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여, 이제는 교육 통제권 내려놓으라
국가여, 이제는 교육 통제권 내려놓으라
  • 미래한국
  • 승인 2015.11.05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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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특집] 교육이 희망이다

학교에 대한 사회적 불신이 정부 규제를 불러왔다. 이제는 학교와 교육자들을 믿어 달라. 교육에 대한 자율권을 학교에 넘기는 것이 대한민국을 살리는 길

어느 정권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이번 정부 역시 ‘대학구조 조정’, ‘자유학기제’ 등 굵직한 교육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시대나 사회의 변화에 따라 교육개혁은 필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해방 이후 우리나라 교육개혁의 역사가 100% 관치(官治)의 역사였다는 점이다. 현 정부 역시 예외는 아니다. 

▲ 이성호 중앙대 교육학과 교수

우리 역사에서 학교교육에 대한 국가의 통제와 간섭은 삼국시대부터 비롯된 행태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중국의 영향으로서, 제도화된 교육은 관(官)에 의해 창설되고 운영되어 왔으며, 국가가 주도하는 관학(官學)은 학교교육의 근간을 이루어 왔다. 

삼국·고려·조선시대 등을 거치면서 사학(私學)의 존재가 미미했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관학이 쇠퇴하고 사학이 더 활발한 교육적 기능을 수행하는 현상이 목도되었다. 그러나 전통 사회에서의 사학은 어디까지나 관학의 기능과 역할을 보완하는 장치였을 뿐, 사학이 관학과 공식적으로 대등한 지위를 누리며 독자 영역을 구가하지는 못했다. 

전통 사회에서 학교교육에 대한 국가의 통제와 개입은 두 가지 형태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국가가 주관하는 인재등용제도를 통한 교육의 이념과 내용에 대한 간접적인 통제이고, 다른 하나는 관학 설립과 운영에 대한 국가의 직접적인 통제였다. 

이처럼 중앙집권적이고 관료주의적인 교육행정은 조선이 일제에 병합되면서 더욱 고착화되었다. 일본은 조선사회를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했으며, 특히 학교교육에 대한 치밀한 통제와 철저한 감시를 통해 민족정신이나 저항의식 등의 맹아(萌芽)를 근본적으로 차단했다. 사학의 폐지, 조선어 교육 금지, 창씨개명(創氏改名) 등의 민족문화 말살 정책은 국가를 통해 교육을 통제한 극단적인 사례다. 

‘무소불위’ 관(官) 교육, 교육 지방자치에도 변하지 않아 

해방 후의 이념적 갈등과 전후(戰後)의 경제적 궁핍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탄생한 박정희 정권은 반공(反共)이라는 국시의 구현과 경제 번영이라는 과업의 달성을 기치로 내걸면서 학교제도와 교육의 내용 등을 통제했다. 

국민교육헌장 제정, 반공 교육, 실업계 고교 장려, 중학교 및 고등학교 무시험 선발 등이 이 시대의 대표적인 관(官) 주도 교육정책들이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서도 교육에 대한 관의 독점은 계속되었으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권에서도 이런 현상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관(교육부와 지방교육청)이 교육부문에 대해 가지는 행정권한은 교수 및 학습 관련 영역, 교육공무원 인사 영역, 학교운영권 관련 영역 등 3가지 영역으로 구분될 수 있는데, 이 세 가지 영역은 학교교육과 관련된 모든 활동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관의 힘은 무소불위(無所不爲) 그 자체다. 

한국 교육학계의 원로인 정범모 교수는 어느 강연에서 한국의 관 주도형 교육행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개탄했다. 

“학급을 우열반으로 나눠라, 수행평가를 해라, 학교에서 소년신문을 구독하지 말라 등은 고약한 시어머니의 잔소리다. 행정 관료들은 잘 모를 수밖에 없는 교육 현장의 사정을 교사나 교장들이 친히 필히 살피고 참작해서 계획해야 한다. 일선 학교에 대한 교육부의 타율적 통제는 대부분 각 시·도의 교육위원회 교육청을 통해 진행되기 때문에, 교육청은 싫건 좋건 그 통제의 ‘하수인’일 수밖에 없다.” 

혹자는 교육 지방자치가 정착되어 중앙집권적인 양상이 크게 변화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간섭과 통제의 주체가 교육부에서 교육청으로 변환된 것 외에 관 주도형 체제가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오히려 일부 선출직 교육감들의 월권과 전횡이 증가하고 있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관 주도형 교육체제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수반한다. 우선 교육활동 전반에 걸친 국가 및 지방정부의 지나친 간섭과 세부적인 통제다. 현대 국가에 있어 학교교육은 공적(公的)인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는 영역이다. 따라서 국민의 이익과 요구를 대변할 의무가 있는 정부가 개입하는 것을 부정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정부에 의한 규제나 간섭의 정도가 심하고, 그 내용이 과도하게 구체적이고 세부적이라는 것이 문제다. 

