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들 ‘한강의 기적’에 큰 주춧돌 놓다
재일동포들 ‘한강의 기적’에 큰 주춧돌 놓다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6.10.11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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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단출범 70주년 재일교포 사회를 가다] 재일교포와 한국 근대화

IMF 외환위기 당시 재일동포들이 국내 송금한 외화는 약 15억 달러. 범국민 금 모으기 운동으로 모은 달러가 19억 9000만 달러 

도쿄=“내 나라 구하려고 피를 뿌리신 젊은이들/ 역사의 책장 위에 꽃수를 놓으셨네/ 조국의 포근한 흙 속에 웃으며 잠드소서!”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제16묘역에 서 있는 재일동포 학도의용군 위령비에 새겨진 추모글이다. 이 묘역에는 6·25 남침전쟁이 개시되자 일본에 거주하던 재일동포 청년들이 조국을 구하겠다고 달려왔다가 전투 중 전사(戰死)한 52명이 모셔져 있다.  

재일동포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한 숫자는 총 642명. 이들은 대부분 일본에서 대학이나 고등학교에 다니던 엘리트 청년들이었다. 당시 참전자들은 “자칫하면 다시 나라가 없어질 판인데 일본 땅에서 나라 없는 국민으로 살아가는 서러움과 고통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면서 자원한 것이다. 하정남 민단 사무총장은 “재일동포들의 6·25 전쟁 참전은 중동전쟁에 참전한 해외 이스라엘인보다 17년 앞서 조국을 구하기 위해 해외에서 참전한 귀한 사례”라고 설명한다.

▲ 1950년 9월 6·25전쟁 참전을 앞둔 재일학도의용군의 출정식 장면.(일본 가나가와현 자원병)

북송저지대의 일원이 되어 싸운 재일동포 참전용사들

일본 각지에서 모여든 1000여 명의 청년들 중 제1진 69명은 1950년 9월 13일, 요코하마 항에서 미군과 함께 수송선 피닉스호에 승선하여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다. ‘일본에서 온 병사(S.V. From JAPAN)’란 견장을 달고 미 제7사단 17·31연대, 제3사단 7·15연대, 제8군 6·45·60보급부대, 제92화기중대, 제92 화기중대, 한국군 전투부대에 소속되어 최전방에서 전투를 벌였다. 하정남 사무총장의 설명이다.

“당시 재일동포 학도의용군의 활약상에 대해 미국 CBS방송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유령부대’라는 타이틀로 전 세계에 보도했습니다. 재일학도의용군들은 인천상륙작전, 서울수복작전, 원산상륙작전, 북진 작전과 1·4 후퇴 과정에서 52명이 전사하고 83명이 행방불명되는 등 총 135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할 정도로 격전을 치렀죠.” 

박상홍(朴相泓) 민단 사무부총장 겸 총무국장의 설명에 의하면 전쟁에서 생존한 265명은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나머지 242명은 1952년 4월 발효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국권을 회복한 일본 정부가 재일동포 학도의용군을 ‘일본에서 허가받지 않고 임의 출국한 자들’로 규정하여 입국을 불허하는 바람에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모국에 남았다고 한다. 

▲ 박상홍(朴相泓) 민단중 앙본부사무부총장

“가족들이 있는 일본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한국에 남았던 분들 중 조승배 씨를 비롯한 41명은 1959년 9월 초 재일교포들의 북송을 저지하기 위한 북송저지대의 일원이 되어 2개월가량 훈련을 받고 11월, 일본으로 밀항했습니다. 대원들은 부산, 마산, 통영 등지에서 어선으로 위장한 배에 분승하여 고베(神戶), 구레(吳) 등지로 침투했는데요. 이 와중에 제6차 대원 12명을 태운 명성호가 후쿠오카현 고쿠라(小倉)로 향하던 중 실종되었고, 일본에 상륙한 54명의 대원도 전원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받는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작전 도중 실종 순직한 12명을 비롯한 북송저지대원들의 존재는 까맣게 잊혀졌다가 그로부터 50년 후인 2009년 5월에 서울 국립현충원 위령비에 12명의 이름이 새겨졌고, 관련법이 뒤늦게 통과되면서 명예회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민단이 제공한 <민단은 대한민국과 하나이다>라는 자료집(이민호 지음)에는 이런 대목이 새겨져 있다.

