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한국

신뢰 자본, 네덜란드 발전의 힘

미래한국 연속기획 / 이제는 경쟁력이다 김승욱 중앙대 교수·미래한국 편집위원l승인2017.04.17l수정2017.04.17 11:17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김승욱 중앙대 교수·미래한국 편집위원  webmaster@futurekorea.co.kr

국가 경쟁력의 원천은 무엇인가? 미국의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트러스트: 사회도덕과 번영의 창조(TRUST: The Social Virtues and the Creation of Prosperity)>에서 ‘신뢰’가 국가 경쟁력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라고 했다.

그는 신뢰를 사회적 자산이라고 하면서, 국가들을 ‘고 신뢰 사회(high-trust society)’와 ‘저 신뢰 사회(low-trust society)’로 구분했다. 고신뢰 사회란 신뢰가 혈연을 넘어서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넓게 확대되어 있는 사회를 말하고, 저신뢰 사회란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만 신뢰할 수 있는 사회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가장 믿는 사람이 바로 가족이기 때문에 신뢰가 낮은 사회도 가족끼리는 믿는다.

▲ 200년 동안 동유럽 최고 기업이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17인 주주위원회 중 과반이 유대인 이라는 사실 만을 봐도 유대인이 네덜란드 재건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200년 동안 동유럽 최고 기업이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17인 주주위원회 중 과반이 유대인 이라는 사실 만을 봐도 유대인이 네덜란드 재건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신뢰 사회는 가족이나 혈연을 넘어서 잘 알지 못하는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도 서로 믿을 수 있는 사회를 말한다. 저신뢰 사회에서는 기업이 발전하더라도 혈연의 벽을 넘지 못하기 때문에 대기업이 발전하기 힘든 반면에, 고신뢰 사회는 대기업을 만들어낼 수 있다.

후쿠야마는 저신뢰 사회의 전형적인 예로 중국을 꼽는다. 중국은 가족 내의 결속력은 매우 강하다. 그래서 입양에 대해서 거부감이 많다. 기업도 주로 가족들이 운영한다. 그리고 대부분 기업이 영세하다. 반면에 일본은 고신뢰 사회로 분류했다. 고신뢰 사회는 혈연을 넘어서 신뢰가 형성되기 때문에 대기업이 발달하기 용이하다. 일본은 대기업이 많다는 것이 고신뢰 사회의 증거가 된다. 그리고 일본은 중국과 달리 입양에 대해서 매우 열려 있는 사회다.

후쿠야마(1999)도 일본에서는 에도시대(1600-1867)에 가족주의가 약화되어, 일본의 가족은 보다 비혈연적인 요소가 높다는 것을 강조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귀족 가문에 입양된 농부의 아들이었다. 사무라이 가문의 입양률이 17세기 26.1%에서 18세기의 36.6%, 19세기에는 39.9%로 증가되었다. 저신뢰 사회는 혈연의 끈은 강하지만, 비혈연 관계에서는 자발적 열심을 유도할 수 있는 인센티브가 약하다.

저신뢰 사회 한국, 이웃을 믿지 않는 한국인

유럽에서는 독일이 고신뢰 사회이고,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저신뢰 사회로 분류됐다. 이탈리아 중부 지역은 대가족적인 전통을 지니고 있다. 독일은 고신뢰 사회이기 때문에 대기업이 발전했고, 이탈리아는 저신뢰 사회이기 때문에 가문 중심의 중소기업으로 발전했다. 공작기계, 도자기, 의류 등의 산업에서 소규모 가족기업이 번창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베네통이나 구치 등 명품 업체들도 가족경영으로 성공한 기업이다.
후쿠야마는 한국을 저신뢰 사회에서 약간 발전한 형태로 본다. 한국의 경제구조가 고신뢰 국가인 일본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부를 보면 여전히 친족이 중요한 점에서는 중국과 더 가깝다고 주장한다.

중앙집권적인 경영체제를 가지고 있고, 종업원들의 연대감이 약하다. 한국은 가까운 사람들 사이의 ‘두터운 신뢰’(thick trust)는 강한 반면에 모르는 사람 사이에 통용되는 ‘얇은 신뢰’(thin trust)는 매우 취약하다.

신뢰가 사회 발전에 꼭 필요한 사회적 자산이라는 후쿠야마의 주장은 일부 무리한 부분도 있다. 예를 들면 일본은 외부인에 대해서 매우 폐쇄적이다. 그리고 미국도 엔론 사태에서 보듯이 투명하지 않은 부분도 많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신뢰가 중요한 사회적 자산이라는 견해에 대해서는 설득력이 있다.

