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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무트 콜, 치열한 외교戰 뚫고 독일 통일을 이루다

거인의 발자취 박상봉 독일통일정보연구소 대표l승인2017.06.29l수정2017.07.03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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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봉 독일통일정보연구소 대표  webmaster@futurekorea.co.kr

‘통일총리’, ‘통일의 아버지’, ‘세기의 정치인’, ‘대(大) 독일인’. 지난 16일 87세로 서거한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에게 붙여진 별명들이다.

193㎝에 100㎏이 넘는 거구의 외모처럼 콜이 이뤄낸 업적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대변한다. 콜은 재임 기간 16년을 기록해 12년 재임의 아데나워 총리의 기록을 경신한 최장수 총리이자 25년 동안 기민련 총재를 역임한 정치인이다.

▲ 독일 국민들과 국제사회에 ‘통일총리’, ‘독일 통일의 아버지’, ‘세기의 정치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헬무트 콜(Helmut Kohl) 총리(1930.04.03.~2017.06.16.루트비히스하펜)

1959년 29세의 나이로 라인란트-팔츠 주 의원에 당선,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한 콜은 1969년 주 총리를 거쳐 1973년 기민련 총재에 올랐다. 1982년에는 독일 연방총리에 당선되어 1998년 임기를 마쳤다. 재임 중 베를린 장벽을 해체시키고 통일을 이뤄 독일을 완전한 주권 국가로 회복시켰다.

이런 정치적 역량과는 달리 가정 생활은 불행한 편이었다. 아내 한네로레는 극심한 햇볕 알레르기로 2001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남 발터 콜은 아버지의 죽음을 언론을 통해서 알았다고 한다.

2008년 재혼한 34세 연하의 마이케 리히터와 두 아들의 관계는 불신으로 얼룩졌다. 물론 리히터는 콜 총리가 낙상해 간호가 절실할 때 직장을 그만 둘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장남 발터 콜은 하버드에서 유학하고 독일로 귀국해 컨설팅회사, 무역회사 등에서 활동하던 중 1994년 한국 여성 황경숙과 재혼했다. 부부는 한국의 자동차 부품을 수입하는 ‘Kohl & Hwang’를 설립해 활동하기도 했다.

국제정치학의 ABC, 승리는 독일의 콜

슈피겔은 독일의 대표적인 주간지다. 슈피겔은 통일 20주년 특집으로 2010년 9월 27일 ‘1 대 100’(Allein gegen Alle)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해체의 날부터 1990년 9월 12일 소위 2+4 회담으로 통일이 최종 승인되던 날까지의 숨 막히는 과정을 ‘대(大)포커게임’으로 규정하고 프로 갬블러들의 전략과 밀당을 상세히 다뤘다.

통일 후 20년 동안 관련국이나 당사자들이 공개하지 않았던 방대한 문서나 자료가 공개되었고 시대의 증인들의 증언도 여과 없이 보도되었다. 역시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국제정치학의 ABC 그대로였다.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4개 전승국 프로 갬블러는 물론 네덜란드, 이탈리아, 폴란드 등 유럽국가 그리고 이스라엘까지 참여했다. 유명 정치인, 국제정치학자, 군인, 비밀요원 등도 게임의 추이를 엿보며 제 몫 찾기에 혈안이었다.

게임은 예상 밖으로 급진전되었다. 초기의 화두였던 독일의 주권 회복도 곧 통일로 바뀌었다. 개혁을 요구하던 동독 시위대가 갑자기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다”(Wir sind ein Volk)라는 구호를 외치며 통일을 부르짖자 상황이 반전된 것이었다. 독일이 주권을 회복하겠다는 것도 용납하기 어려운데 감히 통일을 거론하다니 갬블러들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당시 서독의 지위는 총리가 베를린을 방문하려면 연합국의 동의를 얻어 주인이 아니라 손님으로 방문했을 정도였다. 서독-베를린 구간 항공편은 미국의 팬 앰, 영국의 브리티시 에어웨이즈, 프랑스의 에어 프랑스에 국한했다. 루프트한자의 취항은 불허되었다.

유럽 내 반독일 정서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6주 전 대처와 고르바초프의 크렘린 회동에서도 예견되었다. 두 정상은 독일 문제와 관련해 통일은 물론 주권도 회복할 수준이 아니라는 데 뜻을 같이 했다.

