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쟁(黨爭)  시대의 무력한 재상 정유길
당쟁(黨爭)  시대의 무력한 재상 정유길
  • 이한우 미래한국 편집위원·논어등반학교장
  • 승인 2018.04.03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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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명재상을 찾아서

일반적으로 선조 8년에 조선의 당쟁이 본격화된 것으로 이야기한다. 실은 이미 그전부터 조짐이 있었고 이 때에 이르러 심의겸과 김효원이 인사권 문제로 충돌하면서 물밑에서 갈등하던 당쟁이 물위로 올라온 것일 뿐이다.

당쟁의 폐해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 재상 혹은 정승이 바로 이 당파의 일원이 됨으로써 나라 전체의 인재를 쓰지 못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선조 이전의 재상과 선조 이후의 재상은 그 품격에서 이미 차이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선조 8년 이후부터 좌의정을 맡았던 이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이 점은 쉽게 드러난다. 그 무렵 좌의정은 박순(朴淳)인데 그는 노골적으로 이이(李珥)의 후원자를 자처했던 서인(西人) 계열이다.

학문이 깊었다는 평가도 있지만 당쟁이 시작되던 시기에 그것을 제어하기보다는 어느 한쪽에 서서 좌의정의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당시 우의정은 노수신(盧守愼)이었는데 그 또한 서인과의 관련이 깊었고 뒤에 좌의정에 오르지만 실록은 “정승으로 있는 동안 이렇다 할 건의가 없었다”고 말한다. 불행하게도 이 때부터 나라의 재상은 드물게 되고 당파의 재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정승을 국상(國相)이라고까지 했는데 이 때부터는 당상(黨相)에 머물렀던 것이다. 이런 한계를 감안하면서 선조 이후의 재상들을 짚어볼 때 그들의 현실 속의 모습이 훨씬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함부로 ‘명재상’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까닭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정유길(鄭惟吉 1515~1588년)을 살펴보는 것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다. 당시 시대 상황을 누구보다 잘 체현하고 있는 인물이어서다.

우선 그의 배경은 든든하다. 할아버지가 중종 때의 명재상이었던 영의정 광필(光弼)이다. 또한 훗날 서인을 좌우하게 되는 김상헌(金尙憲)의 외할아버지다.

즉 그 이전까지는 한미한 편이었던 안동 김씨는 바로 이 정유길의 외손자였다는 사실 하나로 김상헌이 조정에서 발언권을 높이는 데 큰 힘을 실어 줬다. 그리고 그의 아들 창연(昌衍)도 좌의정에 올랐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유길은 겨우 이를 갈 무렵에 할아버지 문익공(정광필)이 슬하에 놓고 가르치면서 항상 부인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는 뒤에 반드시 나의 지위에 이를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무렵 어떤 재능을 보인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으로 볼 수도 있고 사람을 보는 데 밝았던 정광필이 그에게서 뭔가 특이한 점을 살핀 때문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문장에서 일찍부터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는 점이다. “조금 장성하자 문장의 구상이 넘쳐흘러 날마다 새로워지고 풍부해져 재능이 몇 사람을 아우를 수 있었으므로 동료 중에 앞선 사람이 없었다.” 관리로서 그의 길은 탄탄대로였다.

1531년(중종 26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8년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해 중종의 축하를 받고 곧 사간원 정언에 올랐다. 그 뒤 공조좌랑 이조좌랑 중추부도사 세자시강원문학 등을 역임했다. 뒤에도 그랬지만 정유길은 당파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쪽에 심하게 쏠리는 성향은 아니었다.

권력 다툼 속의 처세로 찬반 격론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외척들 사이에 틈이 생겨 조정이 분분했는데 유길은 격동하지도 않고 순종하지도 않으니 사론(士論)이 귀의했다고 한다.

1544년에는 이황(李滉), 김인후(金麟厚) 등과 함께 동호서당(東湖書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문흥을 일으키기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줘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했다.

KBS 역사 드라마에 등장한 정유길
KBS 역사 드라마에 등장한 정유길

굳이 말하자면 유길은 자기 의견을 강하게 내세우지 않는 관리형 인재였다고 할 것이다. 1552년(명종 7년) 부제학에서 도승지가 됐다.

