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왜군을 따른 조선인들(順倭)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임진왜란 이야기....왜군을 따른 조선인들(順倭)
  • 고성혁 미래한국 전문기자
  • 승인 2018.11.30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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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대첩, 행주대첩, 진주대첩은 우리가 알고 있는 임진왜란 3대 대첩(大捷)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일본이 생각하는 3대 승전지는 어디일까? 울산성전투, 벽제관전투, 사천성전투다. 특히 울산성전투는 1598년 1월 정유재란 막바지 5만의 조명(朝明) 연합군에 포위된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1만 3000여 왜군이 거의 전멸직전까지 몰렸던 전투다.

아직도 남아 있는 남해안 일대의 왜성(倭城)

울산성전투는 일본의 종군승(從軍僧) 케이넨(慶念)의 일기에 생생히 기록되었다. 울산성은 가토 기요마사가 축조한 왜성(倭城)이다. 방어망 어느 한 곳이라도 뚫리면 그대로 무너지고 마는 조선의 城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2중 3중의 방어벽으로 말 그대로 철옹성이었다. 게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총애하던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하는 성이었다. 가토 기요마사는 요즘말로 한다면 도요토미의 키즈랄까.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도와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눈부신 활약으로 큰 공을 세웠다. 시즈카타케의 ‘칠본창(七本槍)’이라고 불릴 정도로 전쟁터에서 이골이 난 인물이다.

조명 연합군 5만에 포위된 울산성전투 병풍도/위키피디아
조명 연합군 5만에 포위된 울산성전투 병풍도/위키피디아

그러나 가토의 울산성에도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 성안에는 우물이 없었다. 열흘간의 조명(朝明) 연합군의 포위공격에 식량이 고갈되고 식수까지 끊긴 가토 기요마사 왜군은 거의 탈진했다. 울산성전투 소식을 들은 남해안 일대의 왜군 지원 병력이 울산에 도착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다. 악전고투 끝에 가토는 울산성을 지킬 수 있었다. 현재도 울산에는 왜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일본으로 돌아간 가토 기요마사가 세운 성이 구마모토성이다. 구마모토성은 일본에서도 3대성으로 꼽힌다.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성전투의 교훈을 삼아 구마모토성 안에 무려 120여 개의 우물을 파고, 다다미는 고구마 줄기를 엮어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다음으로는 경남 사천성전투다. 사천성 역시 왜성(倭城)이다. 사천 왜성 일대에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휘하의 왜군 약 7000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1598년 10월 조명 연합군 약 4만 명이 사천성 일대를 공격했지만 결국 패퇴했다. 4만의 조명 연합군 공격을 물리친 시마즈 요시히로의 용맹함은 일본에서도 유명하다. 1600년 세키가하라에서 일본의 패권을 놓고 도요토미 측과 도쿠가와 측이 일대 결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시마즈 요시히로는 도요토미 측에 가담했다. 전투는 하루 만에 도쿠가와 측이 승리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항복을 거부하고 도쿠가와의 포위망을 뚫고 자신의 본진인 가고시마로 돌아갔다. 도요토미 측에 가담한 다이묘는 대부분 영지를 빼앗기거나 가문이 몰락했지만 시마즈 가문만은 자신의 영지를 지킬 수 있었다. 도쿠가와도 시마즈 가문의 용맹함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시마즈 가문의 사쯔마번은 훗날 메이지유신의 본거지가 되어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는 데 선봉장 역할을 했다. 어찌 보면 세키가하라 전투의 복수를 268년 만에 한 셈이다.

벽제관전투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이여송(李如松)이 이끈 명군(明軍)은 평양성전투에서 대포로 왜군을 격파하고 평양성을 탈환했다. 그 여세를 몰아 명군은 패주하는 왜군을 추격했다. 그러나 벽제관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는 이여송의 명군(明軍)을 크게 격파했다. 이여송의 명군은 왜군을 급히 추격하느라고 대포 없이 기병만으로 벽제관에 도착했다. 대포 없는 이여송의 명군은 왜군의 조총 사격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벽제관전투에서 왜군에 크게 당한 이여송은 그 이후부터 전투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은 7년을 이어갔다. 조선 백성의 30%가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7년 동안 조선을 유린했던 왜군은 남해안 일대에 300여 개의 왜성을 축성했다. 지금도 왜성의 흔적은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울산왜성, 서생포 순천왜성, 사천왜성, 진해 웅천 안골왜성 등이다. 그 규모도 작지 않았다. 왜성의 방어력은 조선의 성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견고했다. 이러한 왜성을 단순히 왜군 병력만으로 축성했을까? 절대 아니다. 수많은 조선의 백성이 강제 동원되었다.

