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팩트와 페이크, 신화의 조합 <전태일 평전>의 실체
[특별기획] 팩트와 페이크, 신화의 조합 <전태일 평전>의 실체
  • 류석춘 연세대 교수(사회학)
  • 승인 2017.05.24 09:36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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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평전>의 함정

전태일은 1964년 봄 그의 나이 16살에 평화시장의 ‘시다’라는 일자리를 겨우 구한다. 그러나 가족의 생계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스스로조차 돌보기 어려운 악조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마침내 그는 일자리를 얻은 지 만 6년 반 만인 1970년 11월 13일 22살의 나이에 열악한 근로조건에 저항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분신자살을 선택한다. 이러한 <전태일 평전>의 내용 때문에 전태일은 당시 ‘착취’ 당하던 우리나라 노동자를 상징하는 인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 전태일 평전은 전태일에게 접근했던 대학출신 노동운동 활동가들의 존재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다’는 거짓 문구로 젊은이들의 감성을 자극할 뿐이다. / 온라인 쇼핑몰 ‘인터파크’에서 단독으로 판매되고 있는 ‘전태일 평전’ 신판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2009 신판)을 읽으면 전태일 그리고 당시 평화시장 근로자들이 겪은 삶의 조건에 독자들은 피가 거꾸로 솟지 않을 수 없다.

어린 전태일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는 너무나 버거운 데 반해 그를 도와주는 사회적 장치는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전태일로 대표되는 당시 노동자들이 엄청난 ‘착취’를 당했다는 인식을 가슴 속 깊이 심어준다.

그러나 <전태일 평전>을 찬찬히 비판적으로 분석해보면 과연 이러한 평가가 정당한가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하는 내용이 많다. 가장 중요한 문제로 지적되어야 할 내용은 책 전체에 숫자로 등장하는 돈의 가치다.

숫자는 객관적으로 보인다. 또한 모든 액수가 당시의 물가로 표시되어 46년이 지난 2016년 오늘날의 시점에서 읽으면 그 액수가 정말이지 터무니없이 작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 문제는 <전태일 평전>이 처음 우리말로 출판된 1983년을 기준으로 생각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전태일의 평화시장 경력과 임금상승: 누가 ‘착취’라고 하는가?

<평전>에 따르면 전태일은 1964년 봄 ‘삼일사’의 ‘시다’로 취직하면서 월급을 1500원 받았다 (85-87쪽). 또한 그는 1년 후 1965년 같은 회사의 ‘미싱보조’가 되면서 월급이 두 배로 뛰어 3000원이 되었다(88쪽). 그로부터 다시 1년 후인 1966년 가을 그는 회사를 ‘통일사’로 옮기며 ‘미싱사’로 승진해 월급이 7000원으로 상승한다(109 쪽).

이를 정리해 보면 전태일은 ‘시다 -> 미싱보조’ 승진 사다리를 1년 만에, 그리고 ‘미싱보조 -> 미싱사’라는 다음 단계의 승진 사다리를 다시 1년 만에 올라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러한 승진의 결과 월급이 만 2년 동안 무려 4.6배 상승했음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전태일의 경력 상승은 <평전>이 기술하고 있는 평화시장의 일반적 경력이동 패턴과 비교해도 매우 빠른 경우다. <평전>은 당시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시작해 ‘미싱보조’로 승진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1.5년에서 2년, 그리고 ‘미싱보조’에서 ‘미싱사’로 승진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3~4년이라고 말하고 있다(82-83쪽). 다시 말해 <평전>은 당시 평화시장의 승진 사다리에서 ‘시다’에서 ‘미싱사’까지 올라가는 데 최소 4.5년 최대 6년이 필요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승진의 사다리를 <평전>에 따르면 전태일은 불과 2년 만에 모두 올라갔다. 그러나 전태일은 이에 만족하지 않는다. ‘미싱사’보다는 ‘재단사’가 훨씬 더 좋은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재단사’가 되기 위한 노력을 바로 이어서 시도한다. ‘미싱사’가 되고 난 직후인 1966년 추석 대목 후 그는 회사를 ‘한미사’로 옮기며 ‘재단보조’로 취직한다(111쪽).

