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연합훈련의 변천 과정
한미연합훈련의 변천 과정
  • 고성혁 군사전문저널리스트
  • 승인 2017.06.19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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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의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시작한 한미연합훈련 북한이 가장 두려워했던 팀 스피리트, 문재인 정권에서 변화 예상

대한민국 문재인 호(號)가 닻을 올렸다. 모두가 예상한 바와 같이 문재인 호는 크게 좌 선회를 예고하고 있다. 경제 외교뿐만 아니라 안보 관련해서도 좌 선회는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주한미군의 사드 배치에 대해 재검토를 천명했다. 한미 간에 사드 문제 조율 방법에 따라 주한미군 및 한미연합훈련의 성격도 크게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매년 한·미 양군은 대규모 연합훈련을 공개적으로 실시한다. 전략적으로는 북한의 전쟁도발 억제력을 목적으로 하지만 전술적으로는 매년 훈련의 성격이 다르다. 최초의 한미연합훈련은 1969년 포커스 레티나(Focus Retina)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현재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는 팀 스피리트(Team Spirit) 훈련은 당시 자유진영의 최대 동계 기동훈련이었다. 한미연합훈련은 1994년 한미 전시증원(RSOI)훈련으로 변경되었다가 2008년부터 현재까지는 키리졸브(Key Resolve)라는 이름으로 훈련이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한미연합훈련이 시기별로 이름을 달리하는 데는 전략 시나리오의 변화도 있지만 무엇보다 크게 작용하는 것은 한미 간의 정치적 상황 변화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권의 향후 방향성에 따라 한미연합훈련은 어떻게 변할지 과거 한미연합훈련의 변화 과정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 지난 3월 15일 연례적으로 진행된 키리졸브 한미연합훈련에 참가하기 위해 미국의 니미츠급 항공모함인 USS(Carl Vinson)호가 부산항에 정박해 있다. / 사진출처 : Global Times


한반도 유사시 美 증원군 투입 확인-포커스 레티나 훈련
 
1969년 3월 17일 여주 인근에서 최초의 한미연합훈련인 포커스 레티나 훈련이 개시되었다.  1969년의 3월은 한국전쟁 다음으로 가장 긴장된 시기였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를 포함한 북한 124군 소속 31명의 무장공비는 청와대 인근까지 침투했다.

바로 이틀 후인 1월 23일에 미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해군에 납치되었다. 같은 해 울진 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당시 우리의 안보환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북한의 연속된 도발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월남전에 발목이 잡혀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에 대한 무상군사지원은 줄고 주한미군의 일부는 월남전에 투입되면서 전력의 공백까지 우려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의 한국방위공약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방위공약 실천을 행동으로 보여줄 것을 미국에 강력히 요구했다.

주한미군의 일부가 월남전에 투입된다 하더라도 한국 방위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것을 미국은 증명해야 했다. 이러한 정치·군사적 상황에 대한 결과로 1969년 3월에 포커스 레티나라는 이름으로 최초의 한미연합훈련이 시작되었다. 북한이 기습 남침하더라도 미 본토에서 긴급히 증원군을 파병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목표였다.

포커스 레티나 훈련은 미국이 새로 개발한 초대형 수송기 C141이 투입될 수 있기에 가능했다. 미군 최정예 82공정사단의 2500여 완전무장 병력은 미 본토에서 한국까지 불과 30여 시간 만에 투입되었다.

한·미 최초 연합훈련인 포커스 레티나 훈련은 최장(最長) 공수작전이었다. 이 작전의 기본 골격은 현재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한국 측 병력은 공수특전단장 정병주(鄭炳宙) 준장을 선두로 600명의 공수단이 여주 남한강 일대에서 일제히 낙하해 훈련에 임했다.

훈련 장면을 박정희 대통령과 당시 주한미군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 찰스 H 본스틸 대장이 함께 지켜 봤다. 훈련에 동원된 총 병력은 7000여 명에 달했으며 2700대의 차량과 2900톤의 장비가 투입됐다. 그러나 훈련이 있은 지 5개월 후인 1969년 7월 닉슨독트린이 발표되었다.