가토 기요마사를 따라 다닌 종군승(從軍僧) 게이넨(慶念)의 일기에는 왜성 축성 과정에서 조선 양민들이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는지 그 비참함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인들은 새벽 안개를 헤치고 산에 올라가 하루종일 큰 나무를 베고 밤하늘의 별이 총총할 때에야 겨우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밤을 새워 돌을 쌓아 성을 만들어야 했다. 조금이라도 괴롭고 싫은 표정을 짓는 것만으로도 죄라고 몰아붙여 심하게 질책했다. 목을 쇠사슬로 묶고, 두들겨 패고, 달군 쇠로 몸을 지져댔다. 보기에 곤혹스러울 정도다.’(朝鮮日日記 1597년 11월 11∼16일)

조선으로 돌아오기를 거부했던 순왜(順倭)와 도공(陶工)들

만약 달아나다가 걸리면 참수되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런데 조선 백성 중에는 왜군에 순응하는 이들도 있었다, 왜군에게 저항하지 않고 세금을 꼬박꼬박 바치는 조선 백성을 순왜(順倭)라고 불렀다. 그들은 흔히 말하는 친일파일까? 그렇지는 않다. 왜군에 순응하는 조선 백성이 나오게 된 것 역시 이유가 있다. 왜군에게 저항하지 않고 세금을 꼬박꼬박 바치면 왜군들로부터 재산과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탐관오리에게 가혹한 수탈을 당했던 백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왜군에 순응하는 것이 오히려 낫다고 생각했을지 모를 일이다. 선조실록에 보면 순천에 사는 박사유는 처음부터 왜적에게 붙어 자기 딸을 왜장인 고니시에게 시집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남원의 의병장 조경남이 쓴 임진왜란 때의 야사 난중잡록(亂中雜錄)의 기록은 더 생생하다. 전라도 동복의 생원(生員) 김우추는 관할 지역 왜장에게 아부하는 글까지 보내면서 “누구나 부리면 백성이요, 누구나 섬기면 임금이니 (일본의) 한 호(戶)로 편입돼 성인(聖人)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왜군에 맞서 싸우는 의병의 입장에서 본다면 ‘배신자’이지만 그들 또한 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고 변호할 수도 있지 않을까?

왜란 중 많은 조선 백성이 일본으로 잡혀갔다. 끌려온 조선 백성은 상당수가 노예로 팔리기도 했다. 규슈 곳곳에 지금도 당인정(唐人町) 또는 고려정(高麗町)이라는 마을 이름이 남아 있는데 끌려온 조선 백성의 집단 거주지였다. 조선에서 끌려온 사람들 집단 거주지에는 밤마다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

왜군은 조선 도공을 사로잡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지금으로 말한다면 다도(茶道) 마니아였던 도요토미가 다기(茶器)를 굽는 도공을 잡아오라는 특별 훈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조선에 출병한 다이묘(大名)중에 시마즈(사쯔마 번주)는 많은 도공을 잡아가서 가고시마 근처에 집단 거주지를 만들고 도자기를 굽게 했다. 끌려간 조선 도공은 훗날 일본 도자기가 유럽에 널리 알려지게 하는 일등 공신이다. 일본의 유명한 도자기 장인인 심수관家 역시 이때 끌려간 조선 도공의 후손들이다.

1872년 영국 런던을 방문한 이와쿠라 사절단. 좌로부터 기토 다카요시, 야마 구치 마츠카, 이와쿠라 도모미, 이토 히로부미, 오쿠보 도시미
1872년 영국 런던을 방문한 이와쿠라 사절단. 좌로부터 기토 다카요시, 야마 구치 마츠카, 이와쿠라 도모미, 이토 히로부미, 오쿠보 도시미

조선의 선조임금과 대한민국의 문재인 대통령

도요토미 세력을 몰락시킨 도쿠가와는 조선과의 수교를 원했다. 사명대사는 포로쇄환 협상을 위해 1605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강화사로 갔던 사명대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을 몰락시킨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3000명의 조선인 쇄환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실제로 돌아온 이는 훨씬 적었다. 남녀 합쳐 1418명에 불과했다. 조선인을 빼돌린 일본 다이묘들의 불성실한 태도도 있었지만 조선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한 조선인들도 있었다. 일본 다이묘들은 조선의 도자기 장인들에게는 특별대우를 했다. 도공들 입장에서는 천시 받던 조선보다 대접받는 일본이 더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은 부산포에 상륙한 지 보름 만에 서울을 함락시켰다. 이 때문에 명나라는 조선을 의심했다. 조선이 일본을 도와 명나라를 치는 데 길을 내주는 것 아닌지 말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왜 그랬을까? 이 모든 책임은 한 인물에 귀속될 수 있다. 바로 조선의 임금 선조다. 국가의 위기는 지도력의 위기에서 초래하기 때문이다. 선조는 중종의 서자였던 덕흥군의 셋째 아들이었다. 선조는 자신의 출신에 대해 일종의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선조의 콤플렉스는 끊임없는 당쟁의 소용돌이의 원천이었다. 왕권을 보존하기 위해 임금인 선조는 신하들을 분열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이나 현재의 대한민국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외적(外敵)이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조선 조정은 동인(東人), 서인(西人)으로 분열되어 치열한 당쟁만 일삼았다. 문관 우대정책으로 인해서 무관은 천대받기 일쑤였다. 군대도 유명무실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실제 동원 가능한 병력은 거의 없었다. 장졸(將卒)은 장부에 기록된 숫자에 불과했다. 오죽하면 자기들끼리 싸우는 데는 귀신, 외적에 맞서 싸우는 데는 등신이라는 말이 나올까?

