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 부추긴 일본
러시아 혁명 부추긴 일본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09.10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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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화 추적]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對러시아 첩보공작

아카시 모토지로의 광범위한 공작으로 ‘피의 일요일’ 사건 일으켜 전쟁 수행 방해

러일전쟁 당시 일본 대본영은 전쟁 시작과 더불어 러시아 내외의 불평분자들을 선동하여 제정을 타도하게 하려는 첩보전을 수행하기로 하고, 그 임무를 유럽 사정에 밝은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1864~1919) 대좌(대령)에게 맡겼다. 

후쿠오카 출신으로서 육군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아카시 모토지로는 1901년 1월 주(駐)프랑스 공사관 무관을 거쳐 1902년 8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주러시아 공사관 무관으로 전임됐다. 이때부터 아카시는 천재적인 첩보 능력을 발휘하여 러시아 내부를 분열시켜 러시아가 전쟁 수행을 어렵게 만들고자 공작을 개시했다. 

당시 아카시 대좌의 가장 큰 무기는 공작자금, 즉 돈이었다. 그가 러시아에서 공작에 사용한 자금은 일본 세입이 불과 2억5000만 엔이던 시절 100만 엔이었다.

이 돈을 현재 화폐단위로 환산하면 약 5400억 원 정도의 거액이었다. 일본 정부는 러일전쟁을 수행하면서 단기결전 후 강화로 들어가지 않으면 패전하게 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강화를 러시아가 수용할 수 있는 정세로 몰고 가야만 했다. 이를 위해서는 혁명을 일으키도록 반정부 세력을 부추겨야 했다. 이를 위해 아무리 많은 돈을 쓴다 해도 일본으로서는 아까울 것이 없었다. 아카시는 그런 일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

1904년 2월에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아카시를 비롯한 일본 외교단은 스웨덴의 스톡홀름으로 거처를 옮겨 ‘적국에서의 내란 유도 공작’에 착수했다. 아카시는 짧은 기간에 강력한 첩보공작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그는 영국의 전설적 첩보원 시드니 라일리가 여순에서 보내온 요새 도면을 확보하여 일본군의 여순 요새 점령에 일조했다. 

아카시는 제정 러시아 안팎의 혁명운동가, 불평분자, 독립운동가 등 주요 인사들과 광범위하게 접촉했고, 그들로부터 신뢰를 얻는 데 성공했다. 아카시의 사후(死後) 발표된 ‘낙화유수(落花流水)’란 글에 의하면 아카시는 풍부한 자금을 바탕으로 러시아 사회의 내부 분열을 위한 정보 수집, 스트라이크, 사보타주, 무장봉기 등을 획책했고, 자신의 공작 덕분에 러시아 내에 염전(厭戰) 분위기가 확산됐다고 한다. 

레닌도 아카시의 공작 대상 

아카시는 스위스에 망명한 러시아 사회당의 레닌과도 친한 사이가 되었는데, 아카시의 자금 지원 제의를 받은 레닌은 처음에는 “조국을 배신하는 행위”라면서 거절했다.

아카시가 “타타르 사람인 그대가 타타르를 지배하는 로마노프 왕조를 무너뜨리는 데 일본의 힘을 빌리는 것이 무슨 배신인가”라고 설득하자 받아들였다고 한다. 아카시는 레닌에 대해 이런 평을 남겼다.

“그의 안중에는 단지 국가만 있을 뿐 자기 목숨은 없으며, 하물며 사리사욕 따위는 조금도 없다. 금후 혁명의 대업을 달성하는 자는 아마도 레닌일 것이다.” 

러시아 혁명의 도화선이 된 1905년 1월 22일 ‘피의 일요일 사건’도 아카시의 공작이 한몫을 했다. 바로 그 사건을 주도했던 러시아의 성직자이자 혁명가였던 가폰 신부가 아카시 대좌의 주요 공작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러시아의 여순 요새 수비대가 5개월에 걸친 혈전 끝에 일본군에게 항복한 지 20일 후 발생했다. 

당시 금속노동자들이 동맹파업에 들어갔을 때 노동자의 생활 개선을 황제에게 직접 청원하기 위해 데모를 지휘한 인물이 가폰 신부다. 이날 데모를 저지하는 군인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30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러시아는 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는 <언덕 위의 구름>에서 아카시의 활동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무튼 그가 돈을 투자한 분만큼 러시아 국내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그것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제정 러시아의 요인들에게는 외정(外政)보다도 오히려 이 내정(內政)면에서의 질서 붕괴 쪽에 위기감이 강한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외정에 나갈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서 “적당한 시기에 전쟁을 종결시켜야 한다”는 느낌이 국내의 소란과 만주에서의 패배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강해져 갔다.’ 

시바 료타로는 아카시 대령이 러시아에서 친교를 맺고 공작을 진행했던 사람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레닌을 필두로 해서 가폰당 총수 가폰 신부, 사상가 쿠로포트킨 공작, 핀란드 독립운동의 실야크스(실리아쿠스), 민권사회당의 수령급인 플레하노프, 작가인 막심 고리키, 자유당 좌경파인 스베루 등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초대 조선 헌병군 사령관으로 공포의 대상 

사상가 쿠로포트킨은 러시아의 지리학자 겸 무정부주의자, 혁명가로 유럽 아나키즘의 지도적 이론가다. 영국, 프랑스, 스위스 등을 전전하며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무정부주의 이론가로서 저서도 많이 내고 후세에 많은 영향을 줬다. 러시아 혁명 후 귀국하여 모스크바 부근에 거주하다 사망했다. 

플레하노프는 러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아버지라 불린다. 공산당 선언을 러시아어로 번역, 1883년 노동해방단을 조직하여 레닌과 함께 활약했다. 1903년 멘셰비키에 속하여 수령이 되었다. 아카시 대령은 이러한 거물들과 친교를 맺고 이들에게 아낌없는 자금을 지원하여 러시아를 혁명의 소용돌이로 몰고 간 것이다. 

아카시는 제정 러시아의 압박을 받던 폴란드나 핀란드에서는 ‘독립운동의 은인’이었다. 박노자 교수(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의 연구에 의하면 아카시는 핀란드 헌정당의 급진적인 활동가 콘니 실리아쿠스를 통해 러시아 혁명가를 비롯해 폴란드, 그루지야, 라트비아, 벨로루시의 민족주의자들과 깊은 교우를 나누게 되었다고 한다.

아카시는 그루지야를 비롯한 코카서스 지역의 급진 민족혁명가들에게 8500정 정도의 스위스제 총을 공급하여 1905년 겨울 그루지야의 여러 도시에서 무장 반란을 일으키도록 공작을 진행했다. 

러일전쟁이 끝난 후 아카시는 조선에 와서 통감부 시기에 헌병대장, 총독부 시기에는 초대 조선군 헌병사령관 겸 경무총장을 맡았다. 그는 1907년 10월 조선 주차 헌병대장으로서 전국에서 일어난 항일의병 투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한일병합조약 후에는 경무총장이 되어 1914년까지 조선의 ‘치안’을 담당하며 ‘105인 사건’을 조작해 수백 명의 기독교 신자, 계몽운동가들을 체포했으며, 1918년부터 1919년 사망할 때까지 대만 총독을 지냈다. 그는 한국에서의 무자비한 탄압이 가져온 역효과를 반성하여 대만에서는 인자한 총독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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