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세계] 1차 세계대전 속에 파괴된 인간의 실존적 내면을 표현한 독일 표현주의
[예술 세계] 1차 세계대전 속에 파괴된 인간의 실존적 내면을 표현한 독일 표현주의
  • 오재학 전 주호치민 총영사
  • 승인 2024.01.15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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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말과 글, 동작에 의한 표현의 연속입니다. 마음에 품은 생각을 밖으로 나타내야 능력이 생깁니다. 표현할 때 깨달음과 에너지가 되고 울림과 감동을 줍니다. 표현은 미래를 창조하는 능력입니다. 아름다움은 그냥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반응해주는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화가의 그림도 관객이 있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혼자서는 의미를 가질 수 없고 관계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보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표현은 울림이고 접촉입니다. 

호들러의 산 풍경
호들러의 산 풍경

칸딘스키는 "말로 설명하지 못하면 그림이 말을 하게 된다(Art speaks when words are unable to explain)”라고 하면서 표현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서양미술사에서도 표현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 화가들이 있었습니다. 겉으로 나타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황에서 영혼을 끌어내 생각과 느낌, 사회 현상, 세상의 변화에 대한 상상과 감동을 붓가는 대로 표현한 화가들이 나타났습니다. 

이들의 예술활동을 총칭하여 표현주의(expressionism)라 이름 붙였습니다. 

서양철학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예술의 본질이 모방(mime sis)에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모방은 단순한 따라하기를 넘어 대상의 순수형상을 파악하고 그것을 캔버스로 가져와 있는 그대로 나타내 재현(representation)하는 것이라 인식했습니다. 

19~20세기에 보이는 그대로를 그려내는 사실주의(realism), 자연주의(naturalism) 화풍이 유행하였으나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재현을 넘어 화가의 생각과 구상, 감정과 같은 주관적 요소를 밖으로 표출시키는 데 역점을 뒀습니다. 

이는 자연현상과 풍경 등 밖에서 받은 느낌을 자신의 눈으로 재해석하여 표현하는 인상주의(impressionism)와도 다릅니다. 프랑스 대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산업화, 도시화로 기존 가치체계가 무너져 한계상황에 부딪치면서 인산내면의 절규를 밖으로 표출하려는 욕구가 폭발합니다.이 시대의 인간, 사회심리를 ‘그린마일(greenmile:사형수가 감방에서 사형 집행장까지 걸어가는 길)’이라 극적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소외감과 주관적 영감 상황이 예술가들로 하여금 몸부림치는 내면적 절규를 쏟아내도록 부추겼습니다. 

외적 표현의 욕구는 프랑스와 독일에서 모두 열화와 같이 분출했는데 프랑스에서는 마티스, 드랭, 블라맹크의 야수주의(fauvism)로 나타났고, 독일에서는 다리파(Die Brucke), 청기사파(Blaue Reider)등의 표현주의 열풍으로 나타났습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비엔나 분리파(Vienna Secession)의 표현주의로 나타났습니다. 

온화한 풍토의 자연에 감정이입이 결부된 프랑스 표현주의를 망막적(retinal)이라 부르고, 열악한 자연풍토와 전쟁의 상흔이 점철된 독일 표현주의는 정신적(spiritual)이라고 분류하기도 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1905년 전후에 태동하여 1차 세계대전 시기에 절정에 달했던 독일 표현주의 화풍에 대해 소개합니다. 

19세기 말을 거치며 유럽 회화는 외부로부터 받은 인상이 아니라 끊임없이 분출하는 내부의 감정을 그리게 됩니다.

지성적 합리주의에 기초했던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인상주의에서 벗어나 인간이 처한 현실적 극한 상황(고통, 질병, 가난, 폭력, 죽음 등)을 표출하게 되고 전통적 미의 개념이 무너지면서 선과 형태, 색채를 수단으로 하여 즉흥과 왜곡, 주관적 감성, 영혼의 부르짖음 등에 주목하게 됩니다. 바로 표현주의(expressionism) 화풍의 시작으로 이러한 표현주의 발현에 선구적 역할을 했던 대표적인 화가 5명의 활동을 조망해 봅니다. 이들 외에도 로트렉(Lautrec), 샤갈, 세잔, 수틴(Soutine) 등의 화가도 표현주의 태동에 영향을 미쳤는데 이들의 생애는 추후 고찰하겠습니다. 