‘주일대한민국 영사관, 재일동포가 10개 주일공관 가운데 9개소를 기증 설립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6·25 동란 때 재일 청년학생 642명이 조국을 구하려고 펜 대신 총을 들고 참전한 사실을 아십니까? 구로공단, 대한민국 최초의 수출공업단지가 재일동포 주도로 세워졌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제주도, 재일동포가 빈곤의 섬 제주를 관광 1번지이자 감귤 주산지로 변모시켰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신한은행이 재일동포가 100% 출자하여 설립한 한국 최초의 순수 민간은행이란 사실을 아십니까? 88서울올림픽 경기장들이 재일동포 성금 100억 엔으로 세워졌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IMF 외환위기 때 재일동포들이 15억 달러를 송금하고, 300억 엔의 국채를 샀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일본에서 만난 민단 관계자들은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래 재일동포들이 모국의 산업화와 근대화 과정에서 기여했던 자신들의 역할이 제대로 기억되지 못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 못내 서운해 했다. 

재일동포들의 조국 돕기는 건국 직전인 1948년 6월부터 시작된다. 그해 6월, 아직 정식으로 건국되기도 전에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런던올림픽 출전이 결정되었다. 문제는 한국대표단의 여비와 장비 및 유니폼 구입 비용이었다. 가뜩이나 어려운 국가재정 형편 상 출전비를 국가가 부담할 수 없었던 것. 박상홍 사무부총장의 설명이다.

“당시 한국대표단이 의지할 곳은 재일동포들뿐이었습니다. 1948년 6월 21일 서울역을 출발한 한국대표단 67명은 기차 편으로 부산으로 이동한 다음, 배로 갈아타고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동포들이 한 푼, 두 푼 어렵게 모은 성금 64만 9500엔과 동포 여성들이 바느질로 새긴 태극기가 달린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기증 받았죠.” 

패전 직후의 일본은 경제와 산업이 붕괴되어 지극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동포들의 삶은 일본인들보다 더 비참했다. 당시 일본의 중견 근로자 월급이 1000엔 미만이던 시절이었는데, 먹고 살기가 지극히 어려운 동포를 상대로 도쿄 시내에서 한국대표단을 위해 모금한 금액이 하루 2000~3000엔에 불과했다고 한다. 재일동포들은 자기는 굶으면서 태극기를 달고 올림픽에 출전하는 조국의 선수단을 돕기 위해 피 같은 돈을 기증한 것이다. 

일본 내 한국 외교공관 9개 재일동포들이 지어 

민단 관계자들이 자랑하는 일화 중의 하나가 일본 내 설치된 대한민국 외교공관 건립에 재일동포들이 기여한 부분이다. 도쿄의 주일 한국대사관을 비롯한 일본 내 8개의 영사관은 민단을 주축으로 한 공관 건설 모금운동과 동포 개인의 기증으로 세워진 것이다. 재일동포들의 기증한 9개 공관의 시세는 2조 원을 상회할 정도의 막대한 재산 가치를 갖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하정남 사무총장의 설명이다.

“도쿄의 미나토구(港區) 미나미아자부(南麻布) 1번지에 위치한 주일 한국대사관 대지의 원 소유주는 일본의 방적왕으로 손꼽히던 재일동포 사업가 서갑호 사장이었습니다. 이 저택은 일본의 총리를 역임했던 마츠가타 마사요시(松方正義), 요나이 미츠마사(米內光政) 등이 별장으로 사용했던 유서 깊은 건물이었어요. 서갑호 사장은 1962년 8월 15일 자신의 소유였던 이곳 3091평의 부지와 건물을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국유재산으로 써 달라’며 기증했습니다.” 

재일동포들의 고국 사랑은 88서울올림픽 때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재일동포들은 “조국의 축제에 동참하고 싶다”는 뜻에서 성금 100억 엔(당시 한화로 541억 원)을 모금하여 정부에 기탁했다. 정부는 이 성금으로 올림픽 체조경기장, 수영경기장, 테니스경기장, 88올림픽회관, 미사리의 조정경기장 등을 건설했다. 

“힘을 합쳐 모국의 경제위기 극복하자” 

재일동포들이 모아 기증한 올림픽 성금은 541억 원, 일본을 제외한 해외 전 지역에서 모금된 올림픽 성금은 6억 원. 재일동포들의 성금은 대한민국 건국 이래 자발적인 캠페인을 통해 정부에 기탁한 단일 성금 규모 중 최대 규모였다. 하정남 사무총장의 설명이다.

