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대에 선 한국의 중견국 외교
시험대에 선 한국의 중견국 외교
  • 남시욱 미래한국 고문
  • 승인 2016.08.09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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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는 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PCA)의 남중국해 관련 판결에 대해 시종일관 미지근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정부의 이 같은 태도는 미국 정부로부터 판결 지지를 표명해 줄 것을 요청받고도 변하지 않았다. 

▲ 세종대 석좌교수·미래한국 편집고문

6월 3일자 일본 아사히신문에 의하면 미국 정부는 필리핀의 주장을 수용한 7월 12일의 PCA의 판결이 나기 전부터 중국의 패배를 미리 예상하고 관계국들이 판결을 존중해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는 담화를 발표해 달라고 한국 정부에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 측은 “판결이 나오기 전에 태도를 밝히는 것은 어렵다”면서 미국의 요구를 묵살했다고 아사히가 보도했다. 실제로 외교부 당국자는 이 무렵 “판결을 주시하고 있다”고만 기자들에게 밝혔다.

정부의 애매한 태도는 PCA의 판결이 난 후에도 바뀌지 않았다. 정부는 PCA 판결이 나온 지 16시간 30분이 지난 7월 13일 ‘외교부 대변인 성명’ 형식의 미지근한 공식 반응을 보였다. 

이 성명은 단 두 문장으로 이뤄져 있다. 첫 문장은 “정부는 주요 국제 해상교통로인 남중국해에서의 평화와 안정, 항행과 상공 비행의 자유가 반드시 보장되어야 하며, 남중국해 분쟁이 관련 합의와 비군사화 공약, 국제적으로 확립된 행동규범에 따라 해결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줄곧 견지해왔다”고 판결과는 관계가 없는 기왕의 공식 입장을 반복했다. 

둘째 문장은 PCA 판결에 대한 직접적 논평을 피한 채 한국 정부가 판결에 ‘유의’한다면서 “이를 계기로 남중국해 분쟁이 평화적이고 창의적인 외교 노력을 통해 해결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이것은 재판 결과가 “무효이고 구속력이 없다”는 중국 정부와 “최종적이고 법적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돼야 한다”는 미국 정부의 중간선이다.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를 당사자들 간 협상으로 해결하라는 취지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워싱턴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정상회담 뒤 기자회견에서 한국이 중국과 친하게 지내는 것은 좋지만 “박 대통령에게 요청한 유일한 한 가지는, 우리가 중국이 국제규범과 (국제)법을 준수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중국이 그런 면에서 실패한다면 한국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요청했다고 밝혔다. 

▲ 박근혜 대통령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015년 10월 16일(현지시간) 워싱턴 미국 대통령 집무실(오벌 오피스)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귀국 후 한민구 국방장관을 시켜 1개월 후인 11월 4일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제3차 아세안확대국방장관회의(ADMM-Plus)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요구에 부응하는 발언을 하도록 했다.

한민구 장관은 중국의 인공 섬 문제에 관련해 “남중국해에서 항행과 상공 비행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취지의 조항을 폐막 공동선언문에 넣어야 한다는 미국의 주장에 찬성하는 발언을 했다.

그는 또 남중국해 분쟁 시 무력이나 위협으로 해결하지 않는다는 행동선언(DOC)의 완전한 이행에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이로써 한국 정부의 줄타기 외교는 그럭저럭 통했다. 

그러나 막상 중국 정부에 불리한 PCA 판결이 나오자 상황은 달라졌다. 박근혜 정부는 다시 몸을 사리는 입장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완전히 고래 싸움에 낀 새우 신세가 되고 말았다.

물론 박근혜 정부의 이런 모호한 반응은 미-중 갈등 사이에서 중립적 태도를 지킴으로써 외교적 균형을 잡고, 국가이익의 극대화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결과는 무엇인가. 지난 7월 24일과 25일 라오스에서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이 윤병세 외교장관에게 취한 태도를 보면 실망스러울 뿐이다. 

우리는 남중국해 문제에 관해 사실은 사실대로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주석은 기회 있을 때마다 “넓은 태평양은 중국과 미국을 모두 수용할 만큼 광활하다”고 말했다. 이 말은 두 나라가 태평양을 나눠먹자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것은 미중 이외의 여타 나라들은 안중에 없는 대국주의적 발상이다. 

중국은 남중국해의 거의 전 해역을 중국 고유의 영해라는 입장에서 이 지역을 핵심이익지역으로 분류하고 있다. 시진핑이 2013년 미국을 공식 방문했을 때 미국 측에 제의한 평화공존과 ‘신형 대국관계’가 의미하는 바는 미국이 남중국해를 티베트, 신장(新疆)위구르 자치지구, 그리고 타이완과 함께 중국의 4대 핵심이익지역으로 인정해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남중국해 영유권, 남의 일인가? 

남중국해에서의 연안국가들 간의 영유권 다툼은 우리에게 관계가 없으므로 우리 정부는 모르는 체 하라는 주장은 한국의 장기적인 국가이익을 외면하는 무책임한 견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남중국해의 영유권 문제는 결코 우리와 무관한 문제가 아니다. 왜 그런가. 

첫째, 남중국해는 세계 물동량의 50% 이상, 원유 수송량의 60% 이상, 한국 경우에는 중동산 원유의 전량과 무역량의 90% 정도가 이 해역을 통과한다. 이 점은 모두 잘 알고 있으면서도 지금까지 남중해의 영유권 문제, 즉 중국의 구단선(九段線·중국이 1947년 남중국해 해역과 해저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남중국해 주변을 따라 그은 U자 형태의 9개 선.

