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의 중도와 통합은 OO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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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한국
  • 승인 2016.01.28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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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중도·통합의 실체

국민대통합은 국가의 기본인 헌법적 가치에 동의하는 집단들 사이에서나 가능 

김인영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대의민주주의와 선거 

슘페터는 대의민주주의의 핵심을 “주기적인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정치지도자들이 국민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정치적 경쟁’을 벌이는 것”으로 규정했다.

▲ 동아시아 경제연구원 연구위원·경제정의실천연합 정치개혁위원장

대의민주주의(representative democracy)에서 ‘주기적이며 경쟁적 선거’는 정당과 대표자가 주기적으로 국민의 심판을 받는다는 점에서 민주(民主), 즉 민(民)의 간접통치를 담보하게 된다. 

시민이 직접 정치적 토의에 참여하고 관직을 담당하는 아테네 직접민주주의와 달리 대의민주주의에서는 시민의 정치 참여가 제한되기 때문에 선거는 정당, 의회와 함께 대의민주주의를 완성시키는 제도다. 한마디로 선거는 국민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한 정당들의 경쟁이다. 

정당들은 경쟁에 이기기 위해 정책으로 구성된 통치 프로그램을 정교하고 매력적으로 만든다. 정책의 정교함을 통해 실행 가능성을 보여주고, 매력적인 정책으로 대중성을 확보한다. 하지만 대중성 있는 정책은 많은 경우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고 선동적이다. 그러한 세련되지 못함을 걸러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여론, 시민단체, 연구단체, 학자의 역할이다. 

보수주의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는 정당(政黨, party)을 ‘합치된 노력으로 국가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모두가 동의하는 어떤 특정의 원칙에 근거해서 뭉친 사람들의 집합체’로 정의했다.

‘특정의 원칙’이란 정당의 이념과 정강(政綱)정책을 의미하며, 정당의 정체성(identity) 확립에 필수적인 항목이다. 따라서 ‘일정한 원칙을 가지고 정권 획득을 위해 뭉친 집단’은 정당이고, ‘특정 인사를 중심으로 무원칙하게 모인 집단’은 도당(徒黨)이 된다. 

‘중도’와 ‘통합’은 없다 

안철수 의원이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한 것은 정치 이념과 정책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당권과 공천권, 정당 운영 방식 때문에 생긴 것이고, 그렇다면 이는 새정치민주연합이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뭉친 도당이기 때문에 생겨난 사건이다. 

대한민국의 정당은 실제적으로는 인물 중심의 도당에 머물러 있기에 인물이 합류하고 탈퇴함에 따라 정당 명칭이 바뀌고, 또 새로운 정당이 태어나는 불안정한 정당체계(party system)를 보이고 있다. 정당이 쉽게 이합집산 하는 모습은 한국 정당의 고질화된 특징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일정한 원칙을 가지고 모인 집단이 아니라 인물을 중심으로 모인 집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당들이 주장하는 ‘통합’은 이념적 통합이 아니라 잡다한 정치인들의 더하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유권자들은 속지 말아야 한다. 

문재인 더민주 대표는 최근 한 모임에서 기자들과 만나 안철수 신당과의 관계에 대해 “앞으로 좋은 경쟁도 해나가야 하고 언젠가는 합치기도 해야 하고 길게 보면 같이 갈 사이”라고 했다. 더민주가 원칙 없이 뭉친 집단이라 원칙 없는 다른 정당과 쉽게 합치는 것을 상정한 것이다.

따라서 유권자들은 20대 총선 전, 또는 적어도 2017년 대선 전에 통합할 정당이 새로운 원칙 또는 미래 통합 비전과 그 실천을 위해 통합하는 것이 아님을 간파해야 한다. 

또 이렇게 쉽게 분열하고 통합하는 정치인들이 선거에서 ‘사회통합’을 강조할 때 국민은 그 철학 없음이나 가벼움을 주목해야 한다. 균열, 분열, 갈등의 존재와 위험성을 부정해서는 안 되지만 이러한 현상들에 지나치게 반응하여 전체 통일을 주장하고 실현할 필요는 없다. 