그는 ‘재단보조’가 ‘미싱사’보다 대우가 훨씬 나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재단보조’를 거쳐야 ‘재단사’가 될 수 있다는 더 중요한 사실도 그는 물론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태일은 그러한 선택을 주저 없이 감행할 수 있었다. ‘재단보조’가 된 그의 월급은 비록 3000원으로 줄었지만(110쪽), 그로부터 반 년 후인 1967년 2월 마침내 그는 같은 회사인 ‘한미사’에서 ‘재단사’로 승진한다(117쪽). 평화시장에 ‘시다’로 들어 온 지 딱 3년 만의 일이다. 당시 재단사의 임금은 1만5000원에서 3만 원 사이였다. 최저 1만5000원으로 보면 무리가 없다. <평전>에 나타난 전태일의 경력이동과 임금상승을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요약할 수 있다.

전태일은 16살이 되던 1964년 봄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일을 시작해 만 3년 만인 19살이 되던 1967년 봄 ‘재단사’가 되었으며, 같은 기간 그의 월급은 1500원에서 1만5000원으로 정확히 10배 올랐다. 엄청난 임금상승이 아닐 수 없다. 같은 기간 소비자물가상승률이 매년 10% 대 초반이었음을 감안해도 이러한 임금상승은 요즘 기준으로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다.

2016년 현재 16살에 비정규직으로 최저임금을 받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면 그의 월급은 96 만 원 수준이다. ‘시간당 최저임금 6000원 x 하루 8시간 x 주 5일 x 월 4주’의 계산이 보여주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 노동자가 3년이 지나 19살이 되면서 정규직이 되고 또한 임금이 열 배로 상승했다고 치면 그의 월급은 960만 원으로 수직 상승한다. 이 정도의 임금 상승이면 요즈음도 하루 8시간이 아니라 12시간, 주 5일이 아니라 7일이라도 일할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전태일이 겪었던 열악한 노동조건에도 불구하고 그의 임금 상승은 정말이지 파격적이었음에 틀림없다.

16살이라는 나이에 학교를 다닐 수 없는 가정 형편 때문에 직장을 구하러 나온 젊은이에게 당시 사회는 일자리를 줬고, 그로부터 3년 만에 월급을 열 배나 받게 해 줬다. 또한 전태일은 이로부터 다시 3년 후인 1970년 재단사가 되면서 월급을 2만3000원 받았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256쪽). 그렇다면 전태일의 월급은 1964년부터 1970년까지 6년 동안 무려 15배 이상 상승한 셈이다. 이를 두고 과연 누가 착취라는 말을 꺼낼 수 있는가?

전태일의 노동운동 투신과 모범업체 구상 그리고 분신: ‘대학생 친구’가 없었다고?

일자리에 비해 인력이 넘쳐나던 당시의 상황에서 평화시장에 취직이 되고, 엄청난 경력과 임금의 상승이동을 경험한 사실은 19살 전태일이 개천에서 용으로 비상하는 기회를 잡은 것과 다름없는 모습이다. 그러나 <평전>에 따르면 전태일의 고민은 재단사가 되고부터 오히려 깊어졌다고 한다. 전태일은 자신에게 요구되는 감당할 수 없는 노동의 강도는 물론이고 주변의 어린 여공들이 처한 열악한 노동조건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평전>은 설명한다 (117-126쪽 & 126-137쪽).

▲ 당시를 살았던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전태일과 비슷한 조건에서 출발해 온갖 어려움을 헤치고 오늘날 자수성가하여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며 자신의 역할을 다 하고 있다. 전태일의 극단적인 선택은 불가피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아름답,지도 않다. 다만 불행했을 뿐이다. / youtube 영상 캡처

전태일은 재단사가 된 지 만 2년 후인 21살 즉 1969년 6월에 동료 재단사들을 모아 ‘바보회’라는 노동운동 단체를 결성한다. 그와 동시에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면서 종업원들에게 인간다운 대우를 해주는 ‘모범적인 피복업체’를 만들어 보겠다는 구상을 펼친다. 전태일은 모범업체의 목적을 “정당한 세금을 물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도, 제품 계통에서 성공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 경제인에게 입증시키고, 사회의 여러 악조건 속에 무성의하게 방치된 어린 동심들을 하루 한시라도 빨리 구출하자는 데 그 취지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223쪽).