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는 구단선이 법적으로 영유권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편집자 주)과 인공 섬 건설을 둘러싼 분쟁에 한국 정부와 일부 전문가들이 의도적으로 외면해온 태도는 남중국해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중국의 주장대로라면 남중국해에서 공해(公海)는 사라지고 한국 일본 등 역외(域外) 국가들은 이 수역에서 공해상의 자유항행권이 아닌, 중국과 다른 아세안 관련국들의 관할 해역에서의 ‘무해항행(無害航行)’을 하기 위해 해당국가의 눈치를 보는 신세가 된다. 남중국해가 사실상 중국의 영해가 되는 것과 이번 PCA의 판결에서 판시된 것처럼 공해로 남아 있는 것은 한국에 천양지차가 있지 않은가. 

둘째, 우리는 남중국해가 세계 최대 규모의 경제협력기구인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의 권역에 자리 잡고 있는 중요 해역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1989년 1월 아시아 각국 순방에 나선 오스트레일리아 수상 봅 호크는 첫 방문국인 한국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당시 고개를 드는 미국의 고립주의를 막기 위해 APEC 창설에 합의한 다음 이 사실을 청와대가 발표했다. 

그는 서울에서 경제단체가 마련한 오찬 연설에서도 이 계획을 발표했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밝혔다. 

“냉전 종식의 결과로 조성될지 모르는 세계금융위기(GFC) 우려에 대처하기 위해 APEC 창설을 추진하는 데 힘을 모으기로 한 한국 정부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서울 발표 10개월 후 이 기구는 오스트레일리아 수도 캔버라에서 한미일 등 12개국이 참여한 가운데 제1회 각료급 비공식회의가 열렸다. 중국은 냉전 종식 후인 1991년에, 러시아는 1998년에 각각 가입해 현재 회원국은 미·중·러·일 4개 국을 비롯해 21개 국에 달한다. 

APEC의 최종 목표는 동태적이고 조화로운 ‘아시아 태평양 공동체’로의 발전에 있다. 아시아 대륙과 태평양을 동시에 접하는 반도국가 한국은 미국과는 군사동맹관계에, 중국과는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에 있다.

우리는 이런 관계를 주체적으로 활용해 통일을 이룩해야 하며, 통일 이후에도 아태(亞太) 공동체의 당당한 핵심 창립 회원국으로서 이 지역의 안정은 물론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하는 중견국가의 선두주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한국의 미래상을 장기적인 국가 비전으로 삼아야 할 것으로 필자는 믿고 있다. 이런 점에서 남중국해는 모든 APEC 회원국들의 이해관계가 걸린 바다다. 이번에 남중국해가 공해로 인정된 것은 APEC과 이것이 지향하는 아태 공동체의 장래를 위해 크게 다행한 일 아닌가. 

셋째,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무력시위를 벌이고 있는 행태를 보면 현재 답보상태에 빠진 서해상의 한중(韓中)간 배타적 경제수역(EEZ) 협상의 앞날도 우려된다. EEZ는 해안기선에서 200해리까지의 바다에 대해 그 나라의 경제주권을 행사하는 수역이다. 그런데 서해는 좁기 때문에 한국과 중국이 각각 200해리씩을 EEZ로 책정하면 대부분의 해역이 겹친다. 

한국 측은 양국 해안선에서 등거리의 지점을 잇는 중간선을 EEZ의 경계선으로 하자고 제안한 데 반해 중국 측은 여기서도 ‘사자의 몫’을 요구하는 대국주의의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즉, 중국 측은 중간선 보다 훨씬 동쪽으로 하자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측 주장은 자국의 해안선이 길고, 인접지역의 인구도 많으며, 중국의 대륙붕이 중간선 동쪽에까지 뻗혀 있기 때문에 더 넓은 수역을 중국의 EEZ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한국 제주도 마라도에서 서남방 149㎞, 중국 장쑤성(江蘇省) 먼 외해의 무인암석 퉁다오(童島)에서 동북방 247㎞ 떨어져 있는 한국 과학기지 이어도는 중국 측으로 넘어간다.

그 동안 양국의 팽팽한 주장으로 교착상태에 빠졌던 서해의 EEZ 협상은 박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 정부에 들어와 속도를 내면서 작년 12월 서울에서 1차 차관급 회담이 열렸다. 2차 회담은 올 하반기에 중국에서 열릴 예정이다. 

정정당당한 외교 펼쳐야 

넷째, 중국은 2013년 11월 동중국해의 방공식별구역(CADIZ)을 일방적으로 선포해 말썽을 일으키고 있다. 여기에 이어도 상공이 포함되었다. 한국 측은 이의 시정을 요구했으나 중국 측은 일축했다.

이에 한국 측은 지난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이 선포해 당시까지 지키고 있던 선보다 훨씬 남쪽까지 뻗은 비행정보구역으로 확대, 이어도를 포함하는 새로운 방공식별구역(KADIZ)를 그해 12월 선포했다. 한국의 새로운 방공식별구역을 미국은 인정했지만 중국은 외교부 대변인의 유감 표명 형식으로 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한국은 이제 약소국이 아닌 중견국(중강국)이다. 중견국 다운 정정당당한 외교가 우선은 마찰을 빚어 불편하더라도 길게 보면 국가이익에 부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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