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에서 죽어서도 인간 대접을 받는 법
이 나라에서 죽어서도 인간 대접을 받는 법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6.01.19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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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씨 사망에 부쳐

뭔가에 가위눌려 간첩을 간첩이라 제대로 쓰지도 못하는 기자들이여. 졸기(卒記), 즉 부음기사라도 제대로 쓰자. 조선시대의 사관(史官)들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은가.

이 나라에서 죽어서까지 융숭하게 인간 대접을 받으려면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우선 ‘민주화 운동’을 열심히 하는 거다. 그것이 진정한 민주화 운동이건, 외피만 ‘민주화’를 뒤집어 쓴 공산 혁명 활동이건 상관없다. 김일성을 추종하는 공산혁명 활동을 열심히 하다가 국가보안법을 위반하여 유죄 판결을 받고 수감 생활을 하면 더 유리한 환경이 조성된다.

▲ 1월 18일 오전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에서 진행된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영결식에서 운구행렬이 지나가고 있다.

몇 년 감옥에서 적당히 썩으며 열심히 의식화 서적으로 이론 무장을 하고, 때때로 친구나 가족, 지인, 지지자들에게 편지를 보낸 것을 책으로 엮어내 베스트셀러가 되면 안락하고 쾌적한 삶을 영위하며 자신의 물적 기반을 만들어준 대한민국을 무한정 씹어대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난도질하고, 때때로 미국을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조롱하고 김일성을 주체의 신으로 추앙하면서 편히 살 수도 있다.

게다가 국보법 위반으로 사형 혹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적당히 감형되거나 특사로 풀려나 사회로 복귀하면 금상첨화다. 이쯤 되면 좌익 정당의 전국구 비례대표는 따 놓은 당상이고, 그것이 뭐 활동하기에 거추장스럽다면 서울 변두리에 있는 대학의 석좌교수나 ‘진보단체’라는 그럴 듯한 이름의 대표나 고문으로 모셔져 평생 돈 걱정, 생활비 걱정 않고 편히 살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좌익, 민족진영, 진보, NL, 주사파, 민주주의의 레떼르는 오늘날 이 나라, 이 사회에서 무소불위의 권위를 부여하는 월계관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망 때도 그랬거니와 신영복이란 사람의 죽음을 두고 언론과 민주화 인사들이 또 다시 추모 광풍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런 통과의례 상 당연한 귀결이다.

신영복은 용공 조작?

대한민국을 뒤엎겠다고 ‘통혁당’이란 것을 결성하여 김일성을 추종하다가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사람이 신영복이다. 더구나 그가 체포될 당시 그의 신분은 육군사관학교 교수였다. 현대사를 잘 모르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현혹하기 위해 신영복이 마치 군사독재정권 시절 용공(容共) 조작에 휘말려 누명을 쓴 피해자로 만드는 조작들이 광범위하게 진행됐다.

그 결과 신영복은 27년 동안 감옥살이를 한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와 비슷한 반열에 올려져 ‘우리 시대의 지성’이니 ‘큰 스승’이니 ‘억울하고 기가 막힌 감옥생활’(뉴스1, 2016.1.18)을 했다고 아우성이다. 뉴스1의 권 모 기자가 쓴 기사에 의하면 신영복의 간첩 혐의는 이렇게 세탁된다.

“신영복의 활동은 후배들의 독서활동과 세미나를 지도해주는 학생운동 차원이었지 ‘사형선고’를 받을 정도의 ‘간첩’행위가 아니었다. 당시 신영복은 ‘통혁당’ 사건의 핵심으로 지목됐지만 나중에 여러 인터뷰에서 신영복은 통혁당에 대해서는 자신은 전혀 알지 못했고 중앙정보부에 가서야 들었다고 말했다.”

이 부분은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2006년 <한겨레21>에 기고한 ‘신영복의 60년을 사색한다’라는 제하의 글에서 신영복 본인의 발언을 인용하여 “신영복은 1965년 2학기나 1966년 초에 <청맥>이라는 잡지를 통해 통혁당과 관련을 맺게 됐지만, 최고 책임자로 발표된 김종태나 조국해방전선 책임자로 발표된 이문규 등 핵심 간부들은 사건이 날 때까지 만나본 적도 없다”고 신영복을 변호한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1964년 서울에서 발족한 통혁당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움직인 지하당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신영복은 그 중에서도 통혁당 산하의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조직비서였다. 1968년 통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던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사상을 전향한 바 없는 골수 좌익 인사다.

