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영화 나랏말싸미와 김진명 소설 직지(直指)
[비평] 영화 나랏말싸미와 김진명 소설 직지(直指)
  •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 승인 2019.08.23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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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와 지식을 권력으로 독점했던 시대, 모든 신하들의 반대에 무릅쓰고, 훈민정음을 창제했던 세종의 마지막 8년’. 세종의 한글 창제를 다룬 영화 ‘나랏말싸미’의 홍보 글이다. 마치 권력이 독점하고 있던 문자와 지식을 백성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세종이 한글을 창제했다는 식이다. 과연 그럴까?

1446년 9월 29일 반포된 훈민정음은 ‘바람소리와 학 울음, 닭 울음소리나 개 짖는 소리까지 모두 표현해 쓸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단순하고 효율적인 문자였다. 당시 조선은 전(前) 왕조 고려가 물려준 금속활자도 이미 보유하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35년이 지나도록 책다운 책은 나온 것이 없고, 겨우 1481년에 두보의 시를 번역한 ‘두시언해’와 ‘사서언해(四書諺解)’가 나왔다. 그러나 이 책들은 ‘한국어로 번역한’ 중국책이 아니라, 한문은 그대로 둔 채 한국어 어순으로 한문을 정렬하고 거기에 한글로 조사를 다는 수준이었다. 예컨대 영어를 처음 배우는 아이에게 ‘I go to school’을 ‘I school에 go’라고 써주는 식이었다. 여하튼 한자를 모르는 백성은 읽을 수 없는, 사대부 자제의 과거시험 전용 교과서였다.

일반 백성을 위한 한글 책이 나온 것은 한글 창제 44년이 지난 1490년 성종 때였다. 효자, 충신, 열녀 각 35명을 그림과 한자, 그리고 언문으로 소개한 책이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들어 익히 알고 있는, ‘새끼손가락 잘라 피를 먹여 아비 살린 아들’이나 ‘절개를 지키기 위해 자결한 아녀자’ 이야기가 모두 이 책에 들어 있다. 사림파가 권력을 잡았던 중종 때는 한 번에 2940질을 인쇄해 전국에 뿌렸다.

조선시대에 나온 책들은 모두 성리학적 윤리를 담은 한문책들이었고, 이 책들의 편찬과 출판 그리고 유통을 모두 국가에서 독점했다. 유학자에게 필요한 책은 국가에서 금속활자나 목판으로 찍어 ‘나눠줬다’. 공식적으로 책을 사고파는 민간 서점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리 책이라 하더라도 물건을 사고 파는 행위는 성리학에 반하는 상업 행위였으므로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저작권 논란에 휩싸인 영화 ‘나랏말싸미’. 극장 포스터. 끊임없이 조선 시대를 미화하는 영화와 소설의 확산은 아무래도 우리 사회의 발전을 가로 막는 장애물들이다.
저작권 논란에 휩싸인 영화 ‘나랏말싸미’. 극장 포스터. 끊임없이 조선 시대를 미화하는 영화와 소설의 확산은 아무래도 우리 사회의 발전을 가로 막는 장애물들이다.

조선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했던 한글

그러나 농서(農書)와 의서(醫書)는 언해본이 있었다. 성리학적 세계를 지탱하는 농업을 진흥하고, 그 종사자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백성은 충성과 효도만 배우면 되었지, 성리학이니 사서삼경까지는 알 필요가 없다는 지배층 사고의 반영이었다. 지배층의 문자는 한문이고, 일반 백성의 문자는 언문이었다. 그러나 언문으로 쓰인 책이 없는데, 언문을 굳이 배울 필요가 어디 있으며, 또 먹고 살기 바쁜데, 무슨 시간에 언문을 배울 것인가? 언문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고려시대인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된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이다. 서양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가 1455년에 간행되었으니, 서양보다 무려 78년이나 앞선 것이다. 한국인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것이라며, 한국인들은 입을 모아 자랑한다. 우리가 세계적으로 앞서 있는데, 서양인들이 그 사실을 숨기고 있다고 과도한 정신승리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기술적 발명품이란 그것이 인류의 보편적 복지(well-being)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여부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된다. 한 번 우연히 발명된 기계가 아무런 복지의 확산 없이 그대로 사라졌다면, 그것은 신기한 현상에 불과한 것이지, 유의미한 인류의 자산에 편입될 수는 없다.

소설가 김진명이 새 장편소설 ‘직지’를 출간했다고 한다. 구텐베르크 금속활자가 유럽의 발명품이 아니라 직지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훈민정음이 창제되었지만 성리학적 지배질서 속에서 지배층은 계속 한문을 썼다.
훈민정음이 창제되었지만 성리학적 지배질서 속에서 지배층은 계속 한문을 썼다.

문화는 발명이 아니라, 향유가 생명

대장장이 구텐베르크는 1439년에 금속활자를 발명했다. 그리고 수 십 년 안에 유럽 전체에 어마어마한 인쇄 열풍이 불었다. 15세기 말까지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 벨기에, 스위스, 영국, 보헤미아, 폴란드 등의 110개 도시에 인쇄 공장이 들어섰다. 성경책이 전 유럽에 보급되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1518~1520년 사이에 30만 부가 팔려 나갔다. 철학자 에라스무스(1469~1536)의 저서는 그의 생전에 이미 유럽 전역에서 75만 부가 팔렸다. 최초로 신문도 생겨났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서구의 종교개혁을 촉발했고, 과학혁명을 야기했으며, 모든 사람이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지식의 민주화를 이뤘다. 이때부터 저자의 중요성도 부각되었다. 구텐베르크 이전의 책들에서는 저자가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파리의 인쇄본과 볼로냐의 인쇄본이 같지 않았으므로 저자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똑같은 내용이 수 십 만권의 책에 똑같이 인쇄되는 시대가 오자 이제는 출판사가 아니라 저자의 이름이 중요하게 되었다.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도서출판 기파랑 주간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도서출판 기파랑 주간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라틴어의 몰락도 재촉했다. 현지어로 손쉽게 찍어낸 책들이 많이 팔리게 되자 일반 대중은 굳이 라틴어를 하지 않아도 지식을 흡수할 수 있게 되었다. 일부 극소수층의 라틴어 독자가 아니라 광범위한 독자층을 상대로 하는 것이 인쇄사업의 수익에도 좋았으므로 독일어, 프랑스어 등 현대어로 된 책들이 광범위하게 인쇄되고 팔렸다. 자연스럽게 라틴어는 쇠퇴하고, 현지의 현대어가 발전하면서 고전 문학이 아니라 당대의 문학이 발전하게 되었다.

지배층은 한문을 쓰고 일반 민중은 언문을 쓰면서, 그것도 책의 출판과 유통을 국가가 엄격하게 통제한 나라에서, 아무런 사회적, 문화적 변화도 야기하지 못한 채 일회성으로 끝난 금속활자의 발명 또는 한글 창제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제 와서 편리하게 쓰고 있으니 고맙다는 정도의 인식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끊임없이 조선시대를 미화하는 영화와 소설의 확산은 아무래도 우리 사회의 발전을 가로 막는 장애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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