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이대로는 국가의 미래가 없다
수능, 이대로는 국가의 미래가 없다
  • 미래한국
  • 승인 2015.11.0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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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교육이 희망이다

대학은 학생선발의 자유, 고교 선생님들은 교육과 평가의 자유 쟁취해야

자녀를 키우는 학부모에게 물어야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장삼이사(張三李四)의 보통 사람들에게 물어야 한다. “어떻게 가르쳐야 자녀를 잘 가르치는 일이며, 어떤 사람과 벗하여 살아야 잘 사는가?”라는 단순한 물음에 답할 수 없는 정책과 교육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 천세영 충남대 교육학과 교수

수능제도 또한 예외가 없는 일이다. 비록 그것을 만들고 운용하는 사람들은 정책가들이고 이른바 전문가들이라지만, 정작 그 최종 당사자인 학부모와 일반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허망한 일일 뿐이다. 

우리나라 수능제도가 딱 그 모습이다. 이제는 그 가운데 심부름을 맡고 있는 학교의 선생님들마저 알아듣기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이대로 두고는 나라의 미래가 없다.

필자 역시 이른바 교육전문가라는 사람으로, 평생을 수능에 대해 연구해온 사람으로서 분명 가장 큰 죄인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죄인 된 책임으로 옛 선비들이 임금 앞 과거마당에서 “감히 말씀드리오니 죽여주시옵소서”라고 하는 마음으로 다섯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수능은 가장 신뢰받고 타당해야 할 국가교육제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혹자들은 수능 무력화를 이야기한다. 수능은 진정한 의미의 대학입시의 척도로서 실질적 기능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안을 물으면 뒤로 빠지며 슬쩍 고교 평준화를 흉내 낸 듯한 추첨입학제까지 중얼거리며 어리석게도 몇몇 서구국가들의 예를 들곤 한다. 

또 한 쪽 사람들은 차라리 “옛날이여”를 노래하며 대학 본고사 부활과 심지어 기여 입학제까지 들먹인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을 차리라고 했다. 

수능제도는 따지고 보면 통일신라 독서삼품과로부터 시작되어 1500년을 이어 온 우리 민족의 인재정책이었다. 만약 수능제도를 폐기할 정도로 국가가 망가졌다면 당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책임이며, 그로 인해 미래를 짊어질 인재 양성에 실패한다면 민족과 국가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불수능’이 ‘물수능’보다 백배 낫다

엊그제 한글날 한 세미나에서 양정호 성균관대 교수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지난 22년간 수능 난이도는 냉온탕을 오갔고, 이른바 난이도 기준 6이 넘는 불수능이 6번, 5미만인 물수능이 9번, 급기야 2015년에는 0.8로 떨어졌다고 하며, 코앞에 닥친 2016년 수능은 아무도 예측을 못하게 되었다. 

전문가적인 용어로 교육평가에서 난이도란 참으로 허망한 개념이며 이론적 기반도 없다. 교육평가의 두 기준은 타당도와 신뢰도다. 타당도란 잴 것을 제대로 재고 있는가라는 기준이며, 신뢰도란 재는 사람이 달라도 결과가 같은가라는 기준이다. 난이도란 어렵고 쉬운 정도를 말하는데, 사실 시험이 어렵고 쉬운 것은 공부한 학생의 입장일 뿐, 시험 자체의 본질이 아니다. 

즉 수학능력, 곧 대학 공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한 해 걸러 어려워졌다 쉬어졌다 하는 것은 아니다. 교육과정의 목표, 예를 들어 대학 입학 준비생에게 요구되는 영어 어휘력의 수가 늘고 줄고는 할 수 있지만, 정해진 목표 안에서 출제된 어휘를 모르는 학생들이 많고 적음에 따라 시험이 쉽고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수능과 유사한 미국의 SAT나 프랑스의 바칼로레아의 난이도 조정이 실패해서 교육부 장관이 옷을 벗는 일이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 수능제도는 통일신라부터 이어져 온 우리 민족의 인재정책이다. ‘물 수능’에 대한 요구는 무상급식보다 더 무서운 교육 포퓰리즘이다.

문제를 미리 알려주고 치르는 시험은 고금동서(古今東西)에 없었다

본디 시험은 어려운 것이어서 원래부터가 불수능이어야 한다. 불수능과 물수능의 차이는 평균에서 벗어난 편차 곧 소수점 이하의 측정오차일 뿐이어서 대학 수학능력의 있고 없음을 가르는 변별력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정작 문제는 그 측정오차를 가지고 대학의 당락을 결정하는 입시제도의 문제인데, 손가락으로 달을 이쪽저쪽 가리키면서 물수능이다 불수능이다 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인가 수능 연계 정책이 시행되었다. EBS 수능 문제 풀이 강의만 들으면 수능 준비, 곧 대학입시 준비에 충분하다는 덫을 만들고 모든 국민이 그 덫에 걸려들었다. 시험 문제 10개를 가르쳐 준 후 7개는 그 중에서 출제된다고 하니 모두가 7개는 거저 얻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남은 3개만 공부하면 된다. 

뻔한 결과가 처음부터 예상되었다. 그 3개의 차이를 인정하기보다는 쉽게 얻은 7개에 안주하려 든다. 물론 그 7개도 쉽지만은 않고 사람 간 차이는 생기고, 점점 나머지 3개도 가르쳐달라고 하게 된다. 