그러나 이는 전태일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듯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실로 어처구니없는 공상”이었다(226쪽). 왜냐하면 <평전>에서 무려 10쪽이나 차지하고 있는 이 구상의 구체적인 내용 어디에도 기업은 이윤추구를 전제로 성립한다는 기본적인 조건에 대한 이해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220-230쪽). 다시 말해 이 모범업체는 ‘기업’이라기보다는 ‘복지단체’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모범업체의 운영에 필요한 자본금 3000만 원을 구하는 방안 또한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평전>에서 조영래는 전태일이 “자기의 눈알 하나를 빼서 실명자에게 기증하여 그 사실이 신문에 보도가 되면 그 신문을 본 독지가가 그의 사람됨을 믿고 투자를 할 거라는 생각”이었다고 설명한다(232쪽).

<평전>은 또한 전태일이 실제 이런 편지를 보냈으나 반송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조영래는 모범업체 구상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전태일이 마침내 죽음이라는 마지막 선택을 ‘스스로’ 결단했다고 설명한다. 장렬한 희생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명은 <평전>이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매우 중요한 쟁점을 숨기고 있다. 당시 전태일에게는 대학생 친구 뿐만 아니라 멘토까지 있었고, 그의 죽음이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교육과 조작에 의해 진행된 것이란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사회운동가 오재식(1933-2013)은 역시 사회운동가인 사울 알린스키(1909~1972)의 가르침에 따라 한국학생사회개발단(학사단)을 결성할 것을 제안했고, 활동과정에서 알린스키의 방법론을 적용했다고 밝혔다. “이렇게 접근한 수많은 현장 가운데 하나가 1970년 전태일 분신사건이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노동운동자들의 운동을 활성화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기독학생운동이 노동운동과 손을 잡고 1970년대 ’민주화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같은 글에서 그는 알린스키가 한국과도 짧지만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알린스키, 2008: 15쪽).

“1968년에 … 미국 장로교의 조지 타드 목사는 허버트 화이트(Herbert White) 란 조직가를 … 한국에 보냈다. 화이트는 연세대학교 도시문제연구소를 베이스로 하고 수도권선교협의회에 가담해서 서울 청계천의 빈민촌을 중심으로 조직가들을 훈련하기 시작했다 … 화이트는 알린스키의 훈련을 받은 사람으로 미국 뉴욕 주의 로체스타에서 코닥(Kodak)을 상대로 한 주민조직을 성공시킨 조직가였다.

수도권선교협의회는 위원장 박형규 목사를 중심으로 화이트에게서 훈련받은 젊은 조직가들의 행동반경을 확대시켰다. 이 훈련계획은 2년간 계속되었고 15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과정을 마쳤다. 이렇게 조직된 수도권 팀은 도시산업선교회 사람들과 연대하여 197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의 근간을 만들었다.”

오재식의 글이 사실이라면 조영래의   <평전>은 청계천 평화시장을 둘러싼 노동운동의 전개에 외부의 훈련된 세력이 개입하고 있었던 사실을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는 셈이다. 공교롭게도 그 외부조직이 활동한 시기는 조영래의 <평전>이 후반부에서 기술하는 전태일의 노동운동 투신 과정과 정확히 시간적으로 겹친다.

그래서 그런지 조영래의 <평전>은 후반부로 갈수록 내용이 치밀하지 못하다. <평전>에 의거해서 사실적인 전태일의 삶을 전반부와 같이 재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화시장 생활의 전반부 즉 ‘시다’ 생활을 시작한 1964년 봄부터 ‘재단사’가 되는 1967년 봄까지 3년간의 시간은 <평전>에 의거해 전태일의 삶을 거의 완벽하게 재구성할 수 있다. 그만큼 전반부의 <평전>은 명확하다.