우리 사회가 과거에 공동체적 동질 사회였음을 기억하고 다시 그런 대통합의 동질사회로 가야 한다는 만장일치 국민통합 식 주장은 정치적 목적의 슬로건에 불과함을 국민은 기억해야 한다. 도리어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정당정치와 법치가 제대로 되고, 합의 도출 제도가 마련되며, 갈등 관리 능력을 고양한다면 균열과 분열은 사회 발전의 동인이지 나쁜 것이 아니다. 

20대 총선에서 대한민국의 통치 이념인 자유민주주의를 기본 출발점으로 하지 않는 사회 통합 정책은 통합적이지 않고 체제 분열적임을 국민은 주의해야 한다. 즉, 국민대통합이라는 것은 국가의 기본인 헌법적 가치에 동의하는 집단들 사이에서나 가능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번 20대 총선에서도 많은 정치인들이 통합을 외치고, 통합을 위한 정책들을 무수히 제시할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통합’을 정당명으로 쓴 정당이 실제로는 이념적으로 지역적으로 매우 치우쳤고, ‘통합’이라는 명칭으로 그 정파성을 감추고 있다는 점이다. 

또 국민은 이번 총선에서 사회적 평등을 강조하는 정당과 포퓰리즘 정책을 공약하는 정당은 실제로는 사회통합에 부정적 효과를 가져오므로 경계해야 한다. 평등주의적 또는 포퓰리즘적 정책은 부자와 빈자(貧者), 강자와 약자, 자본가와 노동자, 친미와 반미 등 기본적으로 사회를 이분법적으로 보는 시각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공동체에서 누구든 빼어나거나 뛰어나거나 부가 많지 않고 비슷비슷하게 균등적일 때 평등하기 때문에 통합을 위해 부자에게서 과도한 세금으로 재화를 빼앗아 나누어주거나 대기업의 활동을 규제하는 정책을 사용하게 된다.

이러한 평등주의적 정책은 일시적으로는 효과를 가져 올 수는 있으나 경제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부자를 포함한 사회 일부 계층과 대기업의 반발을 초래하여 또 다른 사회적 갈등을 가져오게 된다. 

또 국가의 재정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포퓰리즘적 복지정책은 다수 대중의 동의를 얻는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재정 고갈을 초래해 국가 위기로 발전하게 된다. 최근 사회통합이라는 미명 하에 만들어지고 있는 포퓰리즘 공약은 궁극적으로 국가 재정 파탄을 가져올 것이기에 국민은 이번 총선에서 특별히 경계해야 한다. 

▲ 지난 대선 과정에서 후보 단일화를 했던 문재인·안철수 대표가 다시 헤어졌다.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는 정치인들이 선거에서 사회통합을 강조할 때 국민은 이들의 변신을 주목해야 한다.

‘흙수저’ 탈피와 ‘갑의 횡포’ 철폐는 거짓 공약 

흙수저는 한국사회 양극화 현상을 표현하는 용어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사회 분열을 강조하는 용어다. 자신을 ‘흙수저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라는 자기 비하와 자기 부정의식도 문제지만, 이제까지 혼신의 노력으로 자신을 키워준 부모를 쓸모없는 흙덩이 취급하는 사고다. 부모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배은망덕이다. 

역지사지로 입장을 바꿔 자신이 부모가 되었을 때 자식이 “왜 나는 흙수저 밖에 받은 것이 없냐고, 왜 당신은 노력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무엇이라 대답할 것인가? 금수저만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의 미숙도 문제이지만 자신을 스스로 소중히 생각하지 않는 개인이 자신이 속한 가족과 사회를 소중히 지키려 하겠는가. 