하지만 이런 유럽의 반독일 정서와 달리 동독 내 상황은 정반대로 치달았다.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내리고 프라하나 바르샤바 주재 서독 대사관에는 동독을 떠난 탈출자들로 가득했다. 매일 2000여 명의 청년, 지식인, 전문인들이 동독 탈출 행렬을 만들었다. 동독 공산 정권은 허울 뿐 권력의 추가 이미 시위대로 기울었다.

소련의 베팅과 콜의 역공
 
이런 기대와 현실의 괴리 속에서 소련은 11월 21일 니콜라이 포르투가로프 특사를 본에 파견, 콜의 안보특별보좌관 호르스트 텔칙과 만났다. KGB 고위 간부였던 포르투가로프의 임무는 독일의 향후 상황을 소련의 국익과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이 소련 비밀경찰의 전통이었고 이번에도 차후 협상을 염두에 둔 포석이 필요했다. 이 회동은 서독에게는 기회의 자리였다. 텔칙이 회동 과정에서 소련의 의도를 간파했기 때문이다. 즉 동독 사태가 소련의 의지대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감한 것이다.

텔칙은 곧바로 콜에게 달려가 “지금이 통일의 주도권을 잡을 적기”라며 총리의 결단을 촉구했다. 콜은 역대 어떤 총리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던 카드를 던지리라 다짐했다. 통일을 베팅하기로 다짐했다. 반세기 독일인을 짓누르던 전범국의 자격지심을 벗기로 했다.

이 결심을 최측근 겐셔 외무장관에게도 숨긴 채 독일 문제 해결을 위한 10개항 프로그램을 만들어 갔다. 그리고 11월 28일 연방의회 연설을 통해 10개항을 발표하는 강수를 뒀다. 타이프는 아내 한네로레 여사가 직접 담당했다.

이 베팅으로 세기적 포커 게임이 본격적으로 막을 올렸다. 원래 콜 총리는 독일 문제를 장기계획을 수립해 처리해나가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통일을 위해 나토 탈퇴라는 카드도 염두에 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모든 갬블러의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고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저 콜의 베팅이 틀렸다며 난리였다.

프랑스의 두마스 외교장관은 “독일이 콧대 높은 줄 모른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허를 찔린 미국과 소련도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난감했다. 콜의 베팅이 일단 성공하는 모습이었다.

더욱이 유럽 국가들은 동독 경제를 ‘다이아몬드 원석’(Rohdiamant)으로 규정하고 서독의 고급 기술이 첨가될 경우 휘황찬란한 다이아몬드로 거듭날 것을 예상하며 더 거세게 반대했다.

1989년 12월 스트라스버그 유럽 정상회담은 콜을 성토하는 자리였다. 대처는 “전쟁에서 두 번이나 완패한 나라가 다시 꿈틀거리고 있다”, 미테랑은 “유럽은 독일 통일을 이해할 만큼 성숙하지 않았다”, 네덜란드 루버스 총리는 “독일 민족에게 자율권을 부여할 수 없는 일”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이탈리아도 범게르만주의 회생을 경계해야 한다고 거들었다. 그리고 모든 유럽 국가들이 콜 정부가 동독 국경을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심지어 이스라엘 샤미르 총리는 “독일이 통일되면 다시 유대인 학살에 나설 것”이라며 불편한 심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독일을 상대로 전 세계가 연대하는 형국이었다.

미국과 소련의 반응도 대동소이했다. 고르바초프는 콜을 도자기 가게에 전시된 코끼리에 비유해 “뇌가 없는 정치를 하고 있다”고 몰아세웠다. 콜의 10개항 프로그램은 식상한 보복주의에 불과하다고 폄하했다.

소련은 내심 동독 상황이 폭력 사태로 비화되어 소련군의 개입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길 바랐다. 실제로 정치학자 라파엘 비어만은 1990년 1월 동독 시위대가 슈타지 본부 수 km 전까지 진격했을 때 소련 전차부대가 출동하기 일보 직전이었다고 밝혔다.

조지 W. 부시 역시 콜의 독주에 제동을 걸었다. 통일된 독일은 나토에 잔류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영국의 대처 총리도 이 카드는 가장 효과적인 베팅이라고 동조했다. 소련이 절대로 이 조건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콜의 편에 선 하늘

모든 갬블러들이 반독 정서로 한 목소리를 내는 가운데 오직 동독 사태만이 콜에게 우호적으로 전개되었다. 동독 저항 운동은 매우 절제되고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다. 시위대는 늘 비폭력을 외쳤다. 1953년 6월 17일 소련의 무자비한 탱크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던 경험을 잊지 않았다.

