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한국 - 월드뷰 공동기획] 아버지
[미래한국 - 월드뷰 공동기획] 아버지
  • 김민성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20.06.09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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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경 소설가

아버지의 시술은 아침 7시로 예정되어 있었다. 나는 5시 30분 집을 나섰다. 9003번을 타고 종로 2가에서 내려 병원 셔틀버스로 갈아타면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한 달째 병원에 계시면서 병원에서의 하루를 1년처럼 지루해하며 힘들어하는 아버지께 시술하러 들어가기 전 두 손을 꼭 잡아드리고 내일은 반드시 집에 모셔다드리겠다고 약속할 참이었다.

병원에 계시는 내내 당신은 절대로 수술이든 시술이든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셨다. 그리고 날마다 집에 데려다 달라고 어린아이처럼 보채셨다.

“딸내미, 아빠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부탁이야. 나 좀 집으로 데려다줘.”

한껏 불쌍한 눈으로 애원하시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정말 내게 무엇을 부탁한 적이 없었다. 부모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할 법한 성적을 올려보라거나, 좋은 대학에 들어가라거나 하는 등의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는 늘 우리에게 장하다고 말씀하셨다. 심지어 학교에 불평 없이 등교하는 것만도 대단하다 하셨다. 본인은 소학교 때 거의 매일 머슴 등에 업혀 학교에 갔노라며.

처음 부탁이라고 해도 무작정 집으로 모셔갈 수는 없었다. 오늘 시술만 잘 견디면 집에 갈 수 있고, 곧 비행기 타고 사위가 보내주는 여행도 가실 수 있다고 오늘은 확실히 약속해드려야지, 그렇게 생각하자 새벽어둠을 뚫고 거침없이 달리는 버스 안에서도 마음이 조급해졌다. 시계를 보니 5시 50분이었다.

새벽에 남편은 잠자리에서 눈을 뜨자마자 말했다.

“이상한 꿈을 꾸었어. 장인어른이 비행기를 타고 어딘가를 가시는데 밤새 내가 그 수속을 해드렸네.”

“그래서 비행기는 타셨어?”

“응. 보내드리고 지금 깼어.”

“좋은 꿈 같아. 오늘 아빠 시술 잘되고 비행기 타고 여행도 가시는 꿈이네.”

아버지 발뒤꿈치에 작은 반점이 나타난 것은 한 달 전이었다. 모기에 물린 줄 알았는데 1주일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고 조금씩 커진다고, 내가 전화 드리자 엄마가 대신 말씀하셨다. 당시 나는 날마다 한 번씩 엄마와 통화했는데 왜 바로 말하지 않았냐고 다그치자 엄마도 전날에야 아버지가 말씀하셔서 알았다고 했다.

지금 당장 함께 병원에 가시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안 그러면 내가 달려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평소에 자신을 늘 ‘강철 같은 사나이’라고 호언장담하셨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는 주사와 병원을 끔찍이 무서워하는 겁쟁이셨다. 치과에 가기 싫어 이가 다 망가질 때까지 숨기고 버틴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웬만큼 아파서는 아예 내색도 하지 않았다. 다 주사가 무섭고 병원에 가기 싫어서였다.

아버지의 병은 당뇨로 인한 말초혈관의 막힘이 원인이었다. 바로 입원하고, 치료받고, 나중엔 발목에 기계를 부착하고 혈액을 뽑아내는 시도도 했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모기 물린 자리만 하던 발뒤꿈치의 상처는 이제 500원짜리 동전만 하게 커져 있었고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모두 당뇨발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의사는 마지막으로 혈관 확장 시술을 권했고, 아버지의 의견과 상관없이 우리 가족은 모두 그 시술을 당연히 받겠다고 결정했다. 어젯밤에야 내일 이러이러한 간단한 시술을 할 거예요, 라고 말하자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셨다고 오빠가 전했다.
 