국가보안법 위반, 무기징역, 수감생활, 저서 발간, 성공회대 교수의 등식은 그에게 주는 좌익들의 승리의 월계관이다. 이런 좌익 코스프레를 비판하고 방파제 역할을 해야 할 우파 언론들도 나침반이 고장 났는지 아니면 의도적 눈치 보기인지는 몰라도, 덩달아 미쳐 날뛰고 있는 것이 오늘의 이 시대 자화상이다. 신영복에게 만해상을 수여한 것이 아마 조선일보였다지?

국왕도 근엄하게 비판한 조선시대 사관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우리가 형편없는 나라라고 매도하는 조선의 선비들이 남긴 왕조사의 결정판인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오늘날의 기자라고 말할 수 있는 사관(史官)들의 준엄한 비판정신이 섬뜩할 정도로 살아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조선시대 막강한 권한을 쥐고 있던 국왕이 그릇된 판단을 하거나 이치에 닿지 않는 행동을 하면 사관들은 임금의 잘잘못에 대해 적나라한 필치로 비판의 필봉을 휘둘렀다. ‘중종실록’에는 사관이 국왕에 대하여 이렇게 비판한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중종대왕은 인자하고 유순한 면은 있으나 결단성이 부족하여 일할 뜻은 있었지만 일을 한 실상은 없었다. 좋아하고 싫어함이 분명치 않고 어진 사람과 간사한 무리를 뒤섞어 등용했기 때문에 재위 40년 동안 혼란한 때가 많아 끝내 조금의 안정도 이루지 못했으니 슬프다.’(중중 39년 11월 15일)

명종은 아침저녁으로 성질이 변화무쌍하게 변화하는 인간 유형이었다고 하는데, 그에 대한 사관의 비판도 가혹하기 그지없다. 다음은 명종 17년(1562) 7월 12일 실록의 기록이다.

‘임금은 기쁨과 분노가 일정하지 않아 아침에 벌을 주었다가 저녁에는 상을 주고, 또는 저녁에 파면시켰다가 아침에 다시 임명하니 환관들이 임금의 마음을 미리 헤아려 두려워하지 않았다. 임금이 항상 젊은 내시 하나를 총애하여 침실 곁에 있게 하고 절도 없이 상을 하사하고, 심지어 내탕금으로 그가 살 집을 사주기까지 했다.’

사관들은 국왕뿐만 아니라, 왕에게 올바른 간언을 하지 못하고 비위 맞추기에 급급한 대신들을 향해 거침없이 “종기를 빨고 치질을 핥아가며 아첨하는 무리”라고 비판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국왕이나 국정의 주요 업무를 맡았던 대신들이 사망할 경우 졸기(卒記)라는 것을 남겨 놓았다. 요즘 용어로 바꾸면 ‘부음기사’인 셈인데, 이 졸기가 추상같이 올곧아 충격을 준다.

중종 14년(1519) 10월 3일 실록에는 좌의정 신용개의 졸기가 실려 있는데, 이 대신에 대한 사관의 평은 이렇다.

‘사신은 논한다. 나라에 재상이 있는 것은 집이 기둥이나 주춧돌에 의지하는 것과 같다. 신용개는 평생 마음 쓰는 것이 장부의 도량이 있는 듯하고 문장도 칭찬할 만한 데가 있었으므로 청요한 벼슬을 두루 거쳐도 비난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실천하는 학문이 부족했으므로 대신이 되어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하고 자신을 위하는 일이 잦았다. 마음에 불편한 생각이 있으면 취하도록 술을 마셔 정신을 잃고 거꾸러져 실려 가기도 했다. 사람들이 “별 볼 일 없는 재상”이라고 했으나 그 속에 비난의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가치 평가는 모두 기록으로 남겨

칭찬할 것은 칭찬하되 비판할 것은 비판하는 직필정신이 보이지 않는가. 조선왕조실록을 더더욱 연구해야 할 점은 사실관계가 상충할 경우 서로 다른 기록들을 모두 남겨 후세가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에는 당쟁의 결과 특정 정파가 득세하여 주요 대신들이 교체되거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이미 편찬된 실록을 수정하거나 다시 쓰는 사례가 있었다. 그런데 실록을 다시 쓰거나 개수(改修)할 때도 원실록을 폐기처분하지 않고 수정된 실록과 함께 후대에 남겨두었다. 후대가 두 가지 기록을 비교 검토함으로써 당대의 역사를 객관적 시각으로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수정된 실록을 발간한 사례는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숙종실록과 숙종보궐정오, 현종실록과 현종개수실록, 경종실록과 경종수정실록 등 네 차례다. 원본 실록과 수정된 실록을 비교해 보면 한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상반된 가치평가를 내리고 있음이 발견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숙종 시절 대제학을 지냈던 오도일의 졸기다.

