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에서 시작된 '한독(韓獨) 경제협력'
이승만에서 시작된 '한독(韓獨) 경제협력'
  • 이성은 미래한국 객원기자
  • 승인 2017.01.06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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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시대 맹아가 박정희 시대 중화학공업화 경제성과 만들었다

우리나라 대다수 국민들이 기억하는 한독(韓獨)간 경제협력의 시발점은 한국노동청과 독일탄광협회 간의 협정을 통해, 1963년 12월 21일 파독 광부 247명이 처음으로 서독행 비행기에 올랐던 순간일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파독 광부 파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3년 후인 1966년부터는 간호사 파견도 이뤄졌다. 당시 1963년부터 1978년까지 광부와 간호사의 신분으로 이역만리 서독으로 향한 선남선녀들은 총 1만8993명이다.

▲ 1957년 7월 14일 경무대 관저에서 주서독, 이태리 공사 취임 선서식 및 대통령 임명장 수여식이 진행되었다. 전 국무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이 손원일 주서독 공사와 김영기 이태리 공사에게 대통령 임명장을 수여했다. / 대한뉴스 제122호 영상 참조

국가 경제난 타개와 가족 부양의 사명감에 고된 노동을 견뎌냈다는 이들의 이야기는, 애국애족 정신이 사라져가는 현 시대에 애잔한 감동을 주는 눈물겨운 산업화 역사로 회자되고 있다.


한독 관계의 초석을 세운 이승만 대통령

사실 한국과 독일의 경제적 협력 관계는 박정희 대통령 집권 시기에 이르러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한국과 독일의 긴밀한 협력이 시작된 것은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대한민국의 건국 이후 국가의 자립 및 경제부흥을 위해 중화학공업화 추진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노력으로부터 출발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이 끝나갈 무렵부터 철강 산업 육성을 추진했다. 그리고 1953년 인천에 국영기업의 형태로 대한중공업공사(지금의 현대제철)를 설립했다.

▲ 창립 초기 대한중공업공사의 모습.

문제는 무너진 철강 공장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재건을 위해서는 막대한 돈이 필요했으나 전쟁 직후 한국은 국가 전체가 폐허더미나 다름없었기에 경제 기반을 미국 원조에 전적으로 의존하다시피 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미국 경제고문관이 가지고 있는 경제 지원권이 실로 막강했는데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철강사업안에 대해 먹고사는 문제 해결이 우선이라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미국의 반대에 부딪히자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결단으로 바닥난 국고를 긁어모아 철강공장 건설에 140만 달러를 투자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철강공장 건설의 기술 지원을 받기 위해 비협조적인 미국이 아닌 제3국과의 접촉을 시도하게 된다.


이승만과 아이젠버그의 만남

이 때 이승만 대통령이 눈을 돌린 곳은 바로 서독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부산에서 전쟁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있던 후버 박사(당시 서독 적십자병원장)에게 철강공장 건설에 대한 계획을 밝히며 서독의 기술 지원을 요청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부탁을 받은 후버 박사는 한국의 철강공장 건설 계획을 서독 정부에 알렸다. 때마침 서독은 마셜 플랜(Marshall Plan)에 의한 전후 복구가 한창이었던 상황인지라, 해외 공사 수주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서독 정부는 도쿄를 거점으로 다양한 국가에 광범위한 물자 공급을 하는 유태인 무역상 아이젠버그를 보내 한국 정부와의 교섭을 종용했다.

아이젠버그는 이중국적자로서 오스트리아 국적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의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막역한 사이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아이젠버그는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많은 시간을 조우하며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을 위한 다방면의 협력방안을 구상했다.

아이젠버그의 활약으로 1954년에 시작된 대한중공업공사의 제강공사는 입찰을 거쳐 서독 굴지의 건설장비 제조사인 데마그(Demag)사가 수주하게 되었고, 1956년에 진행한 압연공장 건설사업 역시 데마그사가 맡았다.

먼저 시작한 제강공사는 1956년 완공되었고 1959년에는 압연공장 건설도 완료되었다. 이때부터 우리나라는 자체적인 제철 생산이 가능해졌다.

이 과정에서 서독의 많은 기술자들이 한국에 들어와 철강 기술을 전수하게 되었고 동시에 우리나라의 기술자들과 유학생들이 서독으로 유학을 가게 되는 계기도 마련되었다.
 

