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그래함의 반공 메시지가 한국을 구했다’
‘빌리 그래함의 반공 메시지가 한국을 구했다’
  • 전호진 미얀마개혁장로교신학교 학장
  • 승인 2017.06.19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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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흔들리는 혈맹

다시 전쟁 위기 앞에 선 한국

우리 사회는 1950년 6·25동란 이후 가장 심각한 전쟁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그런데도 전쟁 불감증, 이념 불감증이 심각하다. 6월은 한국동란이 일어난 지 벌써 67년째이다.

어린 시절 나는 서울에서 6·25를 만나고 3개월 동안 인민군 통치하에서, 밤에는 미군들이 낙하산 타고 내려와 우물에 독약을 넣는다고 죽창 들고 ‘소년단’ 단원으로 ”장백산 줄기줄기”를 부르면서 우물을 지키며 밤을 새웠다.

처참한 전쟁을 경험한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 나라가 걱정되어 기독교적 관점에서 한국동란의 의미를 고찰하고자 한다. 최근 제이 더글러스의 <빌리 그래함, 미국 복음주의, 메시아 비전의 동서냉전>(Billy Graham, American Evangelicalism, and the Cold War Clash of Messianic Visions, 1945-1962), 2012년 뉴욕 로체스터대학교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한국의 은인이다. 그의 반공 메시지는 미국이 한국을 도우도록 했다. 6·25 때 미군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한국은 베트남식 적화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베트남 통일을 부러워하는 자들은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려고 한다.

2차 세계대전의 종결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초강대국을 만들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두 나라는 독일을 상대로 연합국으로 함께 싸웠다. 그러나 곧 냉전시대가 열리고, 세계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로 대립하게 된다.

미국은 민주주의, 자본주의, 기독교를 전 세계로 수출하는데, 반면 소련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종교를 말살하고 공산 이데올로기를 수출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1945년 미국 복음주의 진영은 소련 공산주의를 거의 사단적인 악의 세력으로 간주, 영적 전쟁을 선포하는데, 거기에 가장 앞장선 사람이 빌리 그래함 목사였다.

▲ 6.25 전쟁이 계속되자 그래함 목사는 1051년 9월 ‘결단의 시간(Hour of Decision) 설교에서 한국전쟁은 미국과 영국이 포츠담과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에게 너무 양보한 대가라고 비판했다. 그는 “스탈린을 믿은 대가는 죽음뿐이었다”고 외쳤다. 사진은 6.25 당시 피난민들의 모습. / 연합

빌리 그래함의 반공 메시지

빌리 그래함은 1949년 31세의 나이에 미국을 움직이는 부흥사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빌리 그래함의 메시지는 아주 단순하다. 초보 목사들도 할 수 있는 단순한 복음 메시지인데도 미국과 나아가 세계를 움직였다. 물론 배후에 기도하는 많은 신자가 있었다.

더글러스는 그래함의 메시지를 개인주의-자본주의 복음(individualist-capitalist gospel)으로 요약한다. 그는 모든 인간은 다 죄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메시지이다.

그러나 기독교 국가로서의 미국과 미국의 세계적 사명을 강조했다. 그는 ‘결단의 시간’(Hour of Decision) 방송 설교에서 인류 역사를 전쟁의 역사로 설교했다. 3000년의 역사에서 3000번의 전쟁이 있었다고. 앞으로 다가올 핵전쟁의 위기도 설교했다. 당시 소련은 이미 미국의 원자탄 비밀을 훔쳐 원자폭탄을 만들었다. 그래함은 소련을 전쟁광으로 봤다.

그는 1630년 청교도 목사 존 윈드롭(John Winthrop)의 ‘산 위의 도시’(산 위의 마을: 마 5:13)에 근거해 미국이 기독교 신앙으로 위대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다. 즉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미국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래함은 그의 이념을 아메리칸 메시아 주의(American Messianism)로 표현한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미국 우월주의의 민족주의가 아니라, 선민으로서의 미국은 세계를 구원할 사명이 있고, 동시에 그 사명을 수행하지 못할 때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역설했다. 그는 이미 세계 경찰국가(police state)로서 미국의 역할을 설교했다. 이스라엘의 언약 사상을 미국에 적용한 셈이다.

