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 있는 여행] 야수파 예술가들의 중심지, 휴양지  ‘프렌치 리비에라’
[예술이 있는 여행] 야수파 예술가들의 중심지, 휴양지  ‘프렌치 리비에라’
  • 김철기  여행작가
  • 승인 2023.09.04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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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로 가장 추천하고 싶은 곳이 어디인가요? 가끔 이런 곤란한 질문을 받습니다. 많은 유명 관광지들은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만큼 저마다의 매력이 있습니다. 아직 여행지들의 매력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것도 대답을 망설이게 되는 이유입니다. 추천하고 싶은 남프랑스도 수십번을 더 다녀온 후에야 제가 남프랑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프랑스 남동쪽 모서리의 지중해 해안선은 코트 다쥐르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보다는 프렌치 리비에라가 우리에게는 약간 더 익숙하지요? 하지만 리비에라는 이탈리아의 고대 리구리안의 영토에서 유래한 이탈리아어 입니다. 코트 다쥐르는 1860년 프랑스가 니스를 합병한 후 프랑스가 니스 백작령을 부르는 명칭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남프랑스의 대표 도시 니스 시내에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 주세페 가리발디 동상이 서 있는 것이 어색하지 않게 이해가 된다면 유럽여행을 다닐 만한 기본 역사공부가 되어 있는 셈이지요. 

이탈리아 국경을 넘기 전 코트 다쥐르의 마지막 도시인 망통은 오렌지 축제로 유명합니다. 

산악지형이 바다에 빠져 생긴 리아스식 해안인, 프렌치 리비에라는 툴롱에서 망통까지를 이르게 됩니다. 오렌지 축제로 유명한 망통, 그레이스 켈리의 결혼식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한 모나코, 카프다일, 볼리외쉬르메르, 생장카프페라, 빌 프랑슈쉬르메르, 피카소의 박물관이 있는 앙티브, 주앙레팡, 영화제가 열리는 칸, 생 라파엘, 프레쥐, 생트 막심, 생트로페 등 많은 해변 휴양지가 있습니다.

산위의 중세 마을 에즈, 샤갈의 무덤이 있는 생폴드방스, 향수의 도시 그라스와 같은 마을들은 해변의 휴양지들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프렌치 리비에라가 끝나는 곳에 있는 마르세유, 고흐가 살았던 아를, 세잔의 아틀리에가 있는 엑상프로방스, 연극제로 유명한 아비뇽은 남프랑스의 또 다른 매력입니다. 

프렌치 리비에라의 대표 휴양지 볼리외쉬르메르
프렌치 리비에라의 대표 휴양지 볼리외쉬르메르

프렌치 리비에라는 유럽 귀족의 휴양지

프렌치 리비에라는 최초의 현대적인 휴양지였습니다. 18세기 말 영국 상류층의 겨울 휴양지로 시작되어, 19세기 중반에 철도가 도래하면서 빅토리아 여왕, 알렉산드르 2세 차르를 앞세운 영국, 러시아를 필두로 유럽 귀족들의 휴양지가 되었습니다. 

20세기 전반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샤갈, 르누아르 등의 예술가들은 지중해의 강렬한 태양을 찾아 모여들었고, 예술과 낭만으로 가득한 남프랑스는 모든 여행객들의 꿈의 여행지가 되었습니다. 엘튼 존과 같은 많은 유명인들이 이 지역에 집을 가지고 있고, 남프랑스는 인기 있는 관광지이자 컨벤션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중에 야수파를 탄생시킨 작은 해변 마을 콜리우르를 살펴볼까요? 마르세유에서 지중해를 따라 바르셀로나로 가는 길 위에 멋진 요새를 가진 마을입니다. 파스텔톤의 건물 지붕들이 보이는 작은 포구 콜리우르는 언덕으로 둘러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언덕은 계단식 포도밭으로 가득합니다. 콜리우르와 주변 마을은 무베드르와 시라 품종으로 만드는 드라이 레드 와인을 중심으로 다양한 와인과 디저트 와인을 생산합니다. 콜리우르는 멸치도 유명하여 프랑스 최고의 엔초비를 생산하며 한때 어업이 크게 번성했습니다. 