미국의 새 아시아정책 닉슨독트린
 
미국의 37대 대통령에 당선된 닉슨은 괌에서 대 아시아 정책을 발표했다. 닉슨은 1969년 7월 25일 괌에서 그의 새로운 대아시아정책인 닉슨독트린을 발표하고 1970년 2월 국회에 보낸 외교교서를 통해 닉슨독트린을 세계에 선포했다. 괌 독트린(Guam Doctrine)이라고도 불리는 미국의 신(新)아시아 정책은 한국의 안보환경에 직접적 영향을 줬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미국은 앞으로 베트남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피한다.
② 미국은 아시아 제국(諸國)과의 조약상 약속을 지키지만, 강대국의 핵에 의한 위협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란이나 침략에 대해 아시아 각국이 스스로 협력해 그에 대처해야 할 것이다.
③ 미국은 ‘태평양 국가’로서 그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하지만 직접적·군사적인 또는 정치적인 과잉 개입은 하지 않으며 자조(自助)의 의사를 가진 아시아 제국의 자주적 행동을 측면 지원한다.
④ 아시아 제국에 대한 원조는 경제중심으로 바꾸며 다수국간 방식을 강화해 미국의 과중한 부담을 피한다.
⑤ 아시아 제국이 5∼10년의 장래에는 상호안전보장을 위한 군사기구를 만들기를 기대한다.
 
주한미군의 베트남 투입과 프리덤볼트 훈련

포커스 레티나 훈련은 71년에 이름이 바뀌었다. 71년에 미국은 닉슨독트린의 일환으로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 7사단을 월남전에 투입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닉슨 행정부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불신은 깊어만 갔다. 결국 미국은 주한미군 7사단이 한국에서 철수한다고 하더라도 한국 안보에는 전혀 영향이 없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프리덤 볼트(Freedom Bolt)로 명명(命名)된 한미연합훈련은 주한미군 7사단을 철수시키는 정책에 대한 한국 정부의 불만을 달래려는 의미와 함께 미 7사단 철수에 따른 북한의 군사적 도발에 대한 사전 경고의 의미도 있었다. 그래서 이름자체도 한·미 양쪽을 강하게 연결하는 볼트(bolt) 개념이 들어간 ‘프리덤 볼트’라고 이름이 지어졌다.

이 훈련의 이면에는 미 7사단 철수라는 것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을 강하게 압박해 미 7사단이 사용하던 잉여 장비, 특히 M48 탱크 등은 한국에 그대로 남겨두고 떠나게끔 했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박 대통령은 자주국방이라는 의지를 굳히고 본격적인 무기 개발에 착수했다.

대규모 한미연합훈련은 표면적으로는 북한에 대한 경고 메시지가 있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신속기동능력이 있는 미군이란 점을 내세워 주한미군 감축의 구실로도 이용되었다. 이런 사례는 독일에서도 있었는데 63년 10월 서독에서 1만8000명의 병력이 참가한 ‘빅 리프트 공수 훈련’이 있은 직후 서독에서 미군 1개 사단이 철수했다.

주한미군 철수 대비 팀 스피리트 훈련, 레이건 때는 확대
 

닉슨독트린으로 말미암아 주한미군은 약 7000명 감축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의 기치 아래 무기 개발과 한국군 현대화 작업을 가속화 시켰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은 한국에 대해 압도적인 군사력을 보유했지만 당시 한국군 지휘관의 상당수는 월남전에서 얻은 실전(實戰) 경험이 있었다. 그렇게 남·북은 군사적 균형을 유지했다.

그러다가 76년 미국에서 카터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또 한번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 그는 주한미군 철수를 대선공약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주한미군 철수정책은 완전히 왕따 취급받았고 실제적으로도 약 1200명 철수에 그쳤다.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 정책 때문에 또다시 한미연합훈련의 이름이 바뀌었다.