1560년에는 찬성 홍섬(洪暹)이 대제학을 사양하고 후임으로 예조판서 정유길, 지사 윤춘년(尹春年) 및 이황을 추천했는데, 이 중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얻어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이 되어 문형(文衡)에 들어갔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문필가로 인정받은 것이다.

그러나 흔히 폭정의 시대로 불리는 명종 때 이렇다 할 간쟁은 없이 벼슬만 올랐다는 것은 그리 자랑이라 할 수는 없다.

결국 먼 훗날 우의정에 제수됐을 때 “명종 때 권신인 윤원형(尹元衡) 이량(李樑) 등에게 아부한 사람을 상신(相臣)에 앉힐 수 없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사직해야 했다.

그러나 결기가 없다고 해서 자신의 뜻을 굽히기만 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당시의 배경에 대해 외손자인 김상헌은 유길의 묘비명에서 이렇게 변명했다.

‘다시 찬성(贊成)이 되었을 때 홍문관에서 차자를 올려 지적해 배척하니 임금의 하교에 “내가 정 아무개를 보건대 그 마음이 순실(純實)하여 정말로 경박한 선비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근래에 조정의 관료들이 마음을 합쳐 나라를 도울 것은 생각지 않은 채 오직 자신들에게 빌붙지 않은 사람은 번번이 배척하고 있으니 장차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라고 하였다.

그때 선배와 후배가 서로 불신하여 당파로 나뉘는 조짐이 있었으므로 부군이 피차의 간격을 두지 않고 한결같이 화평하도록 조절하였는데, 소년(少年-신진인사)들이 일을 좋아하여 함부로 비평하며 공격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하교가 있었던 것이다.’

굳이 요즘 식의 용어를 빌리자면 ‘어용(御用)’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사실 정유길이 걸었던 길은 큰 시각에서 보면 임금을 섬기는 바른 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대가 동서(東西)로 갈라지면서 당색을 떠나 두루 정치를 하려 했던 인물들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런 끝자리에 정유길이 있었던 것이다. 1568년(선조 1년) 경상도·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면서 옥사(獄事)를 바로잡고, 민생안정에 진력했다.

1572년 예조판서로 있으면서 명나라 사신 접반사가 되어 능란한 시문과 탁월한 슬기를 발휘하여 명나라 사신과 지기지간이 됐다. 우의정이 사헌부에 의해 좌절된 지 2년이 지난 1583년에 다시 우의정에 오르고 그 이듬해 궤장(杖)이 하사되어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1585년 좌의정이 됐다.

이 무렵 유길에 대한 김상헌의 기록이다. ‘고사(故事)를 행하기에 힘쓰고 개혁하는 것에 신중을 기했다. 항상 명예와 세도를 멀리하고자 문호(門戶)를 세워 사사로이 후진과 결탁하지 않았으므로 이로 인해 누차 분분한 탄핵을 초래하였다.

부군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오래 된 가문의 세신(世臣)으로 나라의 은혜를 후하게 받았다고 여겨 차마 결연히 떠나지 못하였으나 의중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부군이 꿈속에 어느 정자에 이르러 마음에 매우 들었었는데 그 뒤에 사들인 정자가 한결같이 꿈속의 경관과 같았으므로 그냥 “몽뢰(夢賚)”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집은 “퇴우(退憂)”로 편액을 걸어 만년에 휴식하는 뜻을 의탁했다.’ 1588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북인 쪽에서 편찬한 ‘선조실록’은 그 일에 관해 “정유길이 죽었다”고만 기록했다.

그나마 서인에서 편찬한 ‘선조수정실록’은 조금 길긴 하다. “재주와 풍도가 있어 일찍부터 훌륭한 명성을 드날려 세상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그러나 천성이 화유(和裕)하고 엄하지 아니하여 권간(權奸)이 용사(用事)할 때를 당하여 이견을 표시하는 바가 없었으므로 사론(士論)이 이를 이유로 가볍게 여겼다. 만년에 다시 등용되어 자주 공격을 받았으나 상의 권고(眷顧)가 쇠하지 아니하여 공명을 누린 채 졸하였다.” 이 또한 졸기(卒記)치고는 그다지 긍정적이라 할 수 없다. 한 마디로 정유길은 시대를 잘못 만난 것이다. 

이한우 미래한국 편집위원·논어등반학교장고려대 영문학과 졸업조선일보 논설위원·문화부장 역임
이한우 미래한국 편집위원·논어등반학교장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조선일보 논설위원·문화부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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