앙소르의 음모
앙소르의 음모

1. 고흐(van Gogh/네덜란드)

고흐는 뭉크(Edvard Munch), 앙소르(James Ensor)와 함께 표현주의 3대 시조라 불립니다. 고흐는 끝없이 분출하는 격정과 분위기를 추상적 필치로 그려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느낌과 의미, 환상을 짙은 물감으로 두껍게 나타냈습니다. 들쑥날쑥하고, 거칠고, 뒤틀리고, 왜곡된 모습을 그렸습니다. 37년의 짧은 생애 동안 37번이나 이사 다녔다는 그의 그림 속에는 인생의 깊은 고뇌와 공포, 근심걱정, 욕구불만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독일지역(Dresden/Munchen)에서 개최된 고흐 전시회는 독일 표현주의 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흐는 “나는 지루하기보다는 차라리 열정으로 죽는 편이 낫다(I would rather die of passion than boredom)"이라 외치며 표현주의적 갈망을 부르짖었습니다. 짙푸른 "울트라 마린(ultra marine)"으로 프로방스 밤하늘을 그리고 바람과 구름으로 영혼의 떨림을, 별로써 희망을, 석양으로 열정을 나타냈습니다. 

녹색 황금빛, 노란 황금빛, 분홍 황금빛 등 원색의 대조를 통해 고독한 예술혼과 인간을 향한 불퇴전의 용기, 궁극적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이로써 세계인의 상처받고 피폐한 영혼을 위로했습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별이 빛나는 밤에’, ‘15송이 해바라기가 있는 꽃병’, ‘아몬드 꽃’,’ 까마귀 나는 밀밭’, ‘비오는 밤의 다리’, ‘오베르의 교회’, ‘아를르 오솔길’ 등이 있습니다. 

2. 고갱(Paul Gauguin/프랑스)

프랑스에서 태어났으나, 남미 페루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1865년 외항선원이 되어 지중해와남미, 인도, 북해 등 많은 곳을 유랑하는 방랑자로서 천재성을 보여줍니다. 프랑스 상징주의(symbolism), 종합주의(synthe-tism), 원시주의(primitivism) 화풍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고 후일 표현주의, 추상주의, 입체주의의 선구자가 됩니다. 자신만의 개성으로 규칙을 파괴하고 즉흥적 드로잉으로 내재적 감정과 주관적 색채표현에 치중합니다. 

"회화를 자연으로부터 독립시킨 화가" 로 평가받았습니다. 원시예술(savage art)에 심취한 극단적 기독교 신자로 눈에 보이는 사실에 반대하고, 자신의 감정과 영적 가치, 반서구 문명(non-western)정서를 강조하며 자유롭고 대담한 색상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1888년 아를르에서 고흐와 잠시 함께 그림을 그렸으나 곧 남태평양 타히티섬으로 이주해 청정한 자연을 꿈꿨으나 선교사들에 의한 서구문명 전파에 크게 실망했습니다. 

파리와 브뤼셀, 비엔나, 런던, 오슬로, 글래스고, 세인트 피터스버그에서 개최된 전시회는 이후 표현주의, 추상주의 태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말년의 그림은 힘찬 필치와 생생한 자연 모습,야생적 색채로 특징 지어졌습니다. 영국 작가 서머싯 몸(Somerset Maugham)은 고갱의 일생을 소재로 ‘달과 6펜스(The moon and 6 pence)’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습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황색 그리스도’ ‘우리는 어디서 왔고’,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가’, ‘타히티 여인들’, ‘설교후의 환영’, ‘아를르 여인들’, ‘브르타뉴 풍경’ 등이 있습니다. 

3. 뭉크(Edvard Munch/노르웨이)

노르웨이 출신 뭉크는 어머니와 여동생, 할아버지, 아버지의 연속된 죽음 속에 젊은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그의 작품세계 주제는 죽음과 질병, 정신착란으로 요약됩니다. 정신적 불안과 죽음의 공포, 외치고 싶은 격렬한 충동, 날카로운 비명, 엄습하는 자연의 위압감 등을 그렸습니다. 파리에서 접촉한 상징주의와 후기 인상주의를 표현주의에 접목시킨 화가였습니다.