간단한 시술

시술실로 가시기 전에 화도 좀 풀어드려야지, 하는 생각을 하자 마음은 더 초조해졌다. 자꾸 시계를 보았다. 6시 10분. 막 병원 셔틀버스로 갈아탔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였다. 엄마도 지금 병원으로 가고 있는데 할 수 있으면 빨리 병원으로 가보라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병원까지 채 10분이 걸리지 않는 셔틀버스에서 나는 일어나 뛰고 싶었다.

숨이 턱에 차게 뛰어 아버지가 계신 병실에 들어서자 아버지 침대 주위로 하얀 가운의 사람들이 서넛 둘러서 있었다. 한 사람이 아빠의 가슴을 두 손으로 규칙적으로 누르고 있었다. 응급처치였다. 나는 사람을 제치고 아버지 머리맡으로 다가가 눈을 감고 계신 아버지를 보며 무슨 일인지 물었다. 새벽 6시 간호사가 혈압을 체크하러 왔을 때 아버지가 숨을 쉬지 않고 계셨단다. 당시 남자 간병인이 옆에 있었는데 그분도 자고 있었다고 했다.

“아빠! 아빠! 아빠! 내 소리 안 들려? 아빠! 눈 떠봐! 아빠! 눈 떠봐!”

의사는 교대로 심폐소생술을 계속했고, 나는 아버지의 머리를 만지며 귀에 대고 계속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의 몸은 따뜻했다. 가쁜 숨도 채 가라앉히지 못하고 헉헉대며 절규하듯 자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를 들으면 아버지는 당연히 눈을 떠야 했다. 내게 집으로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던 전날의 아버지보다 더 애원하며 나는 아버지를 불렀다. 의사 한 사람이 내 손을 잡아 밖으로 끌었다.

“이제 결정을 해 주셔야 합니다. 현재 심폐소생술 30분 짼데, 더 계속하면 갈비뼈가 상하실 수도 있습니다.”

간호사실에 걸린 커다란 시계가 6시 35분을 지나고 있었다.

“아니요. 계속해주세요! 그럴 수 없어요.”

나는 단호하게 말하고 다시 병실로 들어가 아버지를 불렀다. 그러나 잠시 후 아버지의 가슴을 누르던 의사가 동작을 멈추고 모두 바르게 서더니 한 사람이 “○○○님, ○시 ○분에 사망하셨습니다”라고 선언했다. 그 선언을 듣는 아버지의 얼굴은 평소 주무시는 것처럼 너무도 평온해 보였다.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갑자기 내 앞에 두께가 1미터도 넘는 무쇠 철판이 아버지와 나 사이를 가로막아버린 것 같았다. 내 힘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고, 뚫을 수도 없는 절대적인 가로막힘. 그 순간 세상의 무엇을 주어도 아버지의 호흡을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명백한 절망감이 나를 압도했다.

“아빠! 아니지, 이건 아니지!!!”

내가 소리치자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꽉 잡았다. 오빠였다. 엄마도 보였다. 뒤늦게 도착한 오빠가 심폐소생술을 그만하라고 말했고, 엄마도 승낙했다고 오빠가 내 귀에 말했다. 의사들이 아버지를 향해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뜨자 간호사가 새 시트를 가지고 와 아버지의 몸을 목까지 감싸듯 단정하게 덮어주었다. 잠시 뵈라고 말한 것 같았다.

아!!! 나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니지! 이건 아니지! 아빠! 이건 진짜 아니지!”

누군가 소리 지르는 나를 복도로 끌고 갔고, 나는 복도 바닥에 뒹굴며 울었다. 아무리 멈춰보려고 해도 나의 울부짖음은 제어되지 않았다.

“보호자님, 이러시면 큰일 납니다. 제발 진정하세요.”

간호사가 나를 간호실 옆방으로 부축해 가 물을 먹여주고 간이침대에 눕혀주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손과 발 얼굴 온몸이 저리고 힘이 빠졌다. 속이 메스껍고 어지러웠다. 땅속으로 연기처럼 스며들 것 같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더 이상 숨이 돌아오지 않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매우 다정다감한 분이셨다. “나는 우리 딸내미가 세상에서 최고로 좋아요!” 이런 표현을 서슴지 않고 기회만 되면 말하는 아버지가 나는 왠지 좀 헤픈 사람처럼 생각되었다.