체코, 폴란드 등 동유럽을 경유한 탈출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소련 발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운동은 이미 멈출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 되었다. 콜의 드레스덴의 방문을 계기로 서독과 동독 주민의 연대감은 더 공고해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다른 갬블러들은 콜의 10개항에 제대로 대응할 카드를 제시하지 못했다. 이제 남은 것은 군사적 대응뿐이었다. 소련, 영국, 프랑스, 심지어 헝가리, 체코, 폴란드,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동유럽 국가들도 동독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군사력을 동원하는 것뿐이라는 데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누가 군을 동원할 것이냐?’라는 구체적인 질문에 봉착했을 때에는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콜의 베팅이 이어졌다. 가장 먼저 미국의 조건을 수용했다. 통일된 독일은 나토에 잔류할 것을 천명하고 부시의 엄호 하에 소련 공략에 나섰다.

부시는 콜이 나토 잔류 조건을 받아들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당시 서독에는 콜의 정치적 라이벌인 사민당의 오스카 라퐁텐이 나토 해체를 주장하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었다.

라퐁텐은 서독 기본법 146조에 의한 통일 방안을 주장하던 인물로 동독 호네커 정권과 1 대 1로 통일협상을 추진하던 좌파 정치인이었다. 미국의 입장에서도 콜의 10개항을 적극 지지해 나토를 지키고 멈출 수 없는 통일열차에 승선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독일의 입장에서도 나토 잔류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만약 독일이 나토에서 탈퇴한다면 북대서양 동맹은 해체될 것이고 유럽 내 핵보유국인 영국과 프랑스가 이 지역 맹주로 급부상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소련이다. 콜은 10개항을 강력히 규탄했던 소련을 어떻게 설득하느냐라는 문제로 밤낮없이 골몰했다. 소련이 반대하면 게임은 종료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소련의 빗장은 의외로 소련 측이 스스로 풀었다. 1990년 1월 25일 소련 중앙위원회 총서기 집무실에 고르바초프를 비롯한 각료, 군부, 당지도부 등 국가지도부가 집결했다.

모두가 망연자실한 모습이었고 고르바초프의 입에서 동독에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할 여력을 잃어버렸다는 말이 나왔다. 재정을 지원해 동독을 계속 영향권 하에 두려고 해도 소련 스스로도 재정이 궁핍한 형편이었다. 소련 외무성은 서방 은행에 수입대금 조차 밀려 있다고 털어놓았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콜은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1990년 2월 10일이었다. 독일의 미래를 좌우할 가장 중요한 행보였다. 소련이 동의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사였다.  이미 겐셔 등 정부 주요 인사들이 모스크바를 드나들며 개혁·개방을 자문하고 지지해 왔던 터에 콜은 대규모 차관을 제공하는 등 선물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개혁의 주체로 콜의 성의에 감동한 고르바초프의 마음이 움직였다. 개혁을 주도하던 고르바초프도 국내 반대파의 저항과 재정적 어려움이라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던 터라 콜의 허심탄회한 청원을 거부하기 어려웠다. 즉, 향후 독일 문제는 독일인의 자율적 결정에 따른다는 견해를 피력하며 간접적으로 통일을 지지해 줬다.

옆자리에서 두 정상의 회담 내용을 꼼꼼히 받아 적던 텔칙의 마음이 벅찼다. 텔칙은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만약 소련이 대가로 1000억 마르크를 요구해도 기꺼이 수락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고르바초프가 왜 이런 요구를 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는 고르바초프는 도덕주의자, 오늘날 러시아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정치 풋내기, 아니면 머리에 과부하가 걸려 복잡한 상황과 변수를 제대로 처리해내지 못했던 것 아니냐는 등의 대답이다. 겐셔 외무장관은 당시 고르바초프는 소비에트 연방의 공화국들의 독립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웠다고 말했다.

이렇게 미국과 소련의 벽을 넘었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반대는 끈질겼다. 고르바초프를 향해 “미친 것 아니냐”며 반발했던 영국이 독일의 폴란드 국경 오더-나이스를 인정하라고 요구하며 훼방을 놓았다.

미테랑은 독일이 마르크화를 포기하고 유로화를 도입하고 유럽 통합을 예정대로 추진할 것을 요구했다. 프랑스는 독일의 라이벌로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에서 차라리 사통당의 후신인 민사당이 승리하기를 바랐었다는 고백을 했을 정도로 독일 통일에 거부감을 보였다.

