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대한민국 위기의 보수주의
위기의 대한민국 위기의 보수주의
  • 이동호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6.05.17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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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풍향계] 한국 보수주의 생존의 길

대한민국이 처한 위기의 본질은 한국 보수주의 운동과 보수주의 정당의 사상의 정당성의 위기. 보수주의 운동은 철학과 가치로서 대중을 효과적으로 설득하는 데 실패 

보수주의 운동의 위기, 보수주의 정당의 위기 

한 차례 태풍이 휘몰아쳤다. 4월 13일에 끝난 20대 총선의 결과는 우리 모두를 경악시켰다.  유권자들의 분노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했다. 그들은 확실히 표로써 한국의 보수주의 정당에 심판을 가했다. 4월 13일에 시작된 태풍은 그 강도에서 역대 최강 급이다. 따라서 그 후유증도 심각할 것이다. 

▲ 연세대 신학과·캠페인전략연구소 소장·네이버 자문위원·전 중소기업진흥공단 감사

4월 13일에 휘몰아친 태풍은 한국 보수주의 운동과 보수주의 정당 모두에게 심각한 도전이었다. 한국 보수주의 운동과 보수 정당은 그 근본에서부터 부정당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가져왔다. 극도의 당황과 혼란이 현재의 모습이라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 

5월 3일 새누리당은 당선자 총회를 열어 정진석 의원을 새원내대표를 선출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새로 선출된 원내대표가 새누리당의 위기를 수습하고, 내년 대선을 향한 새로운 출발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 않다. 

새누리당 원내 지도부 후보들은 모두 하나같이 계보정치 청산을 외쳤다. 공허한 소리로 들린다. 그동안 한국 정치에서 새로 등장한 지도자 마다 계보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실 정치에서 계보 없는 정치가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거슬러 올라가서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당파가 없었던 적이 얼마나 되었던가. 

계보 없는 정치가 가능하기나 한가? 모두 식물인간이 되어 강력한 힘을 가진 소수에게 무조건 복종한다면 계보 없는 정치는 가능할 것이다. 계보 없는 정치는 다른 표현으로 한다면 전제정치거나, 혹은 생각 없는 사람들의 정치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인간은 모두 다르다. 서로 다른 인간이 국가 공동체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한 가지 해법으로 통일되기는 어렵다. 나의 의견이 존귀하다면,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의견도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 서로 다른 의견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정치다. 따라서 정치는 서로 다른 의견을 전제하고 이를 해결하는 방법에 관한 차이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정당은 원래 사람의 당파적 무리를 지칭하는 것이다. 

정치를 하는 방법 중에 전통적인 방법은 입장과 노선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임을 형성하고 그들의 입장을 발전시켜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붕당이고 정당이다. 이를 다시 세분하면 계보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정당 내에서 서로 다른 그룹이 있다는 것을 부정적 시각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 서로 다른 그룹이 철학과 노선, 구체적 정책을 놓고 서로 경쟁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모습이다. 오히려 장려해야 한다. 

철학과 노선, 정책이 사라졌다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주장한 현재 보수주의 정당의 위기에 대한 해법인 ‘계보 없는 정치’는 문제의 본질을 잘못 본 것이다. 문제는 계보가 아니라 한국 보수정당의 철학과 노선의 부재에서 찾아야 한다. 

미국의 서양 사상사가인 크레인 브린턴은 그의 저서 <서양사상의 역사>에서 “이상은 식욕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행동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점에서 강점을 지니고 있다. 그런 면에서 사람은 사상과 이해관계-또는 욕구, 충동, 물질적 요인-라는 두 요소 모두가 있지 않으면, 생기 있게 움직이는 인간 사회, 그리고 인간의 역사가 성립될 수 없다”고 서문에서 말하고 있다. 

브린턴은 이해관계와 사상이 인간을 행동하게 하는 힘이라고 설파했다. 한국의 보수주의 정당은 한국의 유권자들에게 사상-철학과 노선-이라는 동력을 제공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심각히 되돌아봐야 한다. 현재의 위기는 철학과 가치관, 노선 없이 정파적 이해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한국의 보수 정당에 실망했다는 것이 훨씬 정확한 표현일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총선에서 한국 보수주의 정당은 철학과 노선, 정책은 없이 개인과 정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상대방을 쳐내는, 처절하게 대립하는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상대방을 공격해도 최소한의 예의와 노선을 가지고 공격해야 한다. 유승민을 공천에서 탈락시키고자 했다면, 유승민의 철학과 노선이 보수주의 정당의 노선과 철학에 맞지 않다고 정면으로 공박하고 나서야 했다. 그리고 신속히 결정해야 했다. 