교육 다양성 해치는 관 주도 교육의 문제점 

관 주도형 교육행정체제의 또 다른 문제점은 국가의 독선과 오만이다. 국가는 목적이 아닌 기능이며, 더욱이 절대적인 선(善)의 기준이 될 수 없다. 관 주도형 교육행정체제에서 관료들은 자칫 ‘국가무오설(國家無誤說)’ 혹은 ‘관료무오설(官僚無誤說)’이라는 환상에 빠지기 쉽다.  

대학 자율에 관한 어떤 토론에서 노무현 정권에서 교육부 차관을 지낸 한 인사는 “대학에 자율권을 줄 경우 너도 나도 앞 다퉈 지원자들을 성적순으로 줄 세우기 할 것”이라고 확신에 찬 발언을 하며 우리나라 대학들을 폄훼했다. 이야말로 전형적인 후진국형 관료의 오만과 편견이다. 우리 사회에서 관은 더 이상 사회적 신뢰나 전문성을 독점하고 있는 집단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 우리나라 교육은 지방자치가 정착됐음에도 간섭과 통제의 주체가 바뀌었을 뿐 관(官) 주도형 체제가 달라진 것은 없다. 사진은 황우여 부총리(左)와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右)

‘학교 운영의 자율화’가 답이다

다음으로 관 주도의 통제와 간섭은 교육자들의 전문성을 훼손한다. 학업성적 관리권이나 수업활동지도 관리권, 학교운영권 등에서 나타나듯이 관의 교육행정권은 일선 학교의 관리자나 교사들의 전문성을 심각하게 손상시킬 여지가 있다.

평가나 수업이 교사들 개개인의 자의적인 활동에 맡겨지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으나, 이런 행위들을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지침으로 규제한다면 굳이 장시간의 전문 교육을 필하고 소정의 자격 여건을 갖춘 교사들을 국가가 선발시험을 통해 임용해야 할 필요가 없다. 

다음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관 주도형 교육행정체제에서 유발될 수 있는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간의 대립과 갈등이다. 달리 표현하면 강력한 관 주도형 체제 하에서의 관 대 관의 마찰이다. 우리는 이미 일부 교육감들이 중앙정부의 정책들에 사사건건 반기를 들며 이들의 추진을 방해한 사실을 목도했다. 이는 근본적으로는 학교교육에 대한 행정권한을 선점하기 위한 갈등이다. 

관의 행정권이 워낙 막강하다 보니 이를 놓고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간의 쟁탈전이 벌어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런 갈등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며, 이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과 학부모의 몫이라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교육에 대한 국가의 과도한 통제와 간섭이 교육의 다양성을 제한하고 자율성을 훼손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이상의 논의에서 보았듯이, 우리나라의 관 주도형 교육행정체제는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으며 향후 교육의 발전과 선진화를 위해 반드시 개선되어야 한다. 

필자는 관 주도형 교육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다음의 두 가지를 제언하는데, 첫째는 개별 학교 중심의 학교운영의 자율화이고, 둘째는 학교 설치의 자율화를 통한 학교교육의 다양화다. 

관 주도형 교육행정체제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우리 교육의 발전과 선진화를 위해 가장 시급하고 중차대한 과제는 교육활동 전반에 걸친 단위학교별 자율성의 보장이다. 자율은 학교교육의 다양성과 책무성, 그리고 경쟁력을 포괄하는 개념이자 원리다.

선진국에서처럼 단위 학교들이 자율성을 향유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 자율성은 자연스럽게 개별 학교의 책무성과 연계되고, 교육 수요자들은 이런 책무성을 바탕으로 개별 학교의 경쟁력이 결정된다. 또 학교교육의 자율성이 보장될 때, 학교는 제반 교육활동을 융통성 있게 운용할 수 있으며, 학생들의 개인차에 기초한 다양한 교육이 제공될 수 있다. 

이제는 학교를 믿어달라

단위 학교의 자율성이 보장될 때, 제반 교육활동에 대한 교사들의 전문성도 존중된다. 수업이나 평가 등에 대해 교육관청의 불필요한 간섭이나 통제로부터 자유스러워지는 것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교원 임용에 대한 행정권한은 국가에 귀속시키되, 특정 교원의 채용에 대한 결정은 단위 학교의 교장에 위임하는 것도 자율성 신장을 위한 중요한 방책이다. 

