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준 서인 재상 이항복
난세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준 서인 재상 이항복
  • 이한우 미래한국 편집위원·논어등반학교장
  • 승인 2018.05.15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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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명재상을 찾아서

우리에게는 죽마고우인 한음 이덕형(李德馨)과의 기지에 얽힌 많은 이야기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정작 그의 경륜이나 정치적 역정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 점, 대단히 안타까운 대목이다. 그의 정치 역정만 추려내 봐도 숨가쁠 만큼 항복은 격동의 시대를 살아낸 인물이다.

1556년(명종 11년)에 태어난 항복은 9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소년 시절에는 부랑배의 우두머리로서 헛되이 세월을 보냈으나 어머니의 따끔한 가르침이 계기가 돼 학업에 열중했다 한다. 1571년(선조 4년) 어머니를 여의고 3년상을 마친 뒤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힘써 명성이 높았다.

훗날 조선의 대표적 명장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 권율(權慄)의 사위가 됐다. 항복은 정치 노선이 서인(西人)이다. 반대파인 동인(東人)의 수장 대사간 이발(李潑)을 공박하다가 비난을 받고 세 차례나 사직하려 했으나 오히려 선조의 특명으로 옥당(홍문관)에 머문 적도 있었다. 1590년 호조참의가 됐고 얼마 후 조선을 뒤흔든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을 처리한 공로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녹훈됐다.

이듬해 정여립 사건을 주도적으로 처리했던 정철(鄭澈)이 오히려 실각해 논죄를 당하자 사람들은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해 아무도 정철을 찾지 않았다. 그러나 항복은 좌승지의 신분으로 날마다 찾아가 담화를 계속해 정철사건의 처리를 태만히 했다는 공격을 받고 파직됐으나 곧 복직되고 도승지에 발탁됐다.

그만큼 선조의 신임이 컸다. 또 이 때 대간의 공격이 심했으나 대사헌 이원익(李元翼)의 적극적인 비호로 어려움을 넘길 수 있었다. 항복의 진가가 발휘된 것은 오히려 임진왜란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비를 개성까지 무사히 호위하고 또 왕자를 평양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했다.

그동안 이조참판으로 오성군에 봉해졌고, 이어 형조판서로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했다. 곧이어 대사헌 겸 홍문관제학 지경연사 지춘추관사 동지성균관사 세자좌부빈객 병조판서 겸 주사대장(舟師大將)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의금부사 등을 거쳐 의정부 우참찬에 승진됐다. 말 그대로 눈부신 승진이었다.

훗날 신흠(申欽)은 항복의 묘비명에서 이렇게 적었다. ‘공은 무릇 병조판서를 다섯 차례, 이조판서를 한 차례 지냈는데, 마음씀이 바르고 밝아 청탁이 들어오지 않았으며, 사람을 의망하고 발탁할 때 오직 그 재능의 유무만 보며 오로지 공론을 따랐고, 감히 다른 길로 진출시키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관서에 질서가 있고 벼슬길이 맑았으니, 조정이 겨우 모양만 남았어도 사대부(士大夫)들이 그런대로 염치를 알았던 것은 공이 전석(銓席-인사권을 쥔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난세에 빛난 인재

물론 신흠도 같은 서인이긴 했어도 인사의 공정성과 관련된 이 대목은 훗날 항복이 받게 되는 신망을 감안할 때 과장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전란이 한창이던 1598년 항복은 마침내 우의정에 올랐다.

이 때 명나라 사신 정응태(丁應泰)가 동료 사신인 경략(經略) 양호를 무고한 사건이 발생하자, 우의정으로 진주변무사(陳奏辨誣使)가 되어 부사(副使) 이정구(李廷龜)와 함께 명나라에 가서 소임을 마치고 돌아와 토지와 재물 등 많은 상을 받았다.

2년 후인 1600년 영의정에 임명되고 다음 해 호종 1등공신(扈從一等功臣)에 녹훈됐다. 1602년 북인(北人)의 정인홍(鄭仁弘) 문경호(文景虎) 등이 정여립 사건 당시 최영경(崔永慶)을 모함, 살해하려 한 장본인이 성혼(成渾)이라고 발설하자 삼사에서 성혼을 공격했다.

성혼은 서인의 정신적 지주 중 한 사람이다. 이에 성혼을 비호하고 나섰다가 정철의 편당으로 몰려 영의정에서 자진 사퇴했다. 이 점은 항복의 독특한 면모이기도 하다. 정철 때도 그렇고 성혼 때도 그렇고 자신의 당파가 공격을 당할 때는 거침없이 최 일선에 나섰다.

광해군에게 올린 목숨을 건 상소

1608년 다시 좌의정 겸 도체찰사에 제수됐으나 이 해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해 북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북인에게 서인은 정적이었으니 항복으로서는 정치적 시련기에 들어선 것이다. 광해군 초기에 항복은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臨海君)의 살해 음모에 반대하다가 정인홍 일당의 공격을 받고 사의를 표했으나 수리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곧이어 북인 세력이 선조의 장인 김제남(金悌男) 일가의 멸문,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살해 등 흉계를 자행하자 그의 항쟁 또한 극렬해 원망의 표적이 되었다. 그리하여 1613년(광해군 5년) 인재 천거를 잘못했다는 구실로 이들의 공격을 받고 물러나 별장 동강정사(東岡精舍)를 새로 짓고 동강노인(東岡老人)으로 자칭하면서 지냈다.

이 때 광해군은 정인홍 일파의 격렬한 파직 처벌의 요구를 누르고 좌의정에서 중추부로 자리만을 옮기게 했다. 1617년 인목대비 김씨(仁穆大妃金氏)가 서궁(西宮-경운궁. 곧 덕수궁)에 유폐되고, 이어 폐위해 평민으로 만들자는 주장에 맞서 싸우다가 1618년에 관작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같은 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에 등장하는 백사 이항목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에 등장하는 백사 이항목

1617년 폐모론이 거의 결정되려 할 즈음 병중에 있던 항복은 주변 사람의 부축을 받들며 붓을 들어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누가 전하를 위해 이러한 계획을 세웠습니까? 요순(堯舜)의 일이 아니면 임금께 진달하지 않는 것은 옛사람의 명백한 훈계입니다. 우순(虞舜)은 불행하여 사나운 아버지와 미련한 어머니가 항상 순(舜)을 죽이기 위해 우물을 치게 하고서 입구를 막아버렸고, 창고의 지붕을 수리하라 하고서 밑에서 불을 지르는 등 위태롭기가 이를 데 없었는데도 하늘을 향해 통곡하며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을 뿐, 부모가 옳지 않은 점이 있다고 보지는 않았으니, 이는 진정 아비가 아무리 자애롭지 않더라도 자식으로서는 불효를 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춘추(春秋)>의 의리에 자식이 어미를 원수로 여기는 의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바야흐로 효(孝)로써 국가를 다스려야 하는 때를 당하여 온 나라 안이 장차 차츰 교화될 가망이 있는데, 이러한 말이 어찌하여 임금의 귀에 들어갔단 말입니까? 지금의 도(道)는 순의 덕을 본받아 능히 효로써 화해시키고 차차로 다스려서 노여움을 돌려 인자함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어리석은 신의 바람입니다.”

그가 죽은 지 정확히 5년만에 그의 제자들인 최명길 등이 주도한 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은 권좌에서 쫓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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