더글러스는 50년대와 60년대 초기 미국인 60%가 주일 아침 교회에 출석했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그래함은 미국의 도덕적 타락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회개를 촉구했다.

미국은 선택된 나라지만 죄악이 관영함으로 회개하고, 철저히 ‘하느님에게 돌아가라, 예수에게 돌아가라, 성경으로 돌아가라’(Back to God, and back to the Christ, and back to the Bible)를 외쳤다.  공산주의 등장과 한국동란은 미국이 겸손하고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경고로 설교했다. 그의 메시지는 처음부터 반공(반공산주의) 메시지였다.

더글러스는 그래함의 반공 이념을 마니키안(Manichean)적 이원론 사상으로 정의한다. 마니 키안은 페르시아의 이원론적 우주관, 즉 우주를 선과 악의 전쟁터로 보는 세계관이다. 당시 미국 민주당은 평화주의 입장이었지만, 트루먼도 빌리 그래함과 같은 사상이었다.

트루먼과 맥아더는 한국의 은인이다. 트루먼은 철저한 칼빈주의 신자인 덜레스 국무장관으로부터 남침보고를 받고 “the sons of bitch”를 반드시 막아야 하면서 10초 만에 미군 파병을 지시했다고 한다.

소련 메시아 주의와의 대결

그는 동서 냉전을 영적 전쟁, 즉 아메리칸 메시아 주의(American Messianism)와 소련 메시아 주의(Soviet Messianism)의 대결로 봤다. 소련 메시아주의는 세계를 자본주의의 악과 모순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공산혁명을 전 세계로 수출하려는 이념이다. 그래함은 이러한 공산주의 이념을 반 하느님, 반 예수, 반 미국(anti-God, anti-Christ, and anti-American)으로 봤다.

소련 메시아 주의는 정통 마르크시즘과 구 러시아 제국의 부정적 유산을 합한 것이다. 우리는 소련 하면 전형적 공산주의 국가로 말한다. 더글러스는 공산주의 전문가 조지 캐난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공산주의가 러시아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러시아가 도리어 공산주의를 변질시켰다”고. 러시아의 유산이 마르크시즘을 삼키고 말았다는 것이다.

구 차르 제국의 러시아 이미지는 정복, 독재, 인권탄압, 부정부패이다. 러시아 정교회가 국교였지만 정교회 역시 타락했다. 공산 연구자 딘코 토마식(Dinko Tomasic)도 러시아 제국의 부정적 유산이 공산주의에 그대로 넘어갔다고 주장한다.

볼셰비키 혁명을 주도한 세력들은 처음부터 증오, 모욕, 불화, 무자비한 폭력, 배신, 거짓을 다반사로 했다. 빌리 그래함도 전체주의적 러시아가 공산주의를 포용한 순간부터 비공산 세계를 적으로 취급했고 시작부터 세계 혁명을 준비했다고 했다. 스탈린은 세계 혁명에 자신을 바쳤다.

따라서 공산주의에는 평화란 불가능하다. 1936년과 1937년에 러시아 국민들은 자유와 기독교를 원해 스탈린에게는 이념적 도전이 되었지만 2차 세계대전이 도리어 그를 살렸다. 그는 불화, 갈등, 증오, 고문을 자행했다고 설교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현실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이론적으로는 아주 이상적이다. 정치이론은 계급투쟁이고 역사이론은 유물사관이다. 경제학은 잉여 가치설이다. 공산당 선언은 프롤레타리아가 주도하는 공산사회 건설이 공산주의자들의 최고 목적이라고 밝혔다.

