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가진 정치인을 기대한다
철학을 가진 정치인을 기대한다
  • 김영용 전남대 명예교수
  • 승인 2017.12.15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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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바로 세우기

정치 철학이 없는 정치인은 인간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와 과정을 터득할 수 없다. 따라서 복잡다기한 국내외적 판세를 읽을 수 있는 혜안을 가질 수 없고, 따라서 한국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가질 수 없다.

그런 정치인이 대통령 직위와 같이 여러 사람을 대상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자리에 오른다면, 본분을 망각한 권력 다툼과 이해관계에 따른 의사결정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한 피해는 막대하게 된다.

특히 한국과 같이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대북정책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대한민국 국민들의 생명과 자유와 재산을 지킬 수도 있고, 국민들을 북한에 볼모 잡히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정치인은 그 목적이 자기 보존인 국가의 기원에 대한 인식을 확고히 하고 구체적으로는 국민의 생명과 자유와 재산을 보호할 수 있는 국가를 만들고 유지하는 일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로부터 국방과 치안, 각종 규제 혁파, 노동 능력이 전혀 없거나 부족해 스스로의 삶을 유지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복지 등의 정책을 자연스럽게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 인식을 가진 정치인이어야

철학을 가진 정치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복무 또는 봉사하게 될 정치 사회, 즉 국가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즉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견해가 있어야 한다. 이는 물론 동서양의 정치 사상가들의 주된 탐구 주제였다. 여기에서는 홉스, 로크, 루소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홉스에 의하면 자연 상태의 인간 세상은 타인의 공격에서 기인하는 죽음에 대한 공포의 세상으로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 상태이다. 따라서 이러한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생존하기 위한 모든 개인적 조치는 정당화된다. 그러나 모두가 이런 조치에 나선다면 인간 세상에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가라는 절대자에게 모든 개인의 자유를 맡김으로써 개인의 안녕과 사회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 즉 전쟁 상태로 특징지어지는 자연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국가라는 주권자의 권한과 통제가 필요하며, 사람들은 상호 간의 합의에 의해 그들이 자연으로부터 물려받은 자연권을 포기하고 주권자에게 양도할 것을 약속한다.

주권자의 권한은 절대적이므로 이에 대해 개인들은 이견을 가질 수 없다. 즉 자연권의 양도는 주권자와 개인들 간의 약속이 아니라 개인들 간의 약속이므로 주권자는 개인들에게 종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들이 자연 상태에서 가지는 절대적 자연권을 주권자에게 위임하고 복종함으로써 사회 평화가 이룩된다.

로크는 자연 상태는 인간들이 서로 보존하고 원조하며 호의를 베푸는 평화의 상태이며, 이런 상태에서 인간은 자유롭고 소유물에 대한 절대적 주인이며 다른 사람들과도 평등하다. 그러나 로크는 한편으로는 자연 상태의 이러한 점을 인정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상태는 불확실하므로 자연 상태는 잠재적인 전쟁 상태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자연권적인 자유와 권리를 가지지만 항상 다른 사람들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으므로 자연권을 확실하게 보장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로크는 인간들 간의 분쟁과 충돌을 심판하고 중재할 수 있는 제3의 심판자가 없는 자연 상태의 평화는 확실한 것이 아니라 전쟁 상태를 초래하고 만다는 점에 동의한다.

이와 같이 자연 상태에서는 개인의 생명과 재산의 형성 및 유지·보존이 보장되지 않으므로 인간들이 자연 상태를 떠나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기로 합의하고 자신들의 자연적 권리에 대한 집행권을 공동체에 양도함으로써 국가라는 정치 사회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는 개인들의 자발적 동의를 바탕으로 한다. 즉 국가라는 정치 사회로 편입되면서 자유롭기는 하지만 불안한 자연 상태를 벗어나 다른 인간들과 함께 정치 사회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 목적은 당연히 개인의 생명, 자유, 재산의 상호 보존에 있다.

로크는 홉스와 같이 사회계약론을 주장하지만 주권자에 대한 불복종의 문제에 있어서는 홉스와 다르다. 홉스에 의하면 자연권을 주권자에게 양도한 것은 개인들 서로 간에 합의한 사항이며 주권자와 합의한 사항이 아니라는 점에서 주권자에게 불복종할 수 없다.

그러나 로크에 의하면 국가 권력이 권위적이고 강제력이 있어야 하지만 공공의 복리가 아닌 경우에는 그 강제력이 제한되어야 한다. 따라서 자연법에 어긋나는 국가 권력에 대해서는 당연히 시민들의 불복종이 인정된다.

루소의 자연인은 기술이나 언어, 그리고 집도 가지지 않는다. 전쟁도 하지 않으며 서로 간에 동맹도 맺지 않고 동족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해치려 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동족 가운데 누구도 개인적으로 기억하는 일조차 없다.