시장경제가 발전하는 데도 신뢰가 매우 중요하다. 장사를 할 때 상법전서를 펴놓고 장사하는 사람은 없다. 신뢰는 그중에서도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경제 행위 가운데 상당히 많은 것이 신뢰에 기초해 있다.

우리가 인터넷으로 거래를 할 때에 물건을 받기 전에 돈을 보내는 것은 상대방이 약속을 지키고 물건을 보내줄 것이라는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경제활동의 많은 부분이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일어난다. 택시 운전사가 승객이 목적지에 도착해서 돈을 내지 않고 달아날지도 모른다고 염려한다면, 아마 선불을 받아야 데려다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거래 시 상호 간에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시장참여자들의 신뢰는 시장경제의 원활한 작동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상대방의 계약 파기나 사기 가능성을 염려할 필요 없이 거래를 진행하게 한다. 신뢰는 투자를 자극하고, 저축률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상호 신뢰를 제공하는 것이 도덕성이다.

시장경제제도를 도입하는 많은 제3세계 국가에서 시장경제가 적절하게 작동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 보이지 않는 비공식적 제도가 제대로 갖춰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후쿠야마의 견해는 실증분석을 통해서도 지지를 받고 있다. 세계은행 수석연구원 스티븐 낵과 필립 키퍼는 1980~1992년 경제성장률과 신뢰와의 관계를 추정했는데, 신뢰 지수가 10% 증가하면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0.8% 증가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한국은 OECD가 평가한 사회네트워크 수준에서도 회원국 중의 최하위로 나타났다. ‘필요할 때 의지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긍정적 응답이 77.5%에 불과해 OECD 35개국 중 34위였다. 사회적 신뢰도의 경우 26.6으로 23위였다. 이는 OECD 평균 36점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특히 사법시스템에 대한 신뢰는 27%로 OECD 34개국 중에 33위를 차지했다.

최근에 대한상공회의소는 ‘우리나라의 사회적 자본 추적 실태와 대응 과제 연구’에서 신뢰와 규범, 네트워크 등 사회적 자본이 다른 OECD 회원국과 비교할 때 상당히 낮은 수준이라고 발표했다.

신뢰자본이 확충되면 규제를 감소시켜도 되고, 규제가 적으면 기업가 정신이 높아지므로, 투자가 증가하고 경제가 성장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신뢰자본을 북유럽 국가 정도의 수준으로 높이면 4%대 경제성장이 가능하다고 분석했다.

‘신뢰’를 자본으로 삼아 성공했던 네덜란드

최근의 분석도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도 북유럽의 네덜란드가 신뢰를 통해서 어떻게 발전할 수 있었는지 살펴보자. 잘 아는 바와 같이 네덜란드의 상징은 풍차와 나무신발 클룸펜 그리고 둑으로 유명하다.

네덜란드라는 국가 명칭은 ‘낮은 땅’이라는 뜻으로, 전 국토의 4분의 1이 해수면보다 낮아 암스테르담, 로테르담 등 주요 도시 이름이 ‘댐’(dam)으로 끝난다. 비가 오고 나면 빗물이 빠져나가지 못해 사람들은 나무 신발 클룸펜을 신었다. 또 물이 바다로 빠져나가지 않아서 바람의 힘을 이용해 풍차로 물을 퍼내야 했다. 농경시대에 농사 짓기 어려우니 유럽에서 가장 불리한 지리적 조건을 가진 셈이다.

▲ 1596년 네덜란드의 빌렘 바렌츠(Willem Barentsz)선장은 북동항로 개척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바렌츠호 선원들은 자신의 목숨보다 고객의 화물을 더 귀중히 여긴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 소문으로 네덜란드 배의 수요가 폭증했다./2011년 네덜란드 영화감독 레이노앗 오얼레만스(Reinout Oerlemans)가 만든 영화 는 실제 바렌스호 이야기를 담았다.

▲ 1596년 네덜란드의 빌렘 바렌츠(Willem Barentsz)선장은 북동항로 개척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바렌츠호 선원들은 자신의 목숨보다 고객의 화물을 더 귀중히 여긴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 소문으로 네덜란드 배의 수요가 폭증했다./2011년 네덜란드 영화감독 레이노앗 오얼레만스(Reinout Oerlemans)가 만든 영화 는 실제 바렌스호 이야기를 담았다.

그런데 네덜란드는 오랫동안 물과의 전쟁으로 인해서 터득한 각종 지혜로 기업가 정신이 가장 왕성한 나라이다. 우리나라가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듯이, 네덜란드도 독일, 프랑스 등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었고, 스페인의 식민지로서 오랫동안 고난의 역사를 겪었다.