마르크시즘은 자본주의의 반대 개념으로, 공동생산으로, 사유재산을 반대한다. 개인을 평등화시키면 어떤 개인도 타락할 수 없다고 한다. 즉 공동소유, 공동생산, 계급 없는 사회가 되면 다 번영과 자유를 누린다는 것이다.

국가가 생산을 통제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레닌이 집권하면서 정통 마르크시즘은 변질되어 정부가 모든 것을 통제하도록 하고 말았다. 스탈린 때 소련 공산주의는 무서운 이데올로기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다.

북한도 1990년 초에 마르크시즘을 버렸다고 한다. 따라서 북한의 공산주의는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정통 공산주의가 아니다. 이미 정치학자들은 김일성 우상화는 일본 왕을 현인신(現人神 : あらわひとかみ)으로 말한 제국헌법의 모방이라고 했다.

북한은 구소련 공산주의를 그대로 답습했지만 세습 주의는 봉건왕조식이다. 북한이 붕괴되지 않는 이유는 북한은 전통적 국가 개념이 아니라 신학자 폴 티리히의 표현을 빌리면 의사 종교(pseudo-religion) 국가이다. 국가는 무너져도 종교 이념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통일된다 해도 북한 주민들의 주체사상을 바꾼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한국동란과 빌리 그래함

그래함은 한국동란을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봤다. 한국동란은 마르크시즘의 필연적 결과라는 것이다. 그는 한 설교에서 한국동란은 공산주의와 기독교간의 전쟁의 시작이라고 했다. 맥아더 원수도 한국동란을 신학적 전쟁으로 해석했다.

그래함은 마르크시즘의 비도덕성과 호전성이 한국동란을 일으켰다고 본다. 마르크스주의는 언제나 전쟁을 필요로 하는 이데올로기이다.  동시에 혁명을 확산시키는 데는 어떠한 범죄도 정당화된다.

이것이 한국동란에서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는 한국동란 원인을 한국 민족주의(동족 간의 전쟁을 의미하는 것 같음)에 돌리지 않고 마르크스와 스탈린에게 돌렸다.

한국동란이 1년 이상 계속되자 미국 국민들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이 분위기를 감지한 그래함 목사는 1951년 9월 ‘결단의 시간’(Hour of Decision) 설교에서 한국동란은 미국과 영국이 포츠담과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에게 너무 양보한 대가라고 비판했다.

이 두 회담에서 미국과 영국은 결코 프라하와 베를린에, 그리고 북한에 소련군 진주를 허용해서는 안 되었다. 소련은 일본과 불과 5일만 전쟁을 하고 북한에 진주해 결과적으로 한국동란이 일어나게 했다.

“스탈린을 믿은 대가는 죽음뿐이었다”고 외쳤다. 그는 스탈린을 거의 사단으로 여기고 한국동란의 배후에는 보이지 않는 힘인 스탈린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이 사단은 형제가 형제를 미워하게 하고 크리스천이 크리스천을 미워하게 한다“고 했다.

1951년 6월 미 공군기 6대가 훈련 도중 충돌하는 대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을 공산주의자들과 좌익들(left winger)의 음모로 보고, 그들을 “미국의 배신자, 한국전쟁에서 우리 청년들을 죽이는 자들이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동란이 일어나자 미국 복음주의 연맹(NAE)을 동원해 구제사업과 복음 전도 병행을 주도했다. 당시 한국 교인들은 미국 기독교의 구호품을 많이 받았었다. 그래함은 한국이 미래에 전도하는 나라가 되도록 성경을 많이 보급하도록 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승만 박사가 반공포로를 석방한 것을 크게 지지하면서 인민군 포로 중에 신자들이 많은데, 왜 그들을 북한으로 돌려보내느냐고 반공포로 석방을 비난하는 자들을 도리어 공격했다. 당시 많은 중공군과 북한 포로는 중국과 북한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했다.

그래함은 소련이 제안한 휴전회담은 공산주의에 속는 것으로 해석했고 미국의 가치관과 기독교 이념을 양보하는 행위로 봤다. 당시 국무장관 덜레스, 주한 유엔사령관 리지웨이 장군도 소련의 휴전회담 제안은 우리를 조롱하는 것이라고 반대했다. 그들의 통찰력은 예리했다.