현재 우리 군도 보면 문재인 정부의 적폐몰이 정책에 제대로 숨도 못 쉬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마당에 전쟁이라도 난다면 제대로 싸울 수 있을지 심히 걱정될 뿐이다. 국민통합은 뒷전이고 끊임없는 적폐몰이 정치는 현재진행형이다. 마치 조선의 선조 임금을 보는 듯하다. 그런 선조가 무려 40년간 왕위에 있었으니 조선에 망조(亡兆)가 안 들었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조선의 위정자에 진절 넌더리가 난 백성 중에 왜군을 따르는 순왜(順倭)가 나온 것은 어찌 보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19세기 서양문물이 동양으로 밀물처럼 몰려들었을 때 일본은 기민하게 대처했다. 이와쿠라토모미(岩倉具視)를 단장으로 수행원과 유학생을 포함하여 106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사절단(1871~1873년)이었다.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독일, 네덜란드 등 구미제국을 2년에 걸쳐 돌아보고 일본 근대화의 방향과 기틀을 다지는 계기를 다졌다. 이와쿠라 사절단에는 메이지유신의 핵심세력인 기도 타카요시(木戶孝允),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등도 있었다.

역사를 잊으면 그 민족은 망한다고?

미국 페리제독에 의해 개항된 일본이지만 이와쿠라 사절단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나라는 독일이었다. 특히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 된 일본 군사제도는 독일 영향을 그대로 받았다. 이와쿠라사절단은 1873년 3월 11일 독일 빌헬름 황제를 알현하고, 철혈 재상인 비스마르크 수상도 만났다. 비스마르크는 이와쿠라사절단에게 근대 일본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매우 실효성 있는 조언을 했다.

“세계 각국은 모두 친목, 예의로 서로 사귄다고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표면상의 것으로 내면은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고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깔보는 것이 실정인 것이다. 이른바 공법(公法 : 國際公法)이란 것은 열강의 권리를 보전하는 불변의 도라고는 하지만, 대국이 이익을 다툴 경우 자국에 이익이 되면 공법을 고집하지만, 일단 불리해지면 그 태도를 바꿔 군사력을 동원한다. 따라서 공법(公法)은 항상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이와쿠니사절단은 ‘국제관계의 본질은 이중적이며, 결국에는 <힘>이다’라는 비스마르크의 솔직한 조언에 크게 충격을 받았다. 즉 자국의 이익이 첨예하게 걸릴 경우에는 최종적으로는 군사력이 좌우한다는 매우 현실적인 방향 제시였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제 역학에서는 불변의 진리다. 일본은 비스마르크의 조언을 그대로 따랐다. 세계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메이지유신의 일본은 그렇게 성공했다. 반면 시대의 흐름에 역행한 조선은 망했다.

임진왜란 때 용인전투, 병자호란 때 쌍령전투, 6·25전쟁 때 현리전투는 우리 역사에 씻을 수 없는 패전의 기록이다. 대병력이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적의 소수병력에게 붕괴되다시피 했다. 역사를 잊으면 그 민족은 망한다는 말이 있다. 맞다. 정확하다. 그래서 조선은 망했다. 임진왜란의 교훈도 되새기지 못하고 병자호란을 맞았고 결국 구한말 또 다시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다.

지금은 달라졌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6·25전쟁의 교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김정은의 말이라면 벌벌 긴다. 문재인 정부는 남북군사합의서라는 미명하에 김정은의 말만 믿고 DMZ의 GP를 폭파 철거하고 있다. 한·미·일 동맹은 금간 지 오래다. 시진핑과의 회담에서는 중국의 대외정책인 일대일로 사업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했다. 미국 보고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경제는 고꾸라지고 있고 국론 분열은 가속화 되고 있다. 역사를 잊으면 그 민족은 망한다면 우리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매번 패전의 역사를 잊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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