유승민의 대표연설과 그가 앞장서서 법제화를 하려 했던 사회적경제기본법은 분명히 보수주의 정당의 노선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또 그가 야당과 합작하여 통과시켰던 국회법 개정안은 야당의 행정부에 대한 무제한적 사보타주가 가능하게 하는 악법(惡法)이었다. 

새누리당이 철학과 가치가 있는 정당이라면 이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하고 당당하게 나서야 했다. 그러나 새누리당 지도부의 모습은 비겁하기 짝이 없었다. 누구도 “왜?”라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마지막 시한에 몰려 유승민 스스로 탈당하도록 했다. 

새누리당은 유승민에게 스스로 결정할 기회를 준 것이라고 강변했다. 이것은 유권자들을 모욕하는 행위다. 이런 비겁한 모습을 보며 보수주의 정당 지지자들이 새누리당을 외면한 것이다. 아니 부끄러웠던 것이다. 

한국의 보수주의 정당과 보수주의 운동은 보수주의 본래의 철학과 노선, 정당성 면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 길만이 끝없는 낭떠러지로 추락한 보수주의 운동과 정당을 다시 세우는 근본적인 해결책이고, 실망한 유권자들에게 꿈과 희망의 근거를 제공하는 길이다. 

꿈과 희망은 이상에서 나온다. 이상은 사상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이상, 사상이 없는 정당은 결코 유권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없다. 인간은 욕구적 존재이면서 이상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한국의 보수주의 정당과 보수주의 운동은 본래의 철학과 정당성 면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사진은 국내 보수주의 운동 본격화의 도화선이 된 노무현 정부시절인 지난 2004년 10월 4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반핵반김 국민협의회 등 보수단체가 정부의 국보법 폐지 움직임에 반대하여 국민대회를 개최한 모습. <사진 이승재 미래한국 객원기자>

왜 다시 보수주의 인가? 

대한민국의 성공과 발전, 그리고 좌익의 도전 

대한민국의 역사는 세계적 유래가 없는 성공의 역사였다. 제1세계와 제2세계를 제외하고 대한민국의 성취를 아직 추월한 나라는 없다. 중국이 근접하고 있지만 아직 경제적 정치적으로 지켜봐야 한다.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각 나라가 국민소득 4000달러에서 7000달러 사이에 정치적 고도화와 민주주의 혁명이 있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것에 비해 중국은 아직 ‘정치적 민주화’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정치학자 김광동은 “대한민국 보수의 성공은 구한말 및 대한제국 시대에 있었던 문명개화라고 하는 커다란 방향성, 가치, 사고의 흐름의 연장선이며, 이러한 가치와 정신을 이어 받은 것이 이승만의 자유당이고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이다. 그리고 이 보수 40년의 역사가 만들어낸 것이 근대 산업화, 민주공화제, 시장가치, 특히 근대 산업화를 중심으로 하는 번영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한민족과 한반도의 문명개화와 실력양성이라는 가치를 지향했고 그 연장선상에 민주공화제와 자주독립이 추구되었다. 대한민국은 지켜나갈 가치가 있는, 성공한 나라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성공 스토리는 곳곳에서 부정당하고 있다. 지난 30여 년간 좌익사상은 곳곳에서 대한민국의 성공 스토리를 부정했다.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이 부정당하고, 민주주의적 발전을 거듭한 것이 아니라 퇴보한 나라이며, 정의가 상실된 나라로 묘사되었다. 

보수주의 세력은 좌익과의 철학적·역사적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 결과 보수주의 세력은 한편의 경제적 성공에 비춰 정치적 사상적 정당성을 잃어버렸다. 반공주의는 수구골통으로 공격당하고 있고, 보수주의 세력은 정치적으로는 독재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매도당했다.

사상적 철학적 각성의 뒷받침이 없는 경제적 성공은 그 객관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투쟁에서 항상 좌익에게 정당성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 성공에 버금하는 사상적 철학적 자각과 각성이 필요한 이유다. 

오늘 우리가 다시 보수주의를 주목하는 이유는 좌익의 도전이라는 문제에 여전히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좌익은 사상적으로 계몽주의, 자유주의의 전제에 전체주의를 가미한 것으로, 그 뿌리는 같은 것이다. 현대 보수주의의 선구자인 에드먼드 버크가 프랑스 혁명을 보고 느꼈던 위험성이 우리 사회에도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설계에 의한 유토피아의 건설의 다른 모습이 공산주의이기 때문이다. 

현대 보수주의의 출발점은 전체주의, 이상주의에 대한 명백한 반대에서 시작되었다. 버크가 느낀 위험성을 우리도 느끼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공산 봉건주의인 북한과 마주하고 있고, 대한민국 내부에서 반(反)자유민주적, 반(反)대한민국적인 사고를 하는 전(前)근대적 세력과 마주하고 있다. 

스스로 철학적 정당성과 가치 증명해내야 

이승만은 그의 저서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에서 군국주의가 전체주의임을 논증하고, 필연적으로 자유통상을 주장하는 미국과 대립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동일한 이유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했다.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인식한 것이다. 