그래함은 레닌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했다. “때로는 지그재그로 나가고, 때로는 한 발 물러서고, 때로는 선택한 것도 포기하기도 하고, 여러 방도를 마련하도록 시도해라.” 그는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성탄절 전에 한국을 방문, 전방 미군부대에서 설교하고 1000명의 결신자를 얻었다.

맥아더 사령관의 해고

많은 한국 사람은 그를 한국의 은인으로 존경한다. 그러나 객관적 평가는 극명하게 대립한다. 더글러스는 기독교 관점에서 맥아더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래함과 많은 복음주의 지도자는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 원수를 해고한 것을 엄청나게 비판했다. 그로 인해 트루먼의 인기는 바닥을 쳤다.

당시 미국 복음주의자들과 그래함은 트루먼을 부정적으로 봤다. 맥아더의 해고는 반공주의자들의 동맹을 분열시키는 것으로 생각했다. 맥아더는 일본 기독교 재건과 일본 복음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그가 해고되자 미국 선교사들과 일본 기독교인들은 그의 해고는 일본 기독교에 큰 타격이라 실망했다.

마이켈 브린(Michael Breen)은 저서 <새 한국 : 비즈니스, 역사 한국인>(The New Korean : The Business, History and People of South Korea 2017년 출간)에서 맥아더 장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이승만 대통령과 만나는 극적인 장면을 소개한다.

맥아더 장군은 “자비로운 섭리의 은혜로 우리 군인들은 인류를 위한 희망과 영감으로 싸워 역사적 도시 서울을 해방하였습니다.” 그리고 참석자들 앞에서 주기도문을 낭독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맥아더 장군의 손을 꽉 잡고 “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은 우리 민족의 구원자입니다”라고 하였다. 맥아더는 명령 불복종으로 해임 당했지만 그는 중국 본토를 폭격하면 소련이 결코 개입 못한다고 봤는데, 그의 판단이 옳았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한국은 통일의 기회를 잃은 셈이다. 그래함과 많은 미국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유엔이 결코 세계 평화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봤다. 한국은 17개 유엔 참전국에 감사하지만, 당시 영국이 가장 강력하게 맥아더의 만주 폭격을 반대했다.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통찰력을 무시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손“

과거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다. 불행하게도 공산주의와 좌익은 과거 역사를 부정하거나 왜곡한다. 젊은 세대들은 역사를 바로 배우지 못하고 있다. 6·25 전 한국은 좌우익 충돌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마이켈 브린에 의하면 박정희는 1946년 대구 공산당 폭동사건 후 남로당에 가입했다. 그는 좌익이 더 조직적이고, 애국적이고 우파보다 덜 타락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조사관들에게 잘 협조한 대가로 사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반공주의자로 경제건설을 했다.

한국동란 전에는 좌파 지지자가 더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남로당 당수 박헌영은 북한으로 도망가서 김일성에게, “남한으로 내려가면 대대적으로 장군님을 환영할 것입니다”라고 보고했다고 한다. 필자는 동란 전 청파초등학교 학생이었다.

소풍갈 때 “이북 갔다 박헌영, 이북 갔다 박헌영”이라는 동요 가까운 노래를 불렀지만 의미를 몰랐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서울 거리는 스탈린, 김일성, 인민군이 장총으로 한국군을 바다로 밀어 넣는 사진으로 뒤덮였다. 그들은 한 달 만에 “남조선을 해방한다”라고 자신만만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이 말한 대로 “은혜로운 섭리”가 작용했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자 너무 흥분해 계속 진격하지 않고 서울에서 3일 동안 잔치판을 벌였다. 그 3일이 한국의 운명을 바꿨다.