홀란트 백작의 영지인 북부 지방의 이름을 따서 ‘홀란드’라고 부르기도 하는 네덜란드는 14세기에는 프랑스 부르고뉴 공작의 지배 하에 있었고, 15세기에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았고, 16세기에는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

네덜란드 북부의 7개 주가 칼뱅의 종교개혁을 받아들여 개신교가 다수를 차지하자 가톨릭 신자인 스페인의 필립페 2세는 가톨릭을 강요하면서 무거운 세금을 강요했다.
이에 1568년부터 독립전쟁이 시작되어 마침내 1581년에 독립을 선언했다. 결국 1648년까지 80년간 스페인과 전쟁을 벌여서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쟁취했다.

그리고 이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은 17세기에 패권국가가 된다. 임마누엘 월러스틴 예일대 교수는 패권국가를 자신의 이익에 따라 세계 질서를 주도할 수 있는 힘을 지니는 국가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세계 역사상 3대 패권국가를 꼽으라면 20세기의 미국, 19세기의 영국, 그리고 세 번째를 16세기의 스페인이 아니라 17세기의 네덜란드를 꼽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떻게 이렇게 17세기 중반까지 식민지였던 작은 나라가 식민지에서 패권국가로 부상할 수 있었을까? 그 중에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신뢰를 기초로 지중해에서 발전된 효율적인 제도를 계승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로 시작된 신뢰자본

네덜란드가 이렇게 발전하는 데는 유대인의 역할이 컸다. 대항해시대가 열리기 직전인 14~15세기경에 유대인이 가장 많이 살았던 나라는 스페인이었다. 당시 스페인의 인구 약 700만 명 중에 약 7퍼센트에 해당되는 50만 명이 유대인이었다.

특히 유대인들은 주로 금융업과 상업에 종사하면서 도시지역에 거주했기 때문에 유대인 공동체가 있는 도시가 44개나 되었다. 그리고 주요 도시는 인구의 약 3분의 1이 유대인일 정도로 유대인의 비중이 높았다.

그런데 유대인과 기독교인 사이에 갈등이 잦았다. 1348년에 스페인의 아라곤 왕국에서 유대인에 대한 폭동이 일어나 대대적 학살이 있었다. 이런 일은 주기적으로 반복되었다. 그러자 가톨릭교도인 이사벨 여왕(1474~1504)은 1480년에 톨로노 칙령을 내려 유대인들에게 개종하든지 아니면 해외로 이주할 것을 명령했다. 또 국가 종교재판소를 세웠는데 1480~1530년 사이에 약 2000건의 처형이 이 국가 종교재판소를 통해 이뤄졌다. 약 3세기 동안 유대인 희생자는 약 34만 명에 달했다.

그중 3만 2000명이 화형을 당했다. 명분은 종교 문제였지만 속셈은 유대인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1492년에도 알함브라 칙령에 의해 또 대대적인 유대인 추방이 있었다. 이때 17만 명이 한꺼번에 추방되었는데, 1480년에 종교재판을 피해 나간 사람까지 합하면 26만 명에 달한다. 당시 3만 명을 넘는 도시가 별로 없었는데, 이는 대단한 숫자였다.

유대인들이 한꺼번에 나가자 스페인은 경제력에 큰 타격을 입었다. 가게 세가 반으로 폭락했고, 전성기에 300개의 작업장이 있던 바로셀로나의 면직물 산업이 15세기 중엽에는 10개밖에 안 남을 정도로 축소되었고, 은행들이 대거 파산했다.

스페인이 급속하게 몰락하고 17세기에 패권을 네덜란드에 빼앗기는 이유에는 잦은 전쟁 탓도 있었지만 유대인들을 추방시켜서 경제가 급속하게 위축된 원인도 있었다. 향신료 무역을 담당하던 유대인의 유통망은 붕괴되었다.

이때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간곳이 네덜란드의 브뤼헤와 벨기에의 안트베르펜과 안트워프였다. 그들은 금과 은을 가져갈 수 없었기 때문에 보석을 많이 가지고 갔는데, 그들이 정착한 곳이 곧 보석시장을 이뤘다.

안트베르펜의 경우 유대인의 유입으로 인구가 급증해 이 도시의 인구 절반이 유대인이 되었으며, 국제적 항구가 되었고, 유럽 5대 도시의 하나가 되었다. 1585년에 스페인이 안트베르펜을 탈환하자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 암스테르담 상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200년 동안 유럽 최고의 기업이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17인주주위원회 중 과반이 유대인이라는 사실만을 봐도 유대인이 네덜란드 재건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네덜란드의 금융업을 발전시켜 자본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은행은 11세기에 베네치아에서 처음 시작되었지만, 금융업은 1609년에 탄생한 암스테르담 은행이 개척자였다. 당시 유럽에는 주화의 종류가 1000개가 넘었기 때문에 표준통화가 필요했는데, 암스테르담 은행이 처음으로 화폐를 만들어 세계 최초의 기축통화를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환전으로 인한 거래비용을 없앴다.