이승만의 공산주의의 위험성에 대한 자각은 선구자적인 것이다. 1930년대 공산주의가 미국 뿐만 아니라 각 식민지 나라의 지식인들에 열렬히 옹호되었다는 사실에 비춰 보면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이례적이다. 이승만은 공산주의,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먼저, 가장 정확히 인식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또한 통상이 부(富)의 증대 뿐만 아니라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것을 일찍이 간파했다.  통상을 통해 약소국과 강대국이 서로 필요한 것을 교환하여 평화공존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통상이 평화를 가져온다”는 이승만의 명제는 그 후 대한민국의 역대 정권이 계승하여 오늘날 평화 속의 통상대국인 한국 경제 발전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성공신화는 세계적인 공산화의 위협 속에서 이룩된 것이다. 대한민국을 둘러싼 대륙 어느 곳도, 심지어 반도의 반쪽도 공산주의에 점령당했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반공노선과 분리될 수 없었다. 

대한민국은 6·25 전쟁을 겪으며 공산주의의 실체를 직접 경험했다. 덕분에 반공주의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지난 30여 년간 집요한 좌익의 공세와, 이에 대한 철저한 무시가 오늘날 성공 스토리를 부정당하는 현실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보수주의는 문명개화, 실력양성의 가치로 무장하여 민주공화제를 지향한 구한말 지식인의 철학적 자각과 진취성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역사는 본인이 스스로 규정하지 않으면 상대편에 의해 규정 당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왔다.  한국의 보수주의는 스스로를 향한 규정에 게을렀다. 그 결과 상대방이 규정한 꼴통, 수구 등으로 매도당했다. 

대한민국의 근대적 진보는 보수주의자들의 공이다. 전 세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압도적 공이다. 세계사적 성공 사건이다. 그럼에도 현실 인식에서 한국의 보수주의는 매도당하고 있다. 한국의 보수주의는 스스로 철학적 정당성과 가치를 증명해내야 한다. 

변화와 개혁을 선도하는 철학으로서의 보수주의 

철학으로서의 보수주의는 신(神)의 권위를 인정하고, 전통적 사회질서를 존중하며,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특히 보수주의 철학에서 중요한 점은 인간 이성의 한계에 대한 철저한 자각이다.

보수주의는 이성의 한계 때문에 인간이 사회를 완벽하게 재구성하거나, 일거에 개조하고자 하는 시도는 절대적으로 실패할 것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유토피아이즘, 공산주의, 전체주의 등이 인간의 이성으로 사회를 개조하고자 하는 시도들이다. 보수주의는 이런 시도들에 대한 반대로 시작되었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따라서 완전하지 않은 인간이 구성하는 사회 또한 불완전하다. 불완전한 인간은 오랜 시간을 통해 어떻게 하면 보다 나은 사회를 구성하고 운영할 것인가에 대해 무수한 대가를 지불하면서 경험해 왔다. 인간은 오랜 시간 동안 경험을 통해 인간 사회를 보다 더 안전하고 평화롭게 만드는 방법을 깨닫게 되었다. 

본래 인간은 멈출 줄 모르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 인간의 욕망이 원하는 대로 놔둘 경우 인간 사회는 약육강식이 판치는 정글이 될 것이다. 인간이 구성하는 사회가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기 위한 지혜들이 예의범절, 관습, 전통, 법률 등에 녹아 있다. 오늘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안전한 삶을 영위하는 것은 이러한 것들의 도움에 기인한다. 

철학적 보수주의는 현실 안주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현재의 사회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불완전한 사회에 그대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는 보다 더 안전하고 평화적인 방향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실현 가능하고, 예측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여 개선되어야 한다. 이것이 철학적 보수주의가 지향하는 개혁의 방향이다. 

수주의 개혁은 이상주의적 개혁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전통과 관습, 기존 사회의 구성 원리들을 존중하는 가운데 그 중 시급히 개선을 요하는 것을 구분하고, 실현 가능하고 그 효과가 예측 가능한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무지한 이성을 사용하여 아무도 모르는 방향으로 사회 전체를 내몰 수는 없다. 그 길은 몰락의 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수주의는 전체주의적, 이상주의적 개혁을 거부한다. 

70년 사회주의 실험의 결과는? 

현대 보수주의 철학의 아버지인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 1790)에서 프랑스 혁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저들이 앞으로 나아가 고장 난 굴뚝을 고치고, 허물어진 바람벽을 다시 세우고, 지붕을 든든하게 하려 하지는 않고, 그 대신 집을 온통 헐어 버리고는 저들의 선생인 철학자들이 그들에게 준 청사진대로 아주 새로운 집을 지을 것을 제안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낡은 집은 이 세상에 현존하는 유일한 집이었으며, 설사 사람들이 이론가의 청사진을 쫓아 새 집을 지을 것에 합의할 수 있다 해도, 그 집을 짓는 데는 시간이 걸려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 사람들이 합의를 본 것은 아니었다. 마침내 낡은 집은 아주 잘 헐렸고, 프랑스 국민들은 비바람에서 피하여 쉴 곳을 잃게 되었다.” 