그것이 바로 팀 스피리트(Team Spirit) 훈련이다. 미군이 철수하더라도 한국에 대한 미국의 지원(支援) 의지는 변함이 없다는 의미였다. 레이건 대통령은 카터와는 반대로 주한미군을 증강시켰다. 한미연합훈련은 더 강화되었다. 팀 스피리트 훈련은 한미 양군(兩軍) 약 20만 명이 동원되는 최대 군사 기동훈련으로 기록되었다.

80년대는 86, 88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준비로서 미국의 한국 중시(重視) 정책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레이건-대처-나카소네-전두환의 자유진영 지도자의 연결 라인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루스벨트-처칠-드골로 연결된 자유진영 라인 다음으로 그 연결성이 굳건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팀 스피리트 훈련 기간 동안 북한 역시 전국 비상령이 발동되어서 군단급 기동훈련이 벌어졌다. 이것은 북한 경제에 악영향을 미쳤고 결국 94년 김일성이 죽기 직전 김영삼 대통령의 방문을 수락하기에 이르렀다. 팀 스피리트 훈련과 나토 기동훈련 그리고 미국의 스타워즈계획은 결과적으로 구 소련을 몰락시킨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팀 스피리트 훈련 중단과 RSOI 훈련 개시

팀 스피리트 훈련은 1993년 김영삼 정권에서 중단되고 말았다. 팀 스피리트 중단 배경엔 ‘북핵 위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당시 갈루치 동아시아차관보가 대북특사로서 북한과 핵동결 협상을 할 때 북한은 팀 스피리트 훈련 중단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한미 양국은 핵동결을 위해 팀 스피리트 훈련 중단을 받아 들였다. 그러나 그 이후 북한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2006년 2차 핵위기를 초래했다.

결과적으로는 한미 양군의 팀스피리트 훈련만 없어지게 된 셈이었다. 한미연합사는 대규모 기동훈련인 팀스피리트를 대신하여  전시증원연습(RSOI)을 94년부터 실시했다. RSOI(Reception, Staging, Onward Movement, and Integration)는 한반도 유사시 전개될 미군 증원 전력의 이동과 한국군의 지원 절차 등을 익히는 연례 훈련이다.

럼스펠트 독트린과 주한미군 감축
 
부시 2기 행정부와 노무현 정권의 불협화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때마침 럼스펠트 독트린으로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 대두되는 과정에서 노무현 행정부 내 반미자주파의 득세는 아주 손쉽게 미군이 한국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2006년 이후 1만2500명의 주한미군 철수는 7사단 철수 이후 가장 큰 규모였다. 이로 말미암아 주한미군의 아파치 3개 대대가 아프간 투입을 명목으로 미 본토로 철수했다.

▲ 홍석현 대미특사는 5월 17일(현지시간) 미국 백악관 집무실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만나 문재인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한민동맹과 북핵문제 등 현안에 대해 논의했다. 사진은 트럼프 대통령(가운데)과 홍석현 대미특사(왼쪽 두번째)와 안호영 주미대사(오른쪽 두번째), 마이크 펜스 부통령(오른쪽 첫번째), 하버트 맥매스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왼쪽 첫번째)이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 연합

전작권 전환과 키 리졸브

노무현 정권이 미국과 협의한 ‘전작권 전환’은 한미연합사 해체를 합의했다. 한미연합사의 전력이 어느 만큼 큰지를 안다면 그렇게 쉽게 할 사항이 아닌데 아무튼 그렇게 결정이 되고 말았다. 그 전작권전환 협상이 이뤄진 후 한미연합훈련의 이름이 또 한번 바뀐 것이 올해 진행되고 있는 키 리졸브(Key Resolve) 훈련이다. 이름 그대로 ‘해결의 열쇠’라는 의미에서도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한미연합훈련의 지나온 역사를 서술해 봤다. 문재인 정권 하에서 한미연합훈련이 어떻게 변화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제 북한만이 아니라 중국까지 사사건건 한국에 간섭하는 시대로 변했다. 중국이 한미연합훈련 중단을 요구하면서 또 다른 경제적 제재를 안 한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한미연합훈련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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