암스테르담 은행은 후에 영란은행과 미국 연방은행제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17세기에 네덜란드가 상업과 무역의 패권을 장악한 또 다른 이유는 세계 최초로 지폐를 대량 유통시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축통화를 발행한 암스테르담 은행도 유대인이 주도하는 민간은행이었다.

유대인들은 회당을 통해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고 있고, 전 세계 유대인들의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었다. 지중해 상권의 중심국인 베네치아에도 유태인들이 많았다. 지중해 상인들이 만들었던 효율적인 시장경제 제도들은 바로 유대인들을 통해서 북해상권의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고 떠돌면서, 장사를 하기 위해서는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상업적 거래가 신뢰사회 만들어

네덜란드 선원들이 신뢰(신용)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화 하나. 바렌츠 선장은 1596년에 북극해의 노바야잼로 섬을 경유해서 극동지방으로 오는 북동 항로를 개척하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이 항로는 2009년 7월 23일에야 처음으로 성공했다.

이들은 빙하에 갇혀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의 추위 속에서 8개월을 버텼는데, 그러는 동안 추위와 굶주림으로 18명의 선원 가운데 8명이 죽었다. 하지만 바렌츠 선장은 고객들의 화물은 건드리지 못하게 했고, 부하 선원들은 선장의 명령을 따랐다. 겨울이 지나가고 빙하가 조금씩 움직이면서 틈이 벌어졌다.

1597년 6월 13일, 작은 배 두 척에 나눠 타고 빙하를 빠져나와 50일 뒤 러시아 상선에 구조되었다. 바렌츠 선장은 귀항길에 사망했고, 그 해역은 오늘날 그의 이름을 따라 바렌츠해라 불린다. 이들은 귀국 후에 고객들에게 위탁받은 화물을 손상 없이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줬다. 선원들은 혹한과 기아와 싸우며 죽어 가면서도 고객의 화물에 손을 대지 않았던 것이다.

바렌츠호 선원들은 자신의 목숨보다 고객의 화물을 더 귀하게 여긴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네덜란드 선원들에게 자부심을 불어넣었다. 이 소문으로 네덜란드 배의 수요가 폭증했다. 또한 네덜란드인들은 위는 좁지만 밑은 뚱뚱해, 화물을 옮기는 데 유리한 플루트 선을 개발해 운임을 낮췄다.

조선술이 발달하면서 배를 만드는 데 드는 제작비를 절반으로 떨어뜨리게 된다. 북해지역은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침엽수림이 많기 때문에 목재 조달이 용이하다. 풍차를 이용해서 나무를 자르는 등의 방법으로 비용을 절감시켜서 17세기 전반에 전 유럽 대형 범선 2만 척의 80퍼센트인 1만 6000척을 네덜란드가 보유할 정도였다.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가장 많은 부가가치가 해상무역에서 생겨났다.

이처럼 네덜란드의 성공 요인은 ‘신뢰’였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신뢰를 바탕으로 정기적으로 열리는 상설시장, 거래소 등을 개설해 탐색 비용을 줄임으로써 거래비용을 줄였다. 표준 영업 관행이 정착되고 견본품을 이용한 판매도 시작해 쌍방 간의 협상비용을 줄이게 되었다. 또한 정부가 상업분쟁의 중재역을 담당하거나 공증제도 같은 것을 발전시켜 이행비용을 줄이기도 했다.

거래소가 등장하고, 배서제도나 양도증서가 발전되면서 자본시장이 발달했다. 그리고 종신연금제도까지 만들었다. 흔히 자본주의를 신뢰와 관계없는 정글의 약육강식에 비유하곤 하는데 그건 잘못된 비유다. 네덜란드와 바렌츠 선장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자본주의는 신뢰의 기초 위에 발전된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저작권자 © 미래한국,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승욱 중앙대 교수·미래한국 편집위원의 다른기사 보기

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135-726 서울 강남구 봉은사로 129, 4층 (논현동 거평타운)   |   413-120 경기도 파주시 문발로 155(문발동)
Tel : (02)3446-4111  |  Fax : (02)3446-7182  |  사업자 번호 : 220-86-23538  |  상호 : (주)미래한국미디어  |  대표자 : 김범수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범수
Copyright © 2017 미래한국.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