이러한 ‘흙수저’ 계급론은 패배의식이자 ‘남 탓’의 극치다. 자신의 부진과 실패를 자신의 탓이 아니라 남 탓, 사회 탓으로 돌리는 무책임하고 비겁한 사고다. 20대 총선에서 정치인들은 ‘흙수저’의 등장에 사회적 책임을 지우고 정권을 비난하고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의 사회적 불평등을 없애고 사회를 평등화 하겠다고 약속할 것이다. 

하지만 기회의 평등화가 아닌 결과의 평등화의 길은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었다. 그러한 사회주의의 길은 전체 국민을 하향 평준화하여 못사는 공화국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음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이번 20대 총선에서 유권자 국민은 ‘흙수저론’이 한국 사회를 부정하고, 사회를 계층화하고, 사회주의적 평등으로 가자는 선동 구호임을 알아야 한다. 젊은이들 역시 자신 이외에는 그 누구도 자신의 인생을 책임져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국회의원은 “유권자를 위한다”라는 말로, 관료는 “국민을 위한다”, 그리고 노조는 “비정규직을 위한다”는 말로 현혹한다. 하지만 국회의원, 관료, 노조는 모두 우리 사회 최고의 갑(甲)이다. 사회의 진정한 갑이 그들이 갑을 관계를 없애겠다는 주장과 공약은 자기 모순적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진정한 갑인 그들은 하나 같이 립 서비스를 빼고는 행동은 없다.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려고만 하는 그들이기에 국회의원은 자신들의 특권을 없애겠다는 공약은 하지 않고, 공무원은 권한을 폐지하는 규제 개혁은 언급하지 않고, 노조는 노동 유연성 확보를 통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외치지 않는다. 따라서 국민은 우리 사회의 진정한 갑을 관계의 개선은 국회의원의 특권, 공무원의 규제, 노조의 자리 지키기 투쟁을 없앴을 때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중도, 진보정치인의 정체를 파악해야 

중도란 정해진 내용 없이 “좌파와 우파의 이념을 체계 없이 섞은 것”일 뿐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중도실용론을 김동길 교수는 “우왕좌왕 기회주의”라고 평가했다. 해방 정국에 중간에서 어정대던 기회주의적인 세력이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중도실용은 1년도 지속하지 못하고 결국 친서민 (포퓰리즘) 정책, 동반성장론으로 이어졌다. 

우파든 좌파든 자신의 이념을 감추기 위해 중도라고 어정쩡하게 표현하려 한다면 그것은 비겁한 것이고 국민을 속이는 것이다. 특히 좌파는 자신들의 이념과 색깔을 감추기 위해 중도통합, 대통합을 외치지만 결국 정당의 기반은 좌편으로 굳건하다.

왜냐하면 오토 키르크하이머가 2차 세계대전 후 유럽에서 이데올로기가 쇠퇴함에 따라 유럽 각국의 중요 정당들이 포괄지지정당(catch-all party) 형태로 변화한다고 했지만, 이것은 투표자 모두를 잡겠다는 선거전략(catch-all strategy)으로 우-좌의 굳건한 지지 기반 위에서 일어난다. 

즉, 우파-좌파 정당은 유권자를 끌어 모으기 (또는 현혹하기) 위해 선거 때에만 전략적으로 중도와 통합을 내세우는 것이다. 결국 선거 전략으로서의 중도와 통합은 있을 수 있지만 이념의 중도와 통합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책으로서의 중도 내지는 ‘제3의 길’이 존재하지 않음은 이미 영국 토니 블레어 총리의 ‘제3의 길’ 전략이 보여준 바 있다. 토니 블레어 시기의 앤서니 기든스를 포함하여 역사적으로 ‘제3의 길’은 좌우의 통합을 결과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새로운 실험으로 끝났다.

대한민국 건국 당시의 상황이 보여주듯이 남한의 자유민주주의와 북한 김일성의 전체주의의 중간노선은 통합이 아니며, 궁극적으로 터지고 말 갈등의 일시적인 봉합이었다. 

