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敵(적) ’들에 대해 결단하라
‘자유의 敵(적) ’들에 대해 결단하라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6.04.08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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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전망대] 공권력과 민주주의

국가는 주권자인 국민들이 정의를 구현하라고 유일하게 폭력을 허용한 질서다. 공권력에 도전한 이들을 체포하지 못하는 국가는 더 이상 국가가 아니다 

1920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 미국노동총연맹(AFL)의 파업이 일어났다. 얼굴이 하얗고 말수가 적어 샌님 취급을 받던 주지사는 파업 소식을 듣자, 즉각 주 방위군을 동원해서 파업 현장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는 파업 노동자들을 강제 해산했다. 노동자들은 군대가 몰려오자 그만 아연실색했다. 

얌전한 샌님같이 생긴 주지사는 당시 기세등등했던 미국노동총연맹 위원장인 새뮤얼 곰파스 위원장에게 엄숙하게 말했다. 

“공공의 안전을 위협하는 파업을 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어느 곳에도, 어느 때에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는 하루 만에 미국 전역에서 영웅으로 떠올랐다. 바로 미국의 30번째 대통령 캘빈 쿨리지였다. 미국은 쿨리지 대통령의 시기에 가장 역동적인 경제성장을 이뤘다. 

우리 사회에는 폭력을 수반한 집회가 마치 시민의 권리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1987년 민주화 투쟁에서 일상화된 폭력성 집회는 그 자체로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포장해 왔다. 투석과 화염병은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민주진보의 분노였으며, 쇠파이프와 죽창은 ‘투쟁의 검’이었다. 그러다가 공권력에 희생이라도 되면 그는 열사의 반열에 올랐다. 

1980년대 대학가는 매캐한 최루가스에 찌들어 있었고 보도블록은 성할 날이 없었다. 다수의 시민들은 그런 일상을 민주주의라고 여겼다. 야당 정치인들과 재야인사들은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로 자신들의 폭력집회를 정당화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것일까. 

이 말은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이 했다. 원문은 “자유의 나무는 애국자와 압제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다”이다. 그는 이 말을 1786년 독립전쟁 이후 극심한 사회 갈등이 벌어진 상황에서 했다.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내부적으로는 빈부격차로 극심한 갈등이 있었다. 

급료를 받지 못한 퇴역 군인들은 종종 반란을 일으켰다. 제퍼슨의 이 말은 이후 여러 나라들에서 독재정치에 투쟁하는 이들에 의해 애용됐다. 하지만 미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 것이 아니라, 법을 먹고 자랐다. 미국인들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폭력을 권리로 인식하는 한국 

하지만 한국의 민주화는 철저한 계급투쟁론을 신봉하는 체제변혁세력에 의해 폭력이 마치 자신들의 권리인 것처럼 인식되었다. 그 관성이 오늘에 이르러서는 대단히 고질적이고 동시에 악질적이다. 

1980년대가 권위주의 통치시대였다는 점에서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급진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수준에서 과연 폭력을 수반하는 불법 집회에 정당성이 있을까. 

과거처럼 부정선거와 관권 선거로 시민들의 참정권이 제약된 상태도 아니다. 얼마든지 투표로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 그럼에도 민주노총과 같은 집단은 민중총궐기라는 방식으로 불법과 무질서를 조장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이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질서를 수립한 자유민주 정치공동체의 주권자다. 그리고 ‘자유민주적 질서’란 대한민국 정치 공동체가 공산주의를 적(敵)으로 해서 만장일치로 결단한 정치적 가치다.

이 가치와 질서는 누구도 허물 수 없으며 이에 대한 도전은 허락되지 않는다. 따라서 민주노총과 좌파 진보 세력이 주장하는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과 같은 계급혁명 개념은 대한민국 헌정질서에 반한다. 

그런 반체제적 가치를 불법과 폭력으로 관철해서 체제 변혁을 이루겠다면, 그것은 반란에 해당하며, 동지적 시민에서 적으로 돌아서는 것이 된다. <국가론>을 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아군에게는 선하고, 적에게는 무자비한 자가 국가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헌법론에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칼 슈미트는 “정치질서란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했다. 사실 모든 정치공동체(Polity)는 외적에 대해 자신들의 생명과 자유, 그리고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를 세운다. 따라서 동질적인 정치공동체의 시민들은 동지인 것이지, 서로 적이 아니다. 적은 언제나 정치적으로 공공의 적이며, 그것은 한 정치공동체가 결단한 가치에 적대적인 세력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민중총궐기’를 내세우는 진영의 정치적 가치가 무엇인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들은 자유민주적 질서를 확신하는 자들인가? 그리고 시장경제를 신뢰하는 자들인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자유의 적’이자, ‘공공의 적’이 된다. 그런 적들에 대해 국가는 결단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라는 존재가 의미를 갖는 것은 무질서와 폭력으로부터 개인들을 보호하는 것이지, 그러한 것에 관용을 베풀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국가가 성립한다고 해서 그런 무질서와 폭력이 국가 내에서 완전히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국가의 최고 통치권을 가진 지도자에게는 ‘완전한 명령권(Verum Imperium)’이 주어져야 한다. 그는 국가의 실패를 방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국가의 실패 

오늘 대한민국의 실상은 국가 내 무질서와 체제에 대한 도전에 무기력하다. 여기에는 그런 도발을 허용해서는 안 되는 헌법기구인 국회의원들의 무책임과 방조, 심지어 불법에 동조하는 국회의원들이 존재한다. 대한민국의 공권력은 불법 집회에 참석한 국회의원들을 체포하여 법의 심판에 넘기기를 주저한다. 제대로 된 법치국가에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상황은 ‘국가의 실패’를 의미한다. 공공도로를 불법 점거한 이들을 해산시키지 못하고, 공권력에 도전한 이들을 체포하지 못하는 국가는 더 이상 국가가 아니다. 국가는 주권자인 국민들이 정의를 구현하라고 유일하게 폭력을 허용한 질서다.

국가는 합법적인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이며, 그러한 것을 공권력이라고 부른다. 공권력의 면전에서 법치를 허물고 공권력에 도전하는 자들을 국가가 방기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게 된다.

그러한 관용을 국가가 베풀면 베풀수록 자유의 적들은 더 교만해지고, 자신들의 불법과 폭력이 자신들의 권리가 되는 줄로 착각하기 마련이다. 국가의 공권력은 도발에 대해 비례적으로 사용되어야 하지만, 역으로 그 비례성이란 최후의 수단을 배제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미국의 경우, 경찰의 명령에 불복하는 자에 대해서는 폭력을 사용해 굴복시키는 정도이지만, 경찰이라는 공권력에 폭력으로 대항하는 자에 대해서는 그 생명권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런 원칙이 국가의 기강이고 법치의 실현이며 자유와 정의를 수호하는 원칙이다. 공권력의 수호자가 불법의 폭도들에게 겁박당하고 유린되는 국가에는 망조(亡兆)가 들었다고 할 수 있다. 

“자유라는 나무는 애국자와 압제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 

재퍼슨의 이 말은 오늘 대한민국에서 누가 애국자이며, 누가 압제자인지 생각게 하는 문구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의 문구를 멋대로 해석해서 법 위에 군림하려는 폭도들이 날뛰는 한, 대한민국의 미래는 풍전등화와 같은 신세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국민도 복종해야 할 ‘보편적 선(善)의 원리’로부터 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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