반면에 전태일이 노동운동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는 1968년 봄부터 분신하는 1970년 11월까지 2년 반 동안의 기간에는 <평전>에 따라 전태일의 삶을 명쾌하게 복원하기 어렵다. 평화시장에서의 해고와 재취업이 두서없이 반복되고 또 그 사이 사이에 공사장의 막노동 심지어는 삼각산 기슭의 엠마뉴엘 수도원 신축공사 현장생활 5개월 등이 뒤엉켜 등장하며 전태일의 생각을 두서없이 나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평전>이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이 기간에 바로 오재식이 언급한 외부세력과의 접촉이 진행된 시기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조영래의 <평전>은 1968년 이후의 전태일 삶을 파편적으로 밖에 기술할 수 없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후반부의 <평전> 내용은 전태일의 활동을 입체적으로 그리고 연속적으로 접근하기 어렵도록 상황 설정을 시공간적인 맥락에서 의도적으로 분절시키고 있다. 이 부분의 기술이 두루뭉술한 까닭이다.

한편 조영래의 <평전>은 전태일 주변의 등장 인물에 관한 서술에서도 조악한 모습을 보인다. 예컨대 가명인 김개남의 첫 등장을 <평전>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968년 봄 평화시장 재단사인 김개남은 전태일을 알게 되었다”(145쪽). <평전>의 주인공은 당연히 전태일이다. 그렇다면 이 부분의 기술은 당연히 “전태일은 김개남을 알게 되었다”로 표현해야 한다. 주어와 목적어의 순서를 뒤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외부세력의 의도적 접근과 관찰을 무심코 드러낸 표현이 아닐까? 그렇다면 가명으로 등장하는 김개남이야말로 오재식이 증언하고 있는 현장조직에 침투한 활동가일 가능성이 높다.

<평전>이 제시하는 바보회의 활동 지침을 결정하는 과정도 석연치 않기는 매한가지다 (160-162쪽). 그 중 한 가지인 ‘모범업체’를 설립하는 구상이 얼마나 비현실적이었는지를 우리는 앞의 논의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같은 지침 가운데 또 다른 하나인 근로자들의 ‘노동실태 조사’에 관한 발상은 당시로선 정말이지 매우 선진적이고 기발한 아이디어임에 틀림없다. 오늘날에는 흔히 사용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매우 획기적인 방식인 설문조사를 통해 실태조사를 했기 때문이다.

근로기준법의 조문조차 이해하지 못해 “대학생 친구 하나만 있으면 원이 없겠다”던 전태일과 그의 동료들이 그렇다면 어떻게 ‘설문조사’라는 참신하고도 과학적인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을까? 오재식과 같은 인물로부터 교육받아 노동운동의 이론과 실제를 이미 알고 있는 활동가의 영향 없이 과연 전태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설문조사’라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 대학생 운동세력의 접근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우여곡절 끝에 전태일은 마침내 1970년 9월 죽음도 마다않겠다는 결심과 함께 평화시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월급 2만3000원을 받는 재단사로 ‘왕성사’에 취업한다(245쪽 및 256쪽). 다른 한편 그는 김개남과 연락하며 ‘바보회’를 계승할 ‘삼동회’를 조직하고, 평화시장 노동자 126명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같은 해 10월 6일 노동청장에게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제출한다. 다음날 10월 7일 신문은 그 진정서의 내용을 대서특필해 전태일은 크게 고무된다.

그러나 언론보도 이후 말로만 이뤄지는 형식적인 관심과 지원, 나아가서 그 배후에서 실질적으로는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을 겪으며 전태일은 시위와 저항의 악순환을 반복하면서 좌절한다. 전태일은 결국 1970년 11월 13일 만 22세의 나이에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는 구호와 함께 시위가 예정된 광장으로 석유를 뿌리고 뛰쳐나오며 분신자살 한다.

이 마지막 결정적 순간에 관해서도 <평전>은 불분명한 대목을 남긴다. 석유를 뒤집어 쓴 전태일에게 불을 붙인 인물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인가? 다른 동료 운동가인가? 동료라면 누구인가? <평전>은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확인할 수 없는 전태일의 마지막 유언을 강조하며 끝을 맺는다. 2009년 신판으로 출판된 <전태일 평전>의 기록이다.