‘중도’와 ‘통합’의 이념적 허구성뿐만 아니라 국민은 ‘진보’ 또는 ‘진보 정치인’이라는 규정도 바른 개념이 아닌 거짓된 개념의 명칭임을 깨달아야 한다. 선거에서 일부 정당들이 자신들의 정책이 좌파적이 아니고 진보적이라고 포장할 것이다.

하지만 국민은 한국 사회에서 진보를 표방하는 정당은 변화하는 세계를 외면한 채 가장 완고하게 사회주의를 고수하는 정당일 뿐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실패한 사회주의를 한 적이 없으니 사회주의는 실패한 적이 없다고 강변하는 이념적 퇴보 집단일 뿐임을 간파해야 한다. 

한국에서 보수-진보라는 명칭은 우파-좌파의 이념적 명칭 대신 잘못 붙여져 시작되었음은 이미 밝혀진 바이다. 해방 이후 좌파 집단은 좌파 이데올로기를 탈색하여 대중적 지지를 이끌어내겠다는 정치적 목적을 가졌고, 6·25 전쟁 이후에는 ‘반공(反共)’을 국시로 삼은 권위주의 정권 아래에서 자신의 이념적 정체성을 명확히 드러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좌파-우파 대신 진보-보수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극우를 보수로, 극좌를 진보로 표기한 일본식 용어를 무분별하게 도입 사용하여 관행(慣行的)으로 정착시킨 한국 사회의 언론과 정치권에도 책임이 있다. 

따라서 20대 총선에서 국민은 우파-좌파라는 원래 개념 대신 보수-진보의 개념을 사용하는 언론과 정치인의 정체를 명백히 파악해야 한다. 보수-진보의 이분법적 프레이밍(framing)에 매몰되어 역사와 현실태(現實態)에 대한 이해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그리고 보수는 나쁘고 진보는 옳고 좋다는 주장을 하는 정당과 정치인의 독선주의 주장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해방 이후 보수를 친일로 매도하고, 없어져야 할 세력으로 몰아가는 자칭 ‘진보 정치인’의 독선적 태도는 그 동안 한국 사회에 바람직하지 않은 영향을 미쳐왔다. 사실 보수는 기본적으로 진보보다 수세적 입장에 있어왔으며, 보수=친일=없어져야 할 세력으로 매도당해 왔다.

하지만 보수에 대해 도덕적·윤리적 프리미엄을 가지고 출발한 자칭 진보는 ‘말 진보’, ‘입 진보’라는 일반 대중의 비아냥과 비판에서 보듯이 ‘대안 없는 비판’과, ‘대한민국에 대한 정체성 부정’, 그리고 역사적 퇴행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북한 정치체제를 옹호하기에 이르렀고, 급기야는 ‘통합진보당’이라는 정당을 만들어 뭉치게 되었던 것이다. 

또 해방 이후 좌파는 서구의 매력적인 개념을 도입한다는 의도 아래 전략적으로 ‘진보’와 ‘민주주의’를 선점하여 사용하며 자신들의 이념적 정체성을 명확히 드러내지 않았다.

초기에는 대중에게 긍정적이고 쉽게 받아들여지는 서양식 용어를 차용했고, 이후 국제적 냉전이 심화되자 ‘빨갱이’ 색깔 공세를 피하려 했던 의도가 있었다. 나아가 보수라는 명칭도 좌파가 우파의 이념을 폄하하고 또 우파를 독재(우호)세력이라고 낙인찍기 위해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했다. 

국민들은 20대 총선에서 진보의 가면을 쓴 좌파세력과 좌파언론이 보수세력을 친일세력, 독재세력으로, 나아가 한국 사회에 없어져야 할 세력으로 매도하는 행위의 정치적 목적성을 깨달아야 한다. 오직 누가 경제를 성장시키는 환경을 만들고 누가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정당이 국민의 삶을 나아지게 할 것인지를 냉철하게 판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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