인간의 이러한 성향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사회적 동물이 되어 모여살기 시작한 것은 가혹한 자연을 공동으로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혼자서는 이겨낼 수 없는 자연 재난, 즉 대홍수나 지진 같은 일련의 재난에 대처하기 위해서 상부상조의 삶을 필요로 함에 따라 시민 사회가 형성되었다.

이는 곧 여러 가지의 우연한 외적 요인들에 의해 인간들이 사회적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연 상태에서 바뀐 상태를 법적 질서로 다듬고 사회계약이라는 수단에 의해 정치 사회를 탄생시켰다는 것이 루소의 설명이다.

홉스와는 달리 루소의 계약 당사자는 개인 간의 계약이 아니라 개인과 국가라는 공적 존재와의 계약이다. 그러므로 국가라는 단일체가 구성원 각자와 계약을 체결하고, 이런 구조로 말미암아 국가를 구성하는 개인들은 계약의 목적이 달성되지 않았을 때 국가와 맺은 계약을 파기할 수 있다.

그런데 개인이 국가에 속하는 한, 개인에 대한 피해는 곧 국가 전체에 대한 피해가 되므로, 즉 국가가 한 개인을 해치면 반드시 전원을 해치게 되므로 시민 전원으로 구성된 국가라는 단일체 안에서 이런 일이 발생할 수는 없다.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주권자가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모순에 봉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계약의 훼손은 국가가 아니라 개인들 쪽에서 올 수밖에 없고, 그 이유는 개인은 시민이 되면서도 공공의 이익보다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국가는 시민이 의무를 다하고 일반의지에 복종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따라 각 구성원은 자신의 천부의 권리와 함께 자신을 공동체에 양도하고, 국가는 계약 이행의 유일한 심판자로서 권력을 소지하게 된다.

그런데 루소의 국가관은 개개인은 자신의 천부의 권리를 국가라는 공동체에 총체적으로 양도함으로써 자연 상태의 개인의 자유를 보존하는 것이었지만 국가에 모든 권력을 양도한다는 점에서 결국 홉스의 국가관에 이르게 된다.

이들 정치 사상가들의 국가 성립에 관한 핵심 내용은 사회계약론이며, 국가 성립의 기원은 자연 상태를 벗어난 개인들이 자신의 생명과 자유, 그리고 재산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는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계약론은,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사람들이 실제로 모여 그런 계약을 한 적이 없으며 계약을 집행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국가의 성립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받는다.

또한 이들의 정치 철학은 정치 사회의 형성 기원과 질서 유지에 관한 국가의 기능을 설명할 수 있지만, 국가 성립 이후에 나타나는 국가에 의한 국민의 자유 억압과 이에 대응하는 방안에 관해서는 자세히 논의하지 않는다. 즉 오늘날의 민주적 정체(正體) 하에서 민주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는 국가 권력의 개인의 자유 침범 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부실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홉스는 국가의 성립과 질서 유지에 대한 국가의 기능을 설명할 수는 있으나 국가 성립 이후에 나타나는 국가에 의한 개인의 자유 억압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하고 있지 않다.

로크는 입법권이 국가의 최고 권력이지만, 그 권력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좌우할 수 없으며, 최고 권력은 당사자의 동의가 없이는 어느 누구의 재산도 빼앗을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국가 권력이 강제력을 가져야 하지만 공공을 위한 것이 아닐 경우에는 그 강제력이 제한되고, 제한된 강제력을 넘어 자연법에 어긋나는 권력을 행사할 경우에는 시민들의 불복종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현대의 정치 사회에서 실제로 이런 불복종을 실행하기는 쉽지 않고, 따라서 국가의 강제력이 도를 넘어 행사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한국 정치계의 철학적 빈약

루소의 경우에도 사회계약의 훼손이 국가가 아니라 개인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개개인은 시민이 되면서도 공공의 이익보다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국가가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억압하는 현상과 대응 방안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

위에서 우리는 주요 정치 사상가들이 논의한 국가의 기원과 국가와 개인 간의 관계에 대해 개괄적으로 서술했다. 머리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치인에 따라 국가에 관한 견해를 달리할 수 있으나, 그것이 무엇이든 견해가 있어야 정치 사회가 지향해야 할 점에 대한 논의가 가능해진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지금의 한국 정치계는 철학적 현주소라는 말을 거론하기조차도 부끄러운 상황이다.

정치인들의 정치 사회에 대한 철학적 바탕은 지극히 빈약하거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정치인들이 선거에서 유권자들의 표를 얻어 당선되는 것이 목적이므로 표방하는 정견에 포퓰리즘적 요소가 전혀 없기는 어렵다는 점을 십분 감안하더라도, 정치 사회에 대한 철학과 사상 측면에서는 논의가 불가능할 정도로 빈약하다.