“올림픽을 위해 민단 산하단체인 재일대한부인회는 1981년 11월부터 올림픽 개막 직전까지 7년 간 ‘1일 10엔 모으기’ 운동을 벌여 16억 4000만 엔을 모금했어요. 이때 모은 성금으로 한국의 14곳의 명승지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을 온수가 나오고 냉난방 시설까지 갖춘 수세식 화장실로 개조해줬습니다.” 

1997년 12월 27일,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긴급 구제금융을 받은 날, 중앙일보는 “재일교포, 우리도 엔화 모국에”라는 제하의 기사를 보도했다. 당시 신용상(辛容祥) 민단 중앙단장은 재일동포들에게 “힘을 합쳐 모국의 경제위기를 타개하자”는 긴급 성명서를 발표했다. 신용상 전 단장의 설명이다.

▲ 1994년부터 2000년까지 민단 단장을 역임한 신용상(辛容祥) 씨

“제가 성명서를 발표한 다음날부터 ‘재일동포 한 가정 10만 엔 이상 본국 송금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그 결과 1999년 1월 말까지 재일동포들이 한국으로 송금한 총액은 달러로 환산하면 약 15억 달러에 달했어요. 이와는 별개로 한국 정부는 1998년 3월 일본에서 300억 엔 규모의 엔화 국채를 발행했는데, 매입자 중 다수가 재일동포였습니다.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은 일본에 갖고 있던 개인자산 1000만 달러를 한국에 송금했고(1998년 1월 17일), 일본 금융기관에서 대출한 5억 달러를 내로 들여와 큰 도움을 줬습니다.” 

재일민단의 캠페인과 신격호 회장의 투자분을 합치면 이들이 국내 송금한 외화는 약 15억 달러. 범국민 금 모으기 운동으로 모은 금을 수출한 대금이 19억 9000만 달러로 집계되었다. 우리는 재일동포들의 송금이 외환위기 극복에 결정적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고, 그들에게 고마운 인사조차 전하지 않았다.

재일교포들은 자신들이 ‘한강의 기적’을 일구는 초석이 되었다는 점에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5·16 이후 경제개발 추진 과정에서 한 푼의 달러가 귀하던 1963년 1월 31일, 사카모도(阪本)방적의 서갑호 사장이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자금인 미화 100만 달러를 태창방직 인수자금 용도로 단번에 입금하여 큰 충격을 줬다. 당시의 송금은 최초의 대규모 재일동포 재산반입이자 외국 거대자본의 대한(對韓) 투자였다.

동아일보 1964년 1월 17일자에 의하면 정부가 허가해준 재일동포 재산반입액은 1963년 1년 동안 총 2560만 달러였다. 당시 투자 인허가 수속을 밟지 않고 반입되는 재일동포의 재산이 신고금액의 최소 3배 이상이었다고 하는데, 이로 추정할 때 재일동포 재산 반입액은 1억 달러에 달한다. 이는 1962년 한국의 연간 수출 총액 5400만 달러의 2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강창만 통일일보 사장의 설명. 

“재일동포들의 모국 투자가 본격화된 것은 구로동 수출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부터입니다. 당시 혁명정부에 수출산업단지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이를 성공시킨 사람이 일본에서 사업에 성공하여 한국에 진출한 재일동포 1세인 이원만 코오롱그룹 창업자란 사실을 한국에서는 잘 모르고 있어요.” 

28세 되던 1932년 일본으로 건너간 이원만은 신문팔이, 알루미늄 조제회사를 거쳐 종이 모자를 만드는 아사히공예피복이란 회사를 설립했다. 전쟁 말기에 그는 피복 공장을 경영하여 큰 재산을 모았다. 