그러나 1983년 초판 <전태일 평전>은 이 부분의 내용이 전혀 다르다. 1983년 초판은 이 대목에서 김개남이 성냥불을 붙인 사실을 명확히 기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전태일은 김개남의 도움을 받아 분신했다. 그렇다면 김개남은 누구인가? <평전>이 말하듯 이 이름은 가명이다. 그리고 앞에서 추론했듯 김개남이야말로 학생운동 출신으로 노동운동 현장에 투신한 활동가 조직원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추론을 뒷받침하는 기록은 또 있다.

“학생운동권 대부에서 분쟁지역 돕기 나선 ‘양국주’의 탈레반 인생”이라는 조선일보 2009년 10월 31일 기사다. 조선일보 주말 판 연재물인 ‘WHY’ 는 당시 ‘문갑식의 하드 보일드’라는 제목을 달고 다음과 같은 인터뷰 기사를 내보냈다. 질문자는 문갑식 기자이고 응답자는 양국주다.

■ 목사에서 운동권 투사(鬪士)로

1949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양국주의 삶에 딱 어울리는 영어 표현이 있다. ‘은(銀)수저를 입에 물고….’ 그의 아버지 양재열은 부호(富豪)였다. 그는 한국칼라인쇄와 주사기 관련 업체를 경영하고 있었다. 한국칼라인쇄는 대한민국 달력 전부를 인쇄한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정읍서국민학교 4학년을 마치고 서울 혜화국민학교로 전학 온 양국주의 집은 돈암장 터였다. 넓은 집만큼 돈이 많았고 각계에 걸친 인맥도 두터웠다. 그보다 더 굳건한 건 예수를 향한 믿음이었다. 양재열은 정읍과 서울 잠실에 대형 교회 2개를 지어 봉헌(奉獻)했다. 경신중고를 마치고 숭실대 3학년 진급을 앞둘 때 양국주는 아버지처럼 되고 싶어했다. 꿈이 목사였다.

―그 꿈이 왜 바뀐 겁니까.
“제가 연세대 철학과 2학년으로 편입했습니다. 그곳에서 기독학생회(SCA)라는 서클에 들어가면서 삶이 바뀌었지요. 연대 SCA 회장에 이어 한국기독학생연맹 의장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운동권이 된 겁니다."

―당시 운동권은 어땠습니까.
“소올 알린스키의 ‘지역사회이론’을 혹시 압니까? 그는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최측근입니다. 지역사회이론의 요체는 ‘잠자는 민중을 깨워 리더를 양성시킨 뒤 그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한다’는 내용입니다. 예를 들면 전태일 같은 인물이 그렇지요.”

―그를 압니까?
“분신(焚身)할 때 곁에 있었으니까요. 전태일은 지금 미국 샌디에이고에 있는 이승종 목사가 교육시켰지요.”

―고 조영래 변호사가 <전태일 평전>을 썼지요.
“전태일은 과격하고 다혈질이었어요. 나중에 노동열사(烈士)가 됐지요. 박종철이나 이한열이 민주열사가 된 것처럼. 그건 시대의 아픔이 후일 하나의 상징으로 변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조영래 씨는 제 형(양창삼 전 한양대 대학원장)의 친굽니다. 나중엔 인권변호사가 됐지만 대학 시절엔 정치색이 강했어요. 경남 함양에 국회의원으로 출마하겠다며 열심히 작업했지요.”