정치 철학적 빈약상은 우선 정당의 명칭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각 정당의 명칭은 그 정당이 표방하는 정치적 지향점, 즉 추구하는 이념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정당 명칭에서는 이런 이념적 지향점을 읽을 수 없거나 읽기가 쉽지 않다.

현재 선거에서 많은 국회의원이 당선되고 대통령을 배출해 집권 경험이 있는 정당, 즉 이른바 주요 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 정당의 경우에 특히 그러하다. 그런 만큼 정당의 구성원들도 상당히 이질적이다. 한 마디로 정당의 이념 측면에서는 오합지졸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한국 정당들의 이념적 지향점이 없거나 불분명한 것은 이념을 공유한 정당원들이 모인 정치 집단이 아니라 선거에서의 당선 가능성 위주로 구성된 지역 기반 정당이라는 점에 그 원인이 있다. 이는 물론 유권자들의 정치 사회에 대한 인식 부족과 지역적 투표 성향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유권자들의 이런 낮은 정치의식 수준을 고려하더라도 담대한 철학을 가진 정치인이라면 정치 사회에 대한 자신의 식견을 바탕으로 유권자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정치계에서 그런 정치인은 찾아보기 어렵고 가까운 장래에도 출현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한국 정당들의 철학적 기초가 빈약하다는 두 번째 증거는 정당들의 이합집산이 자주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특히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뤄지는 이합집산이나 선거 후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모습이 그렇다. 물론 애초부터 동질적인 정당원들로만 정당을 구성한다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따라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당원들의 이념적 지평에 따라 정당이 재편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런 과정을 거쳐 정당이 정제되고 정치인의 수준도 높아져 정당 간의 차별성을 부각함으로써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정당사를 돌아보면 이념적 지평에 따른 재편이 아니라 지역적 이해관계에 따라 재편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결과 정당의 이념적 지향점이 선명하게 부각되고 그 수준이 높아지기는 커녕 잡다한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념적 지향점이 확고하지 못한 정당의 수명이 길 수 없고 이합집산이 잦은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한국 정당들의 철학적 기초가 빈약하다는 세 번째 증거는 매 선거 시에 등장하는 포퓰리즘 공약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이념적 지향점이 빈약한 만큼 대부분의 공약이 포퓰리즘적이며, 그런 모습은 경제 정책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경제민주화, 기업지배구조를 규제, 최저임금 상향 조정, 등의 공약과 입법들이 그런 것들이다.

교육에서 방치한 철학 인식

마지막으로 한국의 정당들과 정치인들의 철학적 빈곤의 원인(遠因)은 교육에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과거 한국 교육은 주로 암기 위주 교육이었다. 어떤 사안에 대해 생각하고 자신의 견해를 형성하고 발전시키는 교육이 아니었다.

당연히 국가라는 정치 사회가 무엇인지, 국가는 왜 생기는지, 국가의 기능을 수행하는 정부는 무엇인지, 그런 분야에 종사하는 정치인으로서 갖춰야 할 지식과 덕목은 무엇인지에 대해 교육받은 적도 없고 스스로 생각해 본 적도 별로 없다.

상황이 그러하니 국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국방에 대해서도 정치인들의 견해가 엇갈리고 매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쟁점이 되고 있다. 국방과 치안에 대해서는 이념적 지평이 어떠하든 논란이 있을 수 없다.

국가의 기원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입장을 취하든 국가는 자기 보존, 즉 국민의 생명과 자유, 그리고 재산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파생되는 아주 중요한 이슈가 대(對)북한 정책이다. 그가 누구이든 대한민국 국민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집단은 한국의 주적(主敵)이다. 동일한 언어를 쓰는 집단을 동족이라고 부르더라도 우리의 생명과 자유와 재산을 위협하는 개인이나 집단은 우리의 주적일 뿐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주적인 북한을 주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동족이라는 이름 아래 대북정책을 호도하는 사람은 국가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드 배치와 제주도 해군기지 등 군사시설 확충에 미온적인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대통령 선거 때마다 불거지는 이슈가 바로 안보 문제라는 사실은 현재 한국 정치계의 지적 수준을 반영한다.

요약하면 현재 한국 정치계의 철학적 기반은 취약하기 짝이 없다. 한국이 한 단계 더 높은 정치 사회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우선 정치인들이 스스로 정치 사회에 대한 지식 수준을 높이고, 장기적으로는 생각하는 교육을 통해 양식 있고 역량 있는 정치인들이 나올 수 있도록 교육을 정비해야 한다. 그래야 정치인들이 국민들에게 끼치는 폐해를 줄이고 보탬을 줄 수 있다.

▲ 김영용 전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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