오도일은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런데 워낙 음주를 좋아하는 성격이어서 국왕이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사직단에서 기도하는 자리에서 작주관(제사 때 술을 따르는 관리) 오도일이 술에 취해 넘어져 음복주(飮福酒)를 뒤엎는 불경죄를 저질러 귀양을 갔다가 숙종 29년(1703) 2월 14일 장성 유배소에서 죽었는데, 실록은 그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졸기를 남겼다.

‘오도일이 장성 유배소에서 죽었다. 본래 방탕하고 몸을 단속하지 못했는데 만년에는 더욱 방자하고 패악해 사람의 도리가 없었다. 유배지에 있으면서 더욱 뜻을 잃고 슬퍼하여 오로지 술로 마음을 풀었는데, 취하면 옷을 벗고 벌거숭이가 되었다.

같은 당에 속한 고을 관리가 관청 기생을 보냈는데 오도일은 이들을 발가벗겨 쫓아다니며 희롱하므로 사람들이 차마 볼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가서 이 모습을 구경하자 또 억지로 옷을 벗게 했으나 그 사람이 달아나 겨우 면했다. 남쪽 사람이 침을 뱉고 꾸짖으며 “사람 짐승”으로 지목했다.

젊어서는 자못 청백하다고 스스로 일컬었는데, 만년에는 부유한 상인의 집에 붙어살면서 날마다 술과 고기를 마련하게 하고 요구가 끝이 없어 상인이 크게 원망했다. 종실 전성군 이혼은 행동이 개, 돼지와 같아서 사람 축에 끼지 못했는데 오도일은 그 부(富)를 탐해 아들을 장가들게 하니, 그 당파 사람들도 더럽게 여겼다.’

졸기(卒記)라도 제대로 써라

그런데 ‘숙종실록’은 당파싸움이 기승을 부렸던 시기에 편찬된 관계로 객관적이지 못하다 하여 후에 다시 ‘숙종보궐정오’가 편찬됐다. 같은 인물의 죽음에 대해 새로 편찬한 ‘숙종보궐정오’(숙종 29년 2월 14일)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전 판서 오도일이 장성 적소에서 죽었다. 오도일은 뛰어난 재주가 있으며 총명이 빛났고, 풍치가 사람을 움직이고 문사가 넉넉하고 민첩했다. 몸을 다스리기를 청백하게 하여 세상에서 그를 인정했다. 성품이 술을 좋아해 몹시 취한 적이 많아서 세상일을 경영할 뜻이 없는 듯했으나 안팎 벼슬에 나가 문득 빛나는 명성이 있었다. 임금도 재주가 많음을 기특하게 여겼으므로 세상에 드문 특별한 은혜를 입었다.

그러나 성품이 단정하지 못하고 정성스러움이 부족하며 기를 숭상하고 남을 업신여기기를 좋아했다. 술이 취하면 같은 좌석에 있는 사람을 욕하는 일이 많았고, 당론에 용감하여 과격한 주장을 했다.

또 영리에 담담하지 못해 기사년(1689) 후에 그 거취가 공론에 불만족한 것이 많았고, 갑술년(1694)에 이사명 등을 논핵한 상소는 진실로 사람들이 말할 수 없는 것이어서 같은 당 사람들의 원망과 미움을 받았다. 행동이 방종하여 여러 번 실패를 당했으나 나감만 있고 물러감이 없었다.’

정권이 바뀌어 새로운 집권자들이 실록을 새로 편찬하면서도, 전 정권의 기록을 말살하지 않고 후대에 남겨 객관적 시각을 갖도록 했던 관대한 기록정신이야말로 조선시대 문치(文治)의 정신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아무리 좌익 전성시대라 해도 기자들만은 정신 차리고 세상사에 대한 사실 확인, 즉 팩트 파인딩(fact finding)을 제대로 해야 간첩, 좌익 혁명가가 ‘민주화의 성인(聖人)’으로 둔갑되는 선전선동을 막을 수 있다. 세상사가 사실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이 기자의 사명이자 직업인으로서의 책무다.

기자가 소설가가 되는 순간, 이 나라는 만인(萬人)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는 정글이 된다. 그 정글 속에서 선전선동으로 열심히 이득을 챙기는 것은 좌익 전체주의자들이다. 뭔가에 가위눌려 간첩을 간첩이라 제대로 쓰지도 못하는 기자들이여. 졸기, 즉 부음기사라도 제대로 쓰자. 조선시대의 사관들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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