세상에 시험문제를 가르쳐주는 법은 없다. 우리도 옛날엔 그랬지만 미국에서는 SAT 시험문제는 회수해 가버리고, 지난 시험문제도 공개하는 법이 없다. 특히 사지선다형 시험 방식은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것이어서 한 번 쓰고는 폐기해버린다.

다만 그 다음 시험문제를 내기 위한 참고용으로 선생님, 곧 출제자가 비밀은행에 넣고 수험자가 눈치 채지 못하게 섞어서 쓸 뿐이다. 이를 SAT나 TOEFL에서 쓰는 문제은행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린 이 시험문제를 마치 성경처럼 암기하고 그 결과를 수학능력으로 1:1 등치시킨다. 이것은 교육이 아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우리 모두는 언제부터인가 이 사실도 망각해버렸다. 

절반 이상의 대학과 학생들에게 수능은 필요 없다

조만간 고등학교 졸업생 수가 대학입학 정원보다 적어질 것이며, 대학이 학생을 선발하는 시대는 가고 학생이 대학을 고르는 시대가 온다. 이제는 더 이상 대학이 수능시험 점수라는 값싼 방식으로 학생 선발을 계속할 수 없고, 대학들만의 고유한 방식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아마 절반 이상의 대학들은 수능이나 내신 성적 상관없이 고교 졸업장만 가지고 지원하는 학생을 모두 받아들인다 해도 입학 정원을 채우지 못할 것이다. 

이미 절반 이상의 학생들에게 수능은 대학입학을 위한 절차라기보다는 대한민국 고3생의 통과의례이며, 수능철의 각종 상업 마케팅의 티켓일 뿐이다. 절반 미만의 대학들만이 수능의 변별력이나 내신의 신뢰도 등을 따지게 되겠지만, 그 중요성은 날로 줄어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능의 난이도 문제를 놓고 국가적으로 호들갑을 떠는 일도 사라질 것이다. 

내신 절대평가제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되살려내야 한다

21세기는 새로운 인재상을 요구하고 대학은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을 추구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대학들은 아직도 구태의연한 수능 위주 학생 선발에만 의존하려 하며, 입학사정관제도 같은 복잡 불편한 방식은 꺼려 한다.

물론 이러한 무임승차는 그동안 고교 졸업자가 입학 정원을 상회하던 시절에는 쓸 만했다. 그러나 이제 대학들도 본격적으로 새로운 인재를 새롭게 길러내지 않고는 살아남기 어렵게 될 것이며, 그 귀결은 수능 일변도 입시제도의 변화일 것이다. 

공부란 선생님과 학생 간 소통의 과정이다. 소통의 성공 여부는 소통에 참여한 선생님과 학생만이 서로 확인할 수밖에 없으며, 외부인들의 눈으로 치르는 수능시험과 같은 상대평가로는 도대체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교육평가는 수행평가 중심의 절대평가일 수밖에 없으며, 지필평가 중심의 상대평가는 그 절대평가를 보조하거나 대입과 취업 등의 선발을 위한 간접 수단일 뿐이다. 

물론 선생님의 절대평가 또한 불완전할 수밖에 없으며, 대학 또한 선생님의 평가와는 다른 잣대를 가질 수밖에 없다. 수능은 그런 또 다른 반쪽일 뿐이다. 그러므로 선생님의 수행평가와 국가의 수능평가 결과가 똑 같은 성적을 의미한다면 둘 중 하나는 적어도 절반 가까이는 틀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양자 간의 상관이 높아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100% 같다면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학원의 사교육이 팽창하는 것은 학교 선생님의 내신평가가 힘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 학원의 사교육이 학교 내신평가를 준비하는 과정으로도 힘을 발휘하고 있는데, 이는 학교 시험마저도 나를 가르친 선생님이 출제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학생들은 굳이 선생님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게 되는 셈이다. 평가에 있어 힘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선생님이 교육적 권위를 잃었다는 말이며, 곧 교육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행평가에 기반한 내신 절대평가제도는 선생님의 교육적 권위가 확립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선생님의 교육적 권위가 없는 교육이란 존재 불가능하다. 이는 아무리 어려워도 반드시 되살려내야 할 대한민국 교육의 역사적 소명이다. 

정치에 사로잡힌 교육 

수능이 이 지경이 된 것은 교육이 정치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헌법에 보장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이 훼손된 때문이다. 헌법에는 또 대학의 학문적 자율성도 명시되어 있지만, 대학은 그 첫 번째 생명의 원천인 학생 선발의 자유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물수능에 대한 요구는 무상급식보다 더 무서운 교육 포퓰리즘이다. 마치 시험점수로 표를 산 것과 같다. 하루 속히 대학은 학생선발의 자유를 쟁취해야 하며, 고등학교 선생님들은 교육과 평가의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 

정부에게 그것을 허여(許與)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스스로의 생명을 내놓는 일이며 교육이 정치에 스스로 예속되는 일이다. 물론 바르고 현명한 정부가 하루라도 빨리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해 주기를 소망하고 담당 부서인 교육부의 책임 있는 역할을 기대하지만, 자유와 생명이란 내가 얻는 것이지 남이 주는 것은 아니라는 뼈저린 각오를 대한민국의 대학과 학교에 주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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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leopard 2015-11-08 16:32:20
옳은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