22살에 분신한 전태일의 삶을 그린 조영래의 <평전>은 엄청나게 중요한 부분을 가리고 있다. 왜냐하면 외부세력이 “접근한 현장의 하나가 전태일의 분신사건”이라는 오재식의 공개적 증언이 <평전>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양국주의 증언 “분신할 때 곁에 있었고, 전태일은 지금 미국 샌디에고에 있는 이승종 목사가 교육시켰다”는 내용도 <평전>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김개남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과연 그는 전태일을 상대로 무슨 일을 했는가? 1990년대 초 ‘유서대필’ 사건을 시작으로 유행처럼 번지던 운동권 대학생들의 자살을 보고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고 일갈했던 시인 김지하 그리고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존재하고 있음을 고발한 당시 서강대 총장 박홍 신부의 발언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쟁점은 앞으로 보다 심층적인 분석과 조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어찌됐든 지금까지의 분석으로 이 대목에서 분명히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다름 아닌 전태일의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다”는 <평전>의 설명은 100% 거짓말이라는 사실이다. ‘설문조사’ 방식의 노동자 실태조사도 같은 결론으로 이끈다. 또한 다른 무엇보다 이 의구심은 평전이 보여주는 분신 장면에 대한 기술이 1983년 초판에서 분명히 등장했던 김개남이 2009년 신판에서 사라진 사실로도 뒷받침된다.

결론 : 전태일은 아름답지 않다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은 젊은이들에게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착취’ 당하고 있으며 그들을 위해서는 노동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야 한다고 도덕적으로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평전>의 내용을 차근차근 따져보면 사실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전태일은 ‘착취’ 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전>은 전태일의 임금이 3년 동안 10배, 그리고 6년 동안 15배로 상승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평전>은 전태일에게 접근했던 대학 출신 노동운동 활동가들의 존재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다”는 거짓 문구로 젊은이들의 감성을 선동할 뿐이다. 알린스키의 운동노선을 따라 “외부세력이 접근한 현장의 하나가 전태일 분신사건”이라는 증언이나 “전태일은 지금 미국 샌디에고에 있는 이승종 목사가 교육시켰다”는 증언은 <평전>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조영래의 <평전>은 있는 그대로의 전태일이 아니라 선동을 위해 사실을 왜곡한 전태일에 관한 글일 뿐이다.

당시를 살았던 다른 사람들의 선택과 비교해 볼 때 전태일이 선택한 삶 혹은 죽음이 도덕적으로 바람직하고 나아가서 아름다운 것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전태일과 엇비슷한 조건에서 출발해 온갖 어려움을 헤치고 오늘날 자수성가해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며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태일의 극단적인 선택은 불가피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아름답지도 않다. 다만 불행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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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tes 2018-09-14 14:02:59
라이터 불을 붙여준 것으로 나온다. 김영문은 담배를 안 피우는 사람이라 라이터를 가지고 다니지도 않을 뿐더러, 그날 전태일을 따라가기는 했어도 불을 붙일 정도의 거리도 되기 전에 그의 몸에서 먼저 불길이 솟았으니 참으로 억울한 일이었다. 잘못된 기록은 오랫동안 김영문의 마음에 상처로 남는다." 청계 내 청춘 중... 살아있는 사람이 버젓이 있는데 의문제기도 좋지만 이렇게 나몰라라식으로 교수씩이나 되시는 분이 글을 쓰시니 참..

hites 2018-09-14 14:01:47
"김영문은 전태일이 분신한 1년 후 군대에 가는데 그가 군에 있는 사이에 분신 사건에 대한 증언들이 채록되었고, 그와 관련된 부분에 오류가 생기게 된다. 담뱃가게 주인이나 가게 옆에 있던 삼동회원들은 분신 순간의 상황을 정확히 볼 수 없었는데 김영문이 전태일을 따라가더니 불길이 일었다는 정황 때문에 김영문이 불을 붙여준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채록을 맡은 조영래가 수배중이어서 취재에 자유롭지 못한 원인도 있었다. 김영문은 군에서 제대한 후 서대문의 한 중국집에서 조영래를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 부분에 대한 진실을 말할 기회가 없었다. 남들이 자기를 그렇게 오해하고 있는 줄은 알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조영래가 쓴 전태일 평전에는 김영문이 김개남이라는 가명으로 등장해 전태일의 요청에 따라

dddd 2017-10-31 16:40:50
류석춘 참... 저딴 걸 글이라고 쓰고 앉아 있다니 기가 찰 노릇이네요

2017-05-29 10:56:18
정말 좋은 글이었습니다.
재미있게 3번 읽었습니다.
나중에 한번 더 읽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