통일이 눈 앞인데, 여기서 주저앉을 수 없었다. 콜은 영국, 프랑스의 요구도 모두 수용하며 통일의 목표를 향해 달렸다.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 대동독 정책의 절정

콜의 대동독정책은 동독 주민에 초점을 뒀다. 집권 초기 동독에 제공한 19.5억 마르크의 지원도 국경에 설치된 자동기관총을 제거하는 등 상호주의에 기초했다.

1963년부터 매년 1000여 명에 달했던 정치범 석방 프로젝트인 프라이카우프, 양심수들의 서독 이주 및 동독 교회의 비교적 자유로운 활동은 서독 마르크화의 위력에 기인했다.

다른 한편 체제와 안보와 관련된 사안에 있어서는 한 치의 양보도 허락지 않았다. 집권 2년차인 1983년, 콜은 동독에 설치된 소련 핵 탄도미사일 SS-20에 맞서 미국의 핵미사일 퍼싱 II를 실전 배치하는 결단을 보였다.

당시 본에는 30만 명의 평화운동가들이 모여 반대 시위를 벌였고 평화를 요구하는 인간띠가 무려 103km에 달하기도 했다. 통일 후 콜은 만약 당시 평화운동에 굴복해 퍼싱 II 배치를 철회했다면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고 통일이라는 기적도 없었을 것이라고 회상한 바 있다.

사민당의 평화 공세에도 굴하지 않았다. 1980년대 중반, 사민당은 에곤 바를 중심으로 잘츠기터 중앙범죄기록소 무용론을 내세워 해체를 강력히 요구했다.

기록소는 베를린 장벽 발포 등 동독 공산 정권의 불법행위를 기록해 추후 책임을 추궁한다는 의미에서 1961년 니더작센 주 국경도시 잘츠기터에 세워졌다. 년 예산이 25만 마르크(당시 1억2000만 원 규모)의 초미니 기구였지만 효과는 대단했다.

동독은 브란트의 동방정책 이후 동서독 관계를 악화시킬 뿐 아니라 평화 무드를 저해한다는 이유로 기록소의 폐지를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다. 실제로 1988년 노드라인-베스트팔렌의 사민당 주 정부(주총리 요한네스 라우)는 분담금 5만6000마르크를 출연하지 않았다.

하지만 콜은 연방예산으로 부족분을 충당해서라도 기록소를 유지했다. 이렇게 ‘초미니 비대칭무기’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될 때까지 지속되었고 28년 동안 4만2000여 건의 불법범죄행위를 기록해 통일 후 동독 공산 지도부의 처리에 중요한 근거를 마련했다. 통일 후 사민당의 포겔(Vogel) 대표가 이런 행적에 대해 공식 사과한 바 있다.

하지만 콜의 대동독정책은 1989년 여름부터 본격화되었다. 동독에는 라이프치히를 중심으로 반공 저항운동이 불길처럼 타올랐고 동베를린 서독 대표부에 역사상 처음으로 121명의 동독 주민이 진입하는 상황이었다. 체코, 폴란드 주재 서독 대사관은 연일 모여드는 동독 탈출자들을 위해 마당 가득 텐트를 설치해야 했다.

콜은 겐셔 외무장관을 파견해 탈출자들을 서독으로 이주시켰고 헝가리 정부로 하여금 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하는 외교적 성과를 보였다. 동독의 저항 운동에 대한 콜 정부의 대응은 급기야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을 해체시켰고 호네커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이런 급변 상황 속에서 월요데모 등 저항 운동을 주도한 시민단체는 원탁회의를 구성해 본격적으로 국정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호네커의 후임 크렌츠 총서기가 발탁한 공산 개혁주의자 모드로프 총리는 스스로 원탁회의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등 동독 구하기에 안간 힘을 다했다.

모드로프는 12월 18일 드레스덴을 방문할 콜에게 희망을 걸었다. 이 기회를 잡아 콜과 정상회담을 통해 동독 사태를 진정시킨다는 계획이었다. 모드로프는 동독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한 150억 마르크의 재정 지원을 요구하고 반대급부로 역대 공산 정권이 거부해왔던 통일을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콜은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독일 문제 해결을 위한 10개항 프로그램을 재확인했다. 당시 드레스덴 방문은 콜에게는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 두 마리 토끼를 잡지 않으면 안 되는 기회였다.

하나는 영국, 프랑스 등 주변국들의 우려를 잠재우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통일을 염원하는 동독인들의 희망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었다. 거리에는 ‘헬무트!’를 연호하던 드레스덴 시민들로 넘쳤다.