아담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경제에서만 아니라 한국전쟁에 나타났다고 확신한다. 이 내용은 한 전방 사단 전사 세미나에서 한국 전사연구를 한 장교가 발표한 내용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만약 주 유엔 소련대사가 한국 참전을 결정하는 안보리에 참석했더라면 유엔 파병 결정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날 소련대사는 불참했다.

이것을 두고 소련대사 지프차 타이어가 펑크가 났다는 농담이 나돌았다. 그러나 후에 권위 있는 설은, 스탈린이 이상하게도 그 날은 휴가를 가면서 어떤 연락도 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깨진 마르크시즘의 환상

아시아 대부분의 불교국가들은 공산화되든지 반공산주의 국가가 되고 있다. 비서구 국가의  지식인들과 청년들은 좌익 혹은 사회주의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다. 일본도 1930년대 이미 대학생들이 군부통치에 대한 반대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그들은 학교에서 건전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배우지 못했다. 마르크시즘의 유토피아 이론에 현혹되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 비서구 지도자들도 이슬람이나 공산주의 체제를 선호하게 되어 있다. 개인보다 국가를 더 우선시하고, 강력한 통제를 행사할 수 있는 공산주의를 지도자들이 거부할 이유가 없다. 북한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는 경제는 자본주의, 정치는 사실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정책을 시행했다.

구소련의 해체는 공산주의의 항복을 의미한다. 1980년대 우리 사회를 휩쓴 이념 서적들은 거의 다 1920년 이후 쓰인 책들로서 마르크시즘이나 공산주의가 성공한 모델이 아직 없었다.

다만 이론적으로 유토피아 환상을 제시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지적했다. 그러나 지금 공산 사회가 더 부패했고, 비도덕적이라는 것은 솔제니친 등 공산주의 지식인들이 이미 고발했다. 한국도 동일하다.

자본주의는 그래도 원죄를 설교하고 개혁을 외치는 자들이 있고 반대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 국가에는 회개하라는 설교가 없거니와 개혁의 목소리가 통하지 않는다.

토마스 모어가 말한 유토피아란 단어에서 ‘유’는 그리스어로, ‘무’(없음)를 의미한다. 유토피아는 그대로 해석하면 ‘no place’(there is no place)이다. 인간은 원죄가 없다면 정의로운 사회 건설이 가능하다. 그러나 정권마다 개혁을 외쳤지만 실패했다.

이유는 개인의 중생(regeneration)이 없는 개혁은 불가능하다. 기독교는 혁명(revolution)의 종교가 아니라 중생을 기초로 한 개혁(reform)이다. 사회주의를 실행한 일부 이슬람 국가와 남미 국가는 지금도 독재, 부정·부패, 빈곤, 갈등의 늪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외국 학자들이 한국은 전쟁 후 폐허 속에서도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기독교라는 3대 이념으로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했다고 말한 것을 수년 전 영국 이코노미스트지가 보도했다. 불평, 불만, 왜곡, 선동의 감정 문화로 위대한 내일을 건설할 수 없다. 역사는 사랑, 화해, 감사, 정의, 진리로 발전한다.

미국은 영적 우방국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1950년 1월, 미국의 극동방위선 애치슨 라인에서 한국은 제외되어 남침을 당했다고 말한다. 미국이 한국을 제외시킨 중요한 이유는, 미국 정부는 한반도를 ‘전략적 가치가 없는 곳’으로 봤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역사에 기록되었다.

이 결정을 하는 데는 주일미군 지도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짐작한다. 그들은 패전국 일본을 높이 평가하고, 반면 한국은 방어해 줄 가치가 없는 나라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덜레스, 빌리 그래함 같은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서구를 우선시하는 미국의 정책을 극동으로 바꾸고 말았다.  한국은 전쟁이냐 아니면 평화적 통일로 가느냐의 역사적 기로에 있다.

박정희 대통령도 미국 없는 자주국방을 위해 핵 무장을 시도했다. 만약 미군이 철수하더라도, 이것은 최악의 시나리오지만, 한국의 진정한 영적 우방국(spiritual ally)은 중국도, 일본도 아닌 미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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