요약하면 학교 운영의 자율성이란 교수 및 학습관리, 교원채용, 수업지도 등 학교교육활동 전반에 적용되는 개념이라 볼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학들은 정부의 지나친 간섭과 통제에 시달리고 있는데, 초·중등학교의 자율성이 보장되면 대학의 자율성도 필연적으로 보장되리라 본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고등학교에는 자율권을 인정해 주면서 대학은 이와 달리 취급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필자가 접해본 교육 분야 관료들 중 단위 학교의 자율성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들이 다수 있다. 그들의 변은 학교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교육계와 교육자들의 책임도 부분적으로 있다고 본다. 그러나 학교에 대한 사회적 불신이 정부 규제를 언제까지나 정당화할 수는 없으며, 더욱이 그 같은 규제에 의해 불신이 해소될 수도 없다. 

오히려 이러한 불신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은 단위 학교의 책무성과 경쟁력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학교들이 자신의 권한과 행위의 결과에 대해 철저히 책임지고, 교육의 질적 제고를 위해 노력한다면, 학교에 대한 신뢰는 자연히 회복될 것이다. 

학교 운영 및 설립 자율화 절실 

관 주도형 교육행정체제에서 탈피하기 위한 두 번째 방안은 학교 설치 자율화다. 이를 위해 우선, 학생들의 특기나 적성 그리고 장래의 진로는 물론, 지역적 특수성과 학부모들의 특색 있는 수요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특성화 된 학교 설립에 관한 규제를 대폭 완화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외국어고나 과학고는 이런 취지에서 도입됐지만, 설립 취지와는 달리 입시 준비를 위한 장소로 변질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여기서 특성화 된 학교란 단순히 지적(知的) 능력이 탁월한 집단만을 위한 학교는 아니다. 특성화 학교는 고교를 졸업하고 바로 산업 현장에 투입되는 학생들, 일반 고교의 체제나 제도 속에서 적응하기 어려운 학생, 언어나 과학 혹은 예체능 방면에 특출한 재능과 적성을 가진 학생 등을 위해 다채로운 교육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특성화 된 학교를 통한 교육의 다양화가 이루어지려면 우선 이들 학교에 대한 편견의 불식이 선행되어야 하고, 아울러 특성화 된 학교들은 그 운영이 설립 취지와 목적에 부합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학교 설치 자율화를 위한 두 번째 과제는 민영학교, 혹은 사영(私營)학교 설립을 허용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중등교육은 많은 부분 사립학교에 의존하고 있다. 이들 사립학교들은 이름만 사립일 뿐 교육과정 선정, 운영, 학생 선발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중앙 혹은 지방정부의 통제와 감독을 받는다. 

게다가 재정자립도가 지극히 빈약하여 이들 학교의 교원 인건비는 대부분 국민 세금으로 충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우리나라 사립학교들은 대부분 유명무실한 존재들이다. 

영·미·프 선진국에 비해 사립학교 비중 너무 낮아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중국은 우리나라와 비교할 때 도가 지나칠 정도로 사립학교 비중이 커지고 있다. 영국, 미국, 프랑스 같은 선진국에서는 정부의 통제와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립학교들이 전체 공교육의 약 15%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사립다운 사립학교들이 공교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무시할 수 있는 정도다. 이제 우리 교육도 정부 주도와 감독 위주의 후진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공교육에 있어 ‘사적(私的) 영역(private sector)’을 허용하여 관 중심의 획일성과 경직성에서 탈피해야 한다. 

사립학교라고 무조건 등록금이 비싼 ‘부자들을 위한 학교’가 아니라는 것은 선진국의 예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종교단체나 자선단체, 독지가들에 의해 운영되는 사립학교는 ‘귀족학교’일 필요가 없다. 오히려 사립학교 활성화를 통해 학교교육체제를 더욱 다양화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교육행정체제가 과도하게 관 주도형이라는 지적은 학교교육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개입을 배제하자는 주장과 동일시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국가의 통제와 개입에는 명분이 있어야 하며, 이러한 명분은 교육적 가치와 이념을 내포한 것이어야 한다. 달리 말해 국가나 정부의 역할과 기능 자체가 부정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에 의한 과도한 통제나 간섭은 시대적·사회적 상황에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제껏 행사해 왔던 권한(일종의 기득권)을 포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나라 교육의 선진화를 위해 정치권과 관의 결단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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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 2015-11-12 08:48:05
관의 지나친 교육의 간섭도 문제이지만 학교의 자울적 소임의 무책임도 문제이다. 학교교육의 불신이 사설 학원의 선호 및 학교외 교육이 성행되게 하고 있는가 하면 이념교육이 도마에 올라 있다. 관 주도를 최소화하데 학교는 교육의 본질을 구현하는 책무를 다할 때 교육의 자울성이 보장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