내가 어쩌다 글을 쓰고 작가가 되고, 어느 날 상을 타서 상금의 십 분의 일을 드리자 아버지는 크게 기뻐하셨다. 심지어는 단골 식당에 갔을 때 식당 주인에게까지 큰소리로 자랑해서 나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아버지는 내가 전화를 드리면 언제나 “오! 우리 작가님!”이라고 나를 부르셨다. 나는 또 그것이 매번 쑥스러워 “아! 아빠, 제발 좀…” 하며 말을 막곤 했다. 그런 아버지에게 나는 한 번도 “아빠, 사랑해요”라든가, “난 아빠가 좋아요”라는 표현을 해 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나의 세 딸에게도 만날 때마다 엄지손가락을 힘껏 들어 올리며 “나는 ○○가 최고로 예뻐요.”, “나는 ○○를 이 세상에서 최고로 좋아해요.” 말하시곤 호주머니를 털어 용돈을 주셨다. 내 딸들도 나를 닮아 비위가 없어 “할아버지! 사랑해요.”, “난 할아버지가 좋아요”라는 표현을 하지 못했다.

어느 핸가 세 딸과 함께 여름휴가를 가는 차 안에서 할아버지 얘기가 나왔을 때 딸들은 할아버지의 마술 실체를 언제 알았는지 서로 물었다. “아, 난 그거 단번에 알았지. 그냥 속아 드린 거야.” “너도 그랬어? 나도 그랬는데.” 할아버지는 장지에 흰 테이프를 감고 검지와 장지를 펴 보여주며 “봐라, 지금 테이프 있는 이 손가락이 오른쪽에 있지? 그런데 잘 봐요! 으샤또!!!” 기압과 함께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내리며 검지와 약지를 바꿨다.

“봐! 테이프 감은 손이 왼쪽으로 왔지?” 와아!!! 마술에 성공했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딸들보다 더 크게 웃으시며 좋아하셨다. 빈약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의 유일한 마술에 딸들도 까르르 웃어주곤 했는데 알고 보니 다 속아 드렸던 것이다.

“그래도 할아버지 너무 좋아!”, “나도!”, “나도!”

딸들은 진심으로 할아버지를 좋아했다.

그러나 나는 술과 담배를 즐기고, 만인에게 턱없이 친절한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우리 집을 방문하는 야쿠르트 아줌마, 경비실 직원, 세탁소 아저씨 등 누구라도 그냥 보내지 않았다. 식사 중이면 식탁으로 이끌어 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음료수라도 한 잔 대접해야 했다.

아버지는 지하철 입구나 육교에서 양말 같은 잡동사니를 파는 몸이 불편하신 분들이나, 길바닥에서 보자기를 펴놓고 채소를 파는 할머니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셨다. 필요 없는 물건인 줄 알면서 사고, 볼품없고 시든 채소도 팔아드리기 위해 사셨다. 4천 원을 달라 하면 부러 5천 원짜리를 내고 거스름돈은 박카스 사서 드세요, 하면서 인심을 쓰고, 택시에서 내리면서 작은 거스름돈은 괜찮습니다, 하고 내리셨다. 나는 아버지의 이런 허세가 당신의 대학 시절까지 호남평야 만석꾼의 아들로 살았던 삶의 허황한 잔재라고 여겼다.
 

아버지의 마술

6·25 전쟁을 기점으로 몰락한 아버지 집안의 가세는 다시 부흥하지 못했고, 아버지 슬하에 태어난 우리 네 자녀는 고모들이 들려주는 할아버지의 부와 영화에 관한 이야기에 속만 상했다. 소시민으로 전락한 아버지는 꿈을 꾸고 사시는 분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별다른 꿈같은 것을 가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감당도 되지 않는 술을 그리 즐겨할 수는 없었다. 나는 특히 술 마신 아버지가 싫었다.