핏빛 하늘과 검푸른 피요르 해안을 통해 압도적인 공포(overwhel-ming horror)를 묘사한 그의 그림들 속에는 고독과 공포, 고뇌와 고통, 불안이라는 4가지 기본감정이 배어 있습니다. 그는 분출하는 내재적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자신의 운명임을 자각하고 심리적 공포와 고통이 자신의 예술을 자탱해 주는 초석임을 간파했습니다. 

1889년 파리 엑스포에서 고흐와 고갱, 로트랙을 만나면서 이들로부터 크게 영감을 받아 내면적 영혼의 울림을 과감하게 표출하는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또한 인간의 감정과 감각, 꿈,고통을 시,적으로 그려냅니다.

"불안과 질병이 없는 나 자신은 방향키 없는 배와 같다. 나의 고난은 나 자신과 예술의 일부이며 나와 달리 구분될 수 없다" 라고 외친 뭉크는 자신의 고독과 불안, 공포를 극한으로 몰아붙여 흔들리는 선과 선명한 색감, 어두운 화풍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 "나의 썩어가는 몸에서는 꽃이 자라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절규’, ‘마돈나’, ‘병든 아이’. ‘사춘기’, ‘죽음과 소녀’, ‘다리 위의 소녀들’, ‘생명의 춤’ 등이 있습니다. 

4. 호들러(Ferdinand Hodler/스위스)

호들러는 고흐가 태어난 1853년 스위스 베른에서 태어나 제네바에서 주로 활동했습니다. 8~15세 사이에 아버지와 남동생, 어머니가 모두 결핵으로 숨져 고아가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에는 늘 죽음이 따라다녀 그림의 중심 테마도 노르웨이 화가 뭉크처럼 ‘죽음’이었습니다.

초기에는 사실주의, 자연주의, 아르 누보 기법이 주를 이뤘으나, 파리에서 고갱, 스라의 작품과 상징주의 시인 뒤쇼잘(Louis Duchosal)과 만나면서부터 상징주의로 옮겨갔습니다. 특히 인물들을 대칭적으로 배열하는 병렬주의(parallelism)에 심취했습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고전주의 미술에서 나타난 ‘균형과 대칭의 미학’에서 비롯되었고 어딘가 모르게 상징적인 법칙 (초월적 능력과 섭리, 우주의 신비)등이 느껴지게 됩니다. 

그림의 중심 주제는 잠, 꿈, 죽음, 선정성(eroticism)으로 이뤄졌는데 이 모든 것을 통해 "삶은 결국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임을 표현코자 했습니다. 생명력이 있는 것은 수직으로(vertical), 죽음과 관련된 것은 수평으로(horizontal) 표현했습니다. 

쿠르베(Courbet)의 사실주의와 고갱의 후기 인상주의가 융합된 그림을 그렸고, 젊음, 고독, 명상,풍, 초상 등을 통해 상징주의 경향을 나타냈으며 이것이 훗날 독일 표현주의 회화의 태동으로 이어집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The day’, ‘The night’, ‘Geneva 호수’, ‘나무 베는 사람’, ‘실망한 영혼’, ‘목동의 꿈’, ‘가을저녁’, ‘선한 사마리아인’ 등이 있습니다. 

5. 앙소르(James Ensor/벨기에)

벨기에 북부 오스탕드(Ostende) 출신으로 특유의 소름끼치고 엽기적인 형상과 냉소적인 사회비평이 담긴 그림을 그렸습니다. 젊은 시절 렘브란트, 브뢰헐(Brueghel), 루벤스(Rubens) 작품에 심취했고 프랑스 인상주의에도 관심을 보였습니다.

1883년 벨기에 진보예술가 모임 '20인회(Les vingts)' 결성에도 참여해 벨기에 아방가르드의 주역이 됩니다. 어머니가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여 그의 가면(mask) 그림에 영향을 미쳤고 해골,유령 등을 주로 그렸습니다. 본인이 무신론자임에도 불구, 1889년 '그리스도의 브뤼셀 입성'을 그려 20인회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고통 받는 예수를 조롱받는 자신과 동일시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기괴하고 환상적이며, 위선적, 냉소적, 악마적, 신비적인 화풍을 담아 축제, 해골, 가면, 꼭두각시등을 즐겨 그렸습니다. 이러한 상징주의 화풍은 후일 표현주의와 다다이즘, 초현실주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앙소르는 해마다 열리는 ‘마르디 그라(Mardi gras)’라는 카니발 축제에 매료되어 인간을 하나의 동물로 간주해 여러 명의 가면을 쓴 인물들을 기괴한 동물 형상으로 그렸습니다. 그는 마스크를 통해 인간 내면을 표현하고 대상의 이면 그림을 통해 인간 사회의 소외와 비인도성(inhumanity)을 표출코자 했습니다. 