재일동포 기업가 이원만 씨의 활약

그는 일본의 사업을 동생(이원천)에게 맡기고 귀국, 1953년 일본의 나일론 원사를 수입하여 국내에 최초로 나일론을 소개함으로써 의생활 혁명을 일으켰다. 후에 그는 국내 최초로 나일론을 생산하는 한국나이롱주식회사를 설립했는데, 이것이 후에 코오롱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1963년 1월 8일 한국경제인협회 소속 기업인들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간담회에서 이원만 사장은 한 시간에 걸쳐 수출산업 육성을 역설했다. 그는 일본에서 가져온 고무 뱀, 포크와 나이프 등을 박정희 앞에 꺼내보였다. 고무 뱀의 꼬리를 잡고 흔들자 뱀 장난감은 살아 있는 뱀처럼 고개를 쳐들고 꿈틀거렸다. 이원만의 <재계회고> 자서전에 의하면 당시 이원만 씨는 박 의장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일본은 포크와 나이프를 수출해 연간 3억 달러 이상을 벌고 있습니다. 별 기술이 드는 것도 아닙니다. 스테인리스를 형에 맞춰 찍어내고 잘 닦아 광택을 내면 제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근로자들의 손재주는 일본에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임금은 일본의 5분의 1도 안 됩니다. 더구나 도시와 농촌 할 것 없이 엄청난 실업자가 있으니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이원만은 가발, 안경, 수세식 변기, 넥타이, 가죽 허리띠, 양복, 양말, 구두, 시계 줄, 양복 단추 등을 만들어 수출하자고 제안했다. 이날 간담회 다음날 박정희는 이원만을 비롯한 경제인협회 회원들을 초청하여 또 다시 대화를 나눴다. 당시 정황을 이원만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 “어제 이 선생 말씀을 듣고 아주 기분이 좋았습니다. 공업이 된다고 하니 힘이 절로 납니다. 공업을 하는 데 무엇부터 시작하면 좋겠습니까?”

이원만: “우선 공업단지를 만들어야 합니다. 서울 변두리에 100만 평가량의 헐한 땅을 사겠습니다. 일이 끝나면 다 국가에 기부하겠습니다.” 

박정희: “100만 평은 나라에서 확보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합니까?”

이원만: “재일동포 가운데도 돈이 많고 외국 시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장이고 기술자이기도 합니다. 순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을 이 100만 평 땅에 유치하여 공장을 세우게 합니다. 그 사람들이 돈과 기술과 외국 시장을 가지고 여기에 들어옵니다. 공업단지가 되면 재일동포뿐 아니라 외국인의 공장을 불러 보세가공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날 박정희 의장은 이원만의 제안을 채택하여 공업단지 명칭을 한국수출공업단지라고 정했다. 박 의장은 구로동에 육군이 쓰다 남은 땅 100만 평을 확보하라고 국가재건최고회의에 명령했다. 

1963년 7월 29일 한국경제인협회는 재일교포들의 자산과 선진기술을 도입하여 서울 근교에 수출산업단지를 조성하기 위해 ‘수출산업공단 설립계획서 및 건의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정부는 이 건의에 의해 장관급을 위원장으로 하는 수출산업공업단지 육성위원회를 설치하고 수출산업공단법을 제정했다. 그 결과 수출공단 제1호로 지정된 곳이 서울 구로동이다. 

1963년 10월 12일에 한국산업수출공단이 발족되어 이원만이 창립위원장에 취임했다. 이원만과 이정림은 그 길로 일본으로 달려가 전국을 돌며 다음과 같이 동포 실업가들을 설득했다. 

“우리 조국에 수출공업단지를 만듭니다. 구로동에 땅을 마련했습니다. 우리가 일본에 와서 성공했으면 이제 금의환향을 해야 합니다. 사정에 따라 환향은 못한다 해도 조국에다 공장을 세워 조국 재건에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조국에는 일손이 많고 임금도 헐하니 사업을 하면 성공해요. 일인들은 우리를 차별하니 일본이 번영할수록 우리는 일본에서 사업하기가 어렵습니다. 또 이 땅에서 늙어 죽으면 뭣 합니까. 자기 나라에 가서 자기 나라 일을 해야지 여기서 무슨 소용 있습니까.”

구로공단 일군 재일교포 기업들

두 사람의 노력 끝에 재일교포 기업가들의 고국에 대한 투자가 이어졌다. 그 결과 생산제품 전량을 해외로 수출하는 구로공단 최초 입주기업 28개 사 중 18개 사가 재일동포 기업이었다. 그것도 한국에서는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던 전기, 전자, 화학, 비료, 섬유, 금속 등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신기술을 보유한 기업들이었다. 1967년4월 1일,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은 축사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재일교포들이 이곳에 조국의 산업 건설에 이바지하겠다며 모든 악조건을 무릅쓰고 공장을 세웠습니다. 정부는 재일교포들의 새로운 공업기술 도입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1966년 7월 30일, 14개의 재일동포 기업이 구로공단에 동시 입주했다. 구로 수출단지는 한 시절 대한민국 수출총액의 15%를 점유했다. 재일동포들은 구로공단 참여를 시작으로 구미공업단지, 마산수출자유지역, 반월공단 등에 진출했다.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뤄진 1965년부터 1970년까지 본국에 투자한 재일동포 기업은 적어도 200개 사 이상이었다. 말하자면 재일동포들이 ‘한강의 기적’에 큰 주춧돌을 놓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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