아버지의 주사는 가족을 둥글게 앉혀 놓고 노래 부르기였는데, 아버지 혼자 술에 취해 흥에 겨워 노래 부르시는 모습을 나머지 가족이 맨정신으로 바라보는 것은 고역이었다. 그리곤 다 함께 노래 부르기를 권했다. 아버지의 주사에 익숙해진 우리는 계단에서 아버지의 노랫소리가 들리면 바닷게가 구멍을 찾아 숨듯 후다닥 제 방으로 들어가 이불 속으로 숨었다.

그리곤 세상에서 세 번째로 좋아하는 것이 담배라니!

엄마 옆에서 잠들었다가 새벽에 눈을 뜬 아침, 나는 어둠 속에서 빨갛게 타오르는 작은 불빛을 보았다. 아버지가 잠자리에 엎드린 채 태우는 담뱃불이었다. 그것은 숨을 들이마실 때 붉은 꽃처럼 환히 타올랐다가 슬그머니 스러지기를 반복했다. 불꽃이 환할 때 잠시 드러나는 아버지의 옆얼굴을 보며 나는 아버지가 담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빠는 이 세상에서 엄마 최고로 좋아하고, 그다음에 딸내미 최고로 좋아하고, 그다음엔 담배지!”

나약한 심성의 아버지는 당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현실에서 어떤 꿈도 꾸지 않으며 술과 담배를 벗 삼아 도피한 것은 아닌가 하는 짐작에 나는 아버지를 좋아하지도 존경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병원에 들어오면서 바로 압수당한 담배 때문에 아버지의 병원 생활은 훨씬 더 힘드셨다. 간병인 아저씨께 시도 때도 없이 돈을 내밀며 담배 한 갑만 사다 달라고 조르셨다고 한다.

정신을 차리고 간호사실을 나오자 복도 의자에 넋 나간 듯 앉아 있는 아버지의 간병인이 보였다. 나는 아저씨 옆에 앉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깜빡 잠이 들어서…”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젓고 말없이 앉아 있다가 물었다.

“혹시 어젯밤에 우리 아버지가 무슨 하신 말씀은 없으세요?”

우리는 아무도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유언 한마디 듣지 못했다. 그래서 혹시나 하여 물었다.

“별다른 말씀은 없었고요. 할아버지께서 10시쯤 주무셨는데 12시경 깨셔서 당신을 태우러 남녘에서 비행기가 오기로 했는데 지금 밖에 와 있는지 나가보라고 하셨어요.”

“비행기요?”

“예. 제가 그래서 지금 남쪽 지방이 비가 많이 내려 비행기가 못 뜬 것 같다고 말씀드렸는데, 또 2시쯤 다시 깨셔서 비행기가 왔는지 나가보라고 하셨어요. 제가 일부러 나갔다가 들어가 아직 안 왔다고, 비행기가 오면 깨워 드릴 테니 우선 주무시라고 하니까 주무신 게…”

훗날 엄마에게 남편의 비행기 꿈과 간병인 아저씨의 비행기 말씀을 전해드렸다.

“고맙구나. 이 서방이 애를 써서 네 아버지를 천국에 보내드렸구나.”

그러시더니 다음날 전화하셔서 조금은 부러워하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야! 그런데 네 아빠는 천국도 비행기로 가셨나 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되었다.

나는 아무래도 아버지만큼 잘살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지금도 집안 간의 애경사가 있어 참석하면 친척분들은 나를 보며 이구동성으로 말씀하신다. ‘네가 아버지 모습 빼다 박았구나.’ ‘네 아버지같이 멋진 분은 없었다.’ ‘세상에 정말 호인이셨지.’ ‘우리는 네 아버지를 정말 좋아했어.’

날이 갈수록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난다. 나도 아빠를 사랑한다고 한 번만 말해드릴걸…. 그 소리를 들었을 때 천하를 다 가진 것처럼 웃으셨을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엊그제 지방에 내려가 택시를 타고 내리며 나도 모르게 말했다.

“기사님, 잔돈은 괜찮습니다.”

조혜경 소설가

2004년 한국소설 신인상으로 등단, 토지문학제 평사리 문학대상(2004), 기독신춘문예대상(2006)수상
저서 <꿈꾸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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