앙소르는 19세기말 고전주의적 라틴정신을 넘어 자유분방한 이단정신을 접목한 화가로 분류되는데 그는 항상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성은 예술의 적이다. 이성을 중시하는 예술가들은 감정을 잃고 본능이 약해지며 영검이 빈곤해진다. 그래서 생명을 잃는다." 주요 작품으로는 ‘예수의 브뤼셀 입성’, ‘가면에 싸인 자화상’, ‘이상한 무도회’, ‘소란스런 가면’, ‘해안의 카니발’, ‘피에로의 절망’, ‘위험한 요리사’ 등이 있습니다. 

독일 표현주의는 드레스덴(Dresden)과 뮌헨(Munchen)에서 크게 꽃을 피웠고 오스트리아에서도 비엔나 분리파(Vienna Secession)에 속한 쉴레(Egon Schiele), 클림트(Gustav Klimt), 코코슈카(Oscar Kokoschka)에 위한 표현주의 화풍이 대두하였으나 여기서는 오스트리아 표현주의를 생략하고 독일 표현주의를 조망해 봅니다. 

에른스트 키르히너의 베를린 거리 풍경
에른스트 키르히너의 베를린 거리 풍경

1. 다리파(Die Brucke/The bridge)

20세기 초반 ‘독일의 피렌체’라 불리던 드레스덴은 신인상주의와 아카데미즘에서 탈피해 새로운 문화가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1905년 드레스덴 공과대학 건축과 학생인 키르히너(Ludwig Kirchner), 헤켈(Erich Heckel), 로틀루프(Karl Rotluff), 블레일(Fritz Bleyl) 등 4명은 서양미술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겠다고 선언하며 ‘다리파(Die Brucke)’를 결성했습니다. 

이들 외에 뮐러(Otto Muller), 페히슈타인(Max Pechstein), 놀데(Emil Nolde) 등이 가담합니다. 이들은 산업화와 도시화, 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 파괴된 인간의 실존적 내면을 표현코자 했습니다. 다리파 본거지는 1910년 베를린으로 옮겨 전시회 개최 등으로 활동을 이어갑니다. 다리파는 화가들의 개인적 특성으로 인해 분열을 겪던 중 1913년 해체되기에 이릅니다. 다리파 대표적 화가 키르히너와 놀데의 화풍과 인생을 살펴봅니다. 

● 에른스트 키르히너
  (Ernst Kirchner/1880~1938)

독일 아샤펜부르크에서 태어난 키르히너는 뒤러(Albrecht Duhrer), 크라나흐(Lucas Kranach) 등의 독일 화가들과 아르 누보, 프랑스 신인상주의에 영향을 받았고, 아프리카·오세아니아 원시미술에도 심취했습니다. 1905년 다리파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했으나 1911년 베를린 이주 후 그의 독단적 행보로 인해 다리파는 1913년 해체되었습니다. 

피카소의 입체주의에 나타난 원시미술과 북유럽 뭉크의 절박함, 오스트리아 쉴레의 실존적 고통을 융합한 아방가르드 화가로 평가받았으나 1914년 1차 세계대전 참전, 러시아 스파이혐의 체포 등의 수난을 겪고 1917년 스위스 다보스로 이주해 알프스 풍경화에 몰두합니다. 

1925년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대도시의 방탕한 모습과 병든 사회, 갈등과 우울함 등을 묘사합니다. 1933년 나치에 의해 퇴폐예술가로 낙인찍히고 1938년 나치와 오스트리아 합병 소식에 권총으로 자살해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베를린 거리풍경’, ‘Davos 여름’, ‘군복 입은 자화상’, ‘Dresden거리’ 등이 있습니다. 

● 에밀 놀데
  (Emil Nolde:1867~1956)

본래 이름은 한센이었으나 자신이 태어난 독일·덴마크 국경 마을의 이름을 따서 놀데라 이름지었습니다. 그는 국경 마을 농부와 어부 등을 그렸는데 인물과 지역이 공존함으로써 특별한 의미를 창출한다 여겼습니다. 열정적이고 강렬한 색채를 즐겨 사용했고 종교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그리스도와 제자들을 농부와 어부처럼 그렸습니다. 