연설을 앞 둔 전날 밤 콜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주변국의 지도자들과 언론들이 연설의 자귀 하나 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울 것이 뻔했다. 혹시 말 한마디라도 실수한다면 뭇매를 가해 독일의 미래가 불투명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고민 끝에 콜의 연설은 “동독 주민 여러분, 자유를 위해 투쟁하십시오, 하나님의 가호가 있기를 바랍니다.” 굳이 통일을 주장해 주변국의 반발을 초래해서도 안 되었고, 맥 빠진 연설로 동독 주민들의 열정을 꺾을 일도 아니었다. 자유를 위해 투쟁하라는 이런 고민의 결과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콜의 대동독정책의 절정은 1990년 3월 18일 동독 자유선거를 통해 최초의 민주적 정권을 창출토록 한 데서 찾을 수 있다. 포커 게임을 승리로 이끈 10개항 프로그램이라는 베팅이 만들어낸 성과였다.

이 프로그램의 핵심은 두 가지로 첫째, 동독 내 민주 정권을 수립하기 전까지 인도주의적 지원은 물론 통일 논의를 포함한 모든 협상을 중단한다는 것과 둘째, 향후 전개될 통일의 과정은 유럽의 틀 속에서 추진할 것이라는 원칙이었다.

결국 동독은 1990년 3월 18일 자유선거를 통해 민주적 정당성을 갖춘 드메지어 정권을 세웠고 콜은 드메지어 정권과 통일 협상을 추진해 10월 3일 통일을 완성했다.

▲ 콜의 대동독 정책은 동독 주민에게 초점을 뒀다. 집권 초기 동독에 제공한 19.5억 마르크의 지원도 국경에 설치된 자동 기관총을 제거하는 등 상호주의에 기초했다. 1989년 5월 무너진 베를린 장벽 위에서 장벽의 붕괴를 기뻐하는 독일인들 / 사진출처 : ces.fas.harvard.edu

코카서스의 기적과 2+4 회담

콜이 포커 게임을 승리로 이끈 데는 1871년 독일제국을 통일했던 비스마르크 재상의 정치철학도 한 몫을 했다. “정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신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그의 옷자락을 잡아채는 것”이라는 교훈은 모든 독일 정치인의 정치철학이었다.

콜은 프로 갬블러들과의 베팅이 오고갈 때마다 비스마르크의 교훈을 가슴에 새겼다. ‘뇌가 없는 정치인’, ‘두 번이나 패전의 쓴 맛을 본 주제에 다시 고개를 쳐든다’, ‘독일이 통일되면 홀로코스트가 재연될 것이다’라는 독설이 난무할 때마다 동독인들의 ‘헬무트!, 우리를 도와주세요’라는 외침을 떠올리며 신의 옷을 놓치지 않았다.

미국, 소련의 장애를 넘고 주변 갬블러들의 견제를 극복해가며 콜이 이뤄낸 기적과 같은 일은 1990년 7월 16일 독소 코카서스 정상회담과 9월 12일 2+4 모스크바 회담이었다.

코카서스 회담은 독일이 소련으로부터 완전한 주권회복과 자율적 의사결정에 따른 통일을 문서로 보장받는 사건이었다. 역사는 이 회담을 ‘코카서스의 기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콜은 회담의 대가로 총 550억 마르크를 지불했다. 여기에는 동독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의 철수비용, 고향에서의 주택마련 기금 등도 포함되었다.

2+4 모스크바 회담은 동독과 서독, 그리고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총 6개국 외교장관들이 독일의 완전한 주권을 회복시키고 통일을 인정하는 마지막 절차였다. 이를 끝으로 세기의 대포커게임은 끝났고 콜의 승리로 끝났다.

독소 코카서스 회담과 2+4 모스크바 회담의 주요 합의사항은 다음과 같다.

1. 통일과 함께 독일에 대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4개 전승국의 권리와 책임은 완전 소멸된다. 독일은 통일 시점을 기해 주권을 완전히 회복한다.
2. 동독 주둔 소련군은 3~4년 과도기 내에 철수한다.
3. 소련군이 동독 영토에 잔류하는 한 나토 동맹의 동독 확대는 불가하다.
4. 통일된 독일의 군대를 3~4년 내에 37만 명으로 감축한다.
5. 통일된 독일은 핵, 화학, 생물무기 제조, 보유 및 처리를 포기하고 비확산 조약(NPT) 회원국으로 남는다.
6. 독일은 폴란드와의 국경인 오더(Oder) 나이스(Neiss) 국경을 인정한다.
7. 독일의 통일헌법은 독일군의 군사행동을 금지한다.
8. 서독 연방군은 통일과 함께 동독 및 베를린에 주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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