이승만의 철강 유학생들, 훗날 포항제철 건설의 주역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본인이 미국 유학을 통해 학문적 지평을 넓힐 수 있었기 때문에 가난한 국가 살림에도 불구하고 엘리트들의 국비 유학을 적극 지원했다.

또한 선발된 유학생들을 경무대로 불러 직접 장학증서를 수여하고 격려할 정도로 애정이 남달랐다. 대한중공업공사의 제강공사와 압연공장 건설 시기에 서독으로 유학을 가게 된 철강 유학생들도 이승만 대통령이 애착을 가지고 지원했다.

이들은 유학을 통해 철강 기술 및 공학적 지식을 배웠고 유학 이후 국내에 돌아와서는 대한중공업공사를 운영하는 주체들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 시대에 포항제철(현 포스코)을 만드는 공신들이 되기도 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박정희 정부에서 중공업 담당 차관보를 역임했던 김재관 박사다. 김 박사는 1956년 서독 정부 국비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뮌헨대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독일 현지의 데마그사에서 여러 해 동안 근무했다.

그러던 중 김 박사는 1964년 파독 광부·간호사들을 위로하고 독일의 산업 시설을 둘러보기 위해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한국에도 종합제철소 건설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철강 공업의 발전 추진 계획을 제안하는 마스터플랜을 제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 박사가 제출한 보고서에 대단히 고마워했고 실제로 많은 영감을 받았다. 그리고 김 박사는 한국에 들어온 이후 박 대통령이 경제기획원 내에 ‘종합제철 사업계획 연구위원회’를 설치하면서 포항제철소 종합건설계획안 설계를 맡게 된다. 사실상 포항제철의 태동에 지대한 기여를 한 셈이다.
 

아이젠버그, 박정희 정부의 차관 도입 주역으로

한편 아이젠버그는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장면 정부의 혼란기를 넘어 1961년 박정희 시대가 개막하면서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 발전을 위한 기반 시설 구축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인지하고 있었지만, 국가에는 이를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돈도 없었고 가난한 나라에 선뜻 돈을 빌려주려는 곳도 없었다.

이 와중에 아이젠버그는 1961년 가을 무렵 서독과 한국의 차관 도입을 중개했다. 물론 그가 주선하는 차관은 이자율이 높은 편이었지만 미국의 원조가 점차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차관 도입 자체가 절실했던 우리로서는 대단히 고마운 일이었다.

결국 이듬해인 1962년 한국 정부는 서독 정부의 장기차관과 민간투자를 포함해 3750만 달러 규모의 돈을 제공받게 되었고 이는 박정희 정부 최초의 공공차관 도입으로 기록되었다.  당시 도입한 차관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상당한 재원으로 역할을 했다.

아이젠버그는 이후에도 영월화력 2호기, 부산화력 3·4호기, 영남화력 1·2호기, 월성 원전 3호기, 쌍용·고려·동양·한일 시멘트, 포항제철 증설 등 공공시설이나 산업 기간시설을 건설하는 대규모 사업을 추진할 때마다 외자 도입을 여러 차례 주선해 성사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승만이 세운 교두보, 박정희 시대에 나비효과로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한 중화학공업화와 산업 기간시설 건설계획은 대한민국이 단숨에 수출 경쟁력을 확보하고, 국가 경제를 단기간에 월등히 성장시키는 절대적 원동력이 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기반 시설 마련을 위한 재원이 필요했고, 박 대통령은 한일청구권협정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종자돈을 마련하고 충원하고자 했다. 그 중에서 서독은 광부·간호사 파견 협정을 포함해 선진 산업기술 전수, 상당한 규모의 차관을 통해 막대한 도움을 줬다.

그 배경에는 이데올로기 분열로 인한 분단국가의 현실과 전후 사회라는 양국 간의 동질감도 있었고 비스마르크를 존경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독일 사회에 대한 관심과 경제 발전을 향한 불굴의 의지도 작용했다.

하지만 한국의 경제 발전사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선행된 노력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0년대 여전히 총탄이 날아드는 전쟁의 와중에서부터 한국의 전후 사회 재건플랜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서독과 접촉을 시도하고, 중화학공업 추진은 물론 산업의 기반을 다지고자 했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대통령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중화학공업화는 포항제철 건설의 주역들을 길러내는 맹아가 되었다. 미국 원조에만 의지하던 것을 벗어나 빈곤을 타개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은 아이젠버그를 발굴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이승만의 노력들은 박정희 시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중화학공업 정책을 수립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고, 국가기간산업 건설을 통해 산업 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동력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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