놀데는 아내 아다와 함께 1913년 베를린을 출발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러시아, 중국, 몽골을 거쳐 조선에까지 도착했습니다. 그는 조선사람을 펜과 잉크로 그리고, 한국의 장승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놀데는 우리나라를 방문한 최초의 서양미술 화가였습니다. 필리핀과 뉴기니 등도 방문했던 그는 태초의 근원적 인간을 예찬하고 원시미술에 열정을 보여 원초적인 에너지와 자유의 몸부림, 창조 현장 표현에 몰두했습니다.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등장 후 이들에게 협조하기도 했으나 나치 정권이 놀데의 그림을 퇴폐예술로 규정하면서 그의 작품을 몰수하고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말년에는 발트해 부근 어느 어부 집에서 20년 가까이 은둔 생활을 하면서 분노한 바다와 자연, 원시적 자연풍경 등을 주제로 독특한 화풍을 보여 줬습니다. 특히 강렬한 원색을 즐겨 사용했는데 여기서 ‘색채의 폭풍’ 이라는 별명이 생겨났습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황금송아지를 에워싼 춤’, ‘소년과 큰 새’, ‘저녁 해바라기’, ‘최후의 만찬’, ‘빨간 양귀비꽃’ 등이 있습니다. 

2. 청기사파
(Der Blaue Reiter: The Blue Rider)

1911년 칸딘스키와 마르크(Franz Marc) 등은 뮌헨에서 ‘청기사파’라는 화파를 결성하고 여기에 마케(August Macke)와 클레(Paul Klee), 뮌터(Gabriele Munter), 야블렌스키(Alexei Jawlensky), 베레프킨(Marianne Werefkin), 파이닝거(Lionel Feininger), 캄펜동크(Ernst Campendonk), 곤차로바(Natalia Goncharova) 등이 합류했습니다.

청기사는 말그대로 푸른색 기사라는 뜻으로 칸딘스키와  마르크의 작품 세계에서 중요했던 푸른색과 말.기사를 상징합니다. 청기사파의 예술활동에 있어 통일된 강령이나 주제는 희박했지만 예술에 내재된 정신적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 중세미술과 원시미술에 중점을 뒀고, 특히 야수파·입체파와의 교류를 통해 추상주의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다양한 상징과 기법이 탄생했는데 마르크는 동물, 칸딘스키는 음악성, 클레는 환상주의, 마케는 강렬한 색채를 중시했습니다. 특히 칸딘스키는 “색은 건반이고, 눈은 망치요, 영혼은 여러 개의 줄을 가진 피아노다.

예술가는 그것을 연주하는 손으로 영혼에 파장을 일으키기 위해 건반을 두드린다”라고 했는데 이에 따라 청기사파 화풍을 ‘음악 표현주의(musical expressionism)’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런 화풍은 후일 신표현주의와 추상표현주의 태동에 기여합니다. 예술의 지향성을 둘러싼 논쟁으로 칸딘스키와 마케가 갈라서고 1차 세계대전 발발로 전투에 참가했던 마케가 1914년, 마르크가 1916년 전사하고 칸딘스키가 고향인 러시아로 돌아가면서 청기사파는 1914년에 막을 내리게 됩니다. 청기사파의 대표적 화가 3명의 인생과 화풍을 조망해 봅니다. 

●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1866~1944)

모스크바에서 출생해 오데사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학·경제학을 공부했습니다. 

1896년 뮌헨에 정착했고 뮌터(Gabriele Munter)와 동거했습니다. 러시아혁명 후 1918년 러시아로 돌아갔으나 1921년 다시 독일로 귀환해 1922~1933년간 바우하우스(Bauhaus)에서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1933년 나치의 압력으로 퇴임해 프랑스로 이주했습니다. 

칸딘스키는 음악가 쇤베르크(Schonberg)와 교류하며 색채는 음악과 같다는 소신 하에 음악처럼 진동하는 색채의 효과를 강조했습니다. 그는 특별한 공감각(synaesthesia)의 소유자로서 피아노와 첼로를 즐겨 연주했으며 특정 색채를 보면 거기서 소리와 곡조를 떠올렸다 합니다. 그는 색채를 듣는(colour-hearing)화가였습니다. 