콜리우르는 인구 3000여 명에 불과하고 웬만한 곳은 걸어 다닐 수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이 곳의 강렬한 태양은 많은 예술가들을 매혹시켰고 야수파라는 새로운 예술사조가 이 작은 마을에서 탄생하게 됩니다. 그 중심에는 앙리 마티스가 있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인상주의가 태동하고 있을 무렵 앙리 마티스는 색채 화가로의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클로드 모네, 반 고흐, 폴 세잔등에게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파리에서 활동하던 마티스는 1905년 콜리우르에 정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섞지 않은 그대로의 색으로 그림을 그리는 마티스의 스타일이 시작됩니다. 콜리우르는 예술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여러 야수파 예술가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습니다. 

파스텔톤의 건물 지붕들이 보이는 콜리우르는 계단식 포도밭으로 유명하다.
파스텔톤의 건물 지붕들이 보이는 콜리우르는 계단식 포도밭으로 유명하다.

​마티스는 이곳에 정착한 후 친구였던 앙드레 드랭을 초대했습니다. 둘은 이곳에서 여름을 함께 보내면서 자신들의 스타일과 테크닉을 숙성시켰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작업한 작품들을 파리 그랑팔레 가을 살롱 전에 내놓습니다.

강렬한 색들로 표현된 그림들을 비평가들은 사나운 짐승들의 울부짖음을 방불케 하는 색채의 소용돌이 같다고 혹평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야수파가 유래하게 됩니다. 섞지 않은 원색으로 표현하면서 ‘색의 마술사’로 불린 야수파는 지중해의 태양과 바람을 타고 콜리우르에서 탄생합니다. 

7세기부터 요새화 된 마을이 있는 콜리우르

‘콜리우르의 지붕’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야수파는 인상파에서 벗어난 새로운 사조로 짧게 단명했지만 마티스는 순수한 색채에 대한 실험으로 남아 있습니다. 야수파의 탄생을 알린 콜리우르의 지붕은 마티스의 화려한 색과 함께 살아 있습니다. “마치 아이가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평생토록 그렇게 볼 수 있어야 한다” 

​​빛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자연의 색채를 그대로 화폭에 담기 위해 노력하던 인상주의 화풍에 맞서 섞이지 않은 원색 그대로 강렬한 색들의 도입은 훗날 후기 인상주의와 독일의 표현주의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피카소와 샤갈을 필두로 많은 예술가들이 마을을 찾아왔고, 3000명이 사는 작은 마을에 갤러리들이 가득하고 매년 예술 축제도 열리고 있습니다. 조르주 브라크,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등은 모두 콜리우르의 요새와, 중세 거리, 등대가 있는 교회로 개조된 곳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앙리 마티스, '모자를 쓴 여인 ( F emme a uchapeau)', 1905년, 캔버스에 유채, 샌프란시스코현대미술관 소장
앙리 마티스, '모자를 쓴 여인 ( F emme a uchapeau)', 1905년, 캔버스에 유채, 샌프란시스코현대미술관 소장

같은 해 콜리우르에서 자신의 부인을 모델로 그린 모자를 쓴 여인도 파리 살롱전에 출품하였습니다. 부인 아멜리를 원색으로 그렸습니다. 원근법을 무시하고 색과 형태에 집중한 시도였습니다. 완성되지 않은 느낌을 주는 헐렁한 브러시 작업을 통해 표현력 있는 붓질을 찾아낸 마티스는 생생한 색감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콜리우르에는 7세기에 이미 요새화 된 마을이 있었습니다. 1172년 루시용의 마지막 백작 지라르 2세가 사망하자 이 도시는 바르셀로나 백작이자 아라곤의 왕인 아라곤의 알폰소 2세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1207년 아라곤의 피터 2세가 성전기사단의 카탈루냐 지역 사령관이던 풀크에게 콜리우르의 요새를 건설하도록 했습니다. 오랜 세월에 걸친 작업으로, 방어벽과 급경사면이 있는 콜리우르성은 완성되어 갔습니다. 점차 모든 거주지를 요새 양쪽에 있는 두 개의 만 쪽으로 끌어안는 성채로 통합되어, 여러 건물이 서로 얽혀 있는 기념물이 탄생되었습니다. 

콜리우르는 1642년 프랑스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습니다. 콜리우르는 1659년 피레네 조약에 의해 공식적으로 프랑스에 편입됩니다. 또한 콜리우르의 전략적인 중요성으로 인해 도시의 요새는 루이 14세의 통치 기간 동안 군사 기술자 부방에 의해 개선되었습니다. 프랑스가 된 지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카탈루냐 문화가 강합니다. 매년 8월 15일 경에 열리는 음악과 불꽃 놀이 중심의 세인트 빈센트 축제는 인기가 있어 많은 방문객이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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