버크는 새 집은 결국 낡은 재료들을 주워 모아 세워질 수밖에 없었다고 예언했다. 인간은 비바람을 막아주는 휴식처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새롭고-낡은 집’을 짓지는 않았다. ‘새롭고-낡은 집’의 의미는 기존의 관습과 전통을 허물었다는 뜻에서 새롭고, 그러나 집은 짓는 방식은 허물어 진 집보다 더 낡은 방식을 사용했다는 뜻이다. 

이상주의자들은 파괴만을 선동했을 뿐 어떻게 건설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때문에 ‘새롭고-낡은 집’은 버크가 예언한 대로 무자비한 건축가, 즉 필요하다면 권위주의자들이 쓰는 수단으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었던 사람에 의해 세워질 운명에 있었다. 버크는 새로운 독재자의 출현을 예고했다. 179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출현함으로써 그의 예언이 실현되었다. 

버크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은 인간이 쉴 집을 모두 헐어버렸기 때문에 쉴 곳을 잃게 되어 다시 과거의 방식으로 지어진 집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실적 안전과 평화를 약속하는 독재자에게 자신의 삶을 맡긴 것이다. 수만 년간 인간이 가꿔온 사회의 전통들을 한꺼번에 모두 폐기한 결과 프랑스는 퇴보의 방향으로 나갔다는 것이 버크의 분석이다. 

우리는 지난 70여 년간 사회주의 실험의 결과에서 버크의 주장의 정당성을 확인했다. 사회주의적 실험은 전 세계 곳곳에서 예외 없이 모두 실패했다. 현실 사회주의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무시하고 오만했으며, 현실적 인간에 대해 무지했다. 계몽된 군주보다 훨씬 전체주의적이고, 독재적인 사회가 현실 사회주의였다. 

버크는 반동분자가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것 실험적인 것의 가능성, 또 필연성을 믿었다.  그는 인류가 이제까지 쌓아온 긍정적인 것들을 ‘보존하기 위하여 개혁하려’ 했다. 지금 우리는 버크의 시대만큼이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대한민국이 그동안 쌓아올린 위대한 성취는 곳곳에서 부정당하고 있다. 보수주의 정당은 철학과 노선이 없는 정당으로 무시당하고 있다. 

대한민국 위기의 본질 

보수주의 운동은 철학과 가치로서 대중을 효과적으로 설득하고 있지 못하다.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위기의 본질은 한국 보수주의 운동과 보수주의 정당의 사상의 정당성의 위기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도전에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온갖 책동과 선동에 결연히 싸워야 한다. 그리고 현대 보수주의가 나가야 할 방향을 설득력 있게 제시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건국 이래 옳은 방향으로 나아갔다. 대한민국이 채택한 자유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는 역사상 최고의 번영을 가져왔다.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방향이 옳았다고 자신 있게 말해야 한다. 이상주의자들은 파괴만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현실 대한민국의 약점을 말할 뿐이다. 그들이 제시하는 대안은 하나같이 실패한 것들뿐이다. 사회주의 나라에서 실패했고, 서구 사회민주주의가 실패한 것들이다. 

다만 시대가 바뀌어 그 효용가치가 다한 것들이 존재할 뿐이다. 이를 대체하는 작업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보수주의적 방식의 접근만이 그간 대한민국의 성취를 지켜내고, 발전의 방향으로 이끌 것이다. 

지금 보수적 유권자들이 싫증내는 것은 한국 보수주의 정당의 철학과 정책, 정당의 운영시스템이다.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그 개선책을 강구해야 한다. 보수주의 정당의 미래를 위해 정당의 공천 시스템을 바꿔 젊고 새로운 인재들을 많이 발굴해야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현실적으로 당면하고 있는 경제적 위기와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청년 실업 등에 대해 보수적인 철학과 방법에 의한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나아가 통일에 대한 비전과 방법을 가져야 한다. 

북한에 대해서는 공세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왜 북한 정권의 붕괴를 공개적으로 말하지 못하는가? 왜 헌법이 규정한 자유민주적 체제에 의한 통일을 주장하지 못하는가. 

과격한 이상주의자들과 좌익분자들에게 대한민국의 미래를 맡길 수는 없다. 그들은 그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목소리 높여 외친다. 대한민국이 무책임한 자들의 선동에 휘말려 쇠락으로 빠지게 방관할 수는 없다. 한국 보수주의 운동이 좌절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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