그는 노랑은 강렬한 자극, 빨강은 에너지, 파랑은 무한적 감성, 초록은 고요함, 흰색은 침묵이라 규정했고, 회화는 선과 면 그리고 색채의 조화로 이뤄진다 주장했습니다. 색채를 악기와 대비시켜,노랑은 트럼펫, 빨강은 첼로, 초록은 바이올린, 파랑은 플룻, 주황은 알토 바이올린, 보라는 호른이라 했습니다. 또한 음악은 무한한 자유를 창출한다하면서 그림도 음악처럼 생명을 발견하고 그 박동을 느껴야 한다면서 인간영혼은 색채건반으로 구성된 피아노와 같다고 했습니다. 

칸딘스키는 청각적 음악세계와 시각적 회화세계를 연결하는 데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작품 제목에도 ‘구성(composition)’, ‘즉흥(improvi-sation)’, ‘인상(impression)’같은 음악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음악과 미술을 직접 연결한 그림에 몰입하다 보면 평정과 운동, 느림과 빠름, 단단함과 부드러움, 화해와 갈등, 자유와 예속, 질서와 혼돈을 동시에 체험할 수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칸딘스키의 이러한 화풍은 훗날 폴록(Jackson Pollock), 로스코(Mark Rothko) 등의 추상주의와 추상 표현주의, 신표현주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청기사’, ‘노랑 빨강 파랑’, ‘구성 4’, ‘여러개의 원’, ‘Blue Mountain’, ‘모스크바’, ‘즉흥 209’, ‘sky blue’ 등이 있습니다. 

칸딘스키의 원 속의 원
칸딘스키의 원 속의 원


● 프란츠 마르크
  (Franz Marc/1880~1916)

1880년 뮌헨에서 출생해 부친은 풍경화가, 모친은 칼빈주의자로서, 본래 신학을 공부했으나 철학과 문학에 심취해 1900년 20세때 그림에 입문했습니다. 1903, 1907년 두 번에 걸쳐 파리를 방문해 인상파(고흐.고갱), 야수파(마티스), Nabi파, 상징주의, 입체주의, 미래주의 등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동물의 순수한 영혼 속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었습니다. 마르크는 동물이 사람보다 순수해서 천국에 더 쉽게 갈 수 있다고 하면서 동물위주의 통합을 주장습니다. 

푸른말과 노란소, 빨간 고양이를 즐겨 그렸고 그외 돼지와 참새, 사슴, 여우, 강아지, 당나귀, 호랑이, 침팬지도 그렸습니다. 강렬한 원색을 특히 좋아했는데 빨강은 난폭한 물질문명, 파랑은 엄격함과 끈기, 정신을 대표하는 남성의 색, 노랑은 부드러움과 환희·관능을 대표하는 여성의 색으로 규정했고 이 3가지 색상을 통한 균형과 조화를 추구했습니다. 마르크는 나무와 돌, 공기 속에도 피가 흐른다고 하면서 자연과 인간의 동화, 동물세계의 활력, 생명체의 율동을 범신론적 차원(pantheistic)에서 통합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마르크는 물질적 풍요에 대한 인간의 맹목적인 탐욕과 위선을 경멸하고 순결하고 아름다운 동물의 영혼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대안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는 ‘푸른 말’을 즐겨 그렸는데 실재하지 않는 푸른 말을 영혼의 눈으로 봤습니다. 그에게 푸른색은 원죄에서 자유로운 순수성, 목가적 낭만성, 초감각적 정신성과 같은 긍정적 가치를 대변합니다. 마르크의 푸른 말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말 달리자. 말 달리자"라 불러대는 크라잉넛(crying nut)의 노랫소리가 우리 귓전을 때립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마르크도 참전했고 1916년 36세의 젊은 나이에 프랑스 베르덩(Verdun) 전투에서 수류탄에 폭사해 생을 마감했습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푸른 말’, ‘죽은 참새’, ‘노란 소’, ‘붉은 황소’, ‘거대한 푸른 말들’, ‘호랑이·여우·동물들의 운명’ 등이 있습니다. 


●  파울 클레
   (Paul Klee:1879~1940)

스위스 베른 출신으로 성악교사인 부친과 피아니스트인 모친의 영향으로 7세 때부터 바이올린 교습을 받을 정도로 음악가 집안 출신이었고 부인도 피아니스트였습니다. 클레 부부는 바흐와 모차르트, 베토벤 음악을 곧잘 듣고 