나면 대한민국 공격한 노무현 정부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대한민국의 역사에 대해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했던 시대”라고 했고 기회가 날 때마다 “독선과 부패의 역사” “분열의 역사” “패배의 역사” “굴욕의 역사” 등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폄하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폄하하는 인물이 대통령에 올라 기득권 세력을 타파하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겠다면서 과거사 청산을 자신들의 핵심정책으로 추진했다. 

노무현의 참여정부는 대한민국의 국가체제를 혁명적으로 바꾸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참여정부의 정책 기조였던 서울에서 지방으로, 강남에서 강북으로, 미국 중심의 외교에서 탈(脫) 미국 중심의 외교로, 정부 부처 중심의 정책 결정에서 위원회 중심으로, 보수에서 진보로의 변화 등은 ‘주류세력 교체’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노재봉 전 국무총리는 “노무현과 그 세력이 의도한 것은 스스로의 인식이 어떤 것이든 간에 객관적으로 보면 혁명을 기도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고, 그래야만 그들의 통치행위를 일관성 있게 이해할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45조6000억 원(신행정수도연구단의 추산)이란 천문학적인 예산을 들여 집요하게 행정수도를 옮긴 것도 겉으로는 국토의 균형발전이나 수도권 과밀해소, 국가경쟁력 제고(提高)를 내세웠지만 본심은 “수도 이전은 한 시대와 지배 권력의 변화를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2005년 5월,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이 추진한 과거사진상규명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 법에 의해 ‘동학혁명 참여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를 비롯하여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친일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제주 4·3 진상규명위원회’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등 16개의 과거사 관련 위원회가 설치됐다.

그런데 과거사 규명 대상은 제주 4·3사건 등 빨치산 관련 사건, 6·25 전쟁 관련 사건이 대부분이었다. 그 중 80% 이상이 국군과 미군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고 하는 사건들이었다. 

과거사위원회는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을 받은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남민전) 같은 반국가단체나 이적 단체의 활동까지도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하고 세금으로 보상비를 지급했다. 또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이끌어온 과거 지도자들을 친일 인사로 낙인찍었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등 민간 출신 대통령과 그 시대의 국정을 담당한 정치인들은 화해나 통합 상생(上生)의 실천보다는 건국과 호국, 산업화 시대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비판과 비난에 집중함으로써 단절과 보복의 징벌적 아젠다를 찾는 데 몰두했다.

그 결과 우리 사회의 국가의식은 해체되었고, 국민의식은 갈가리 찢어졌으며, 제 나라 역사에 대한 자부심은커녕 저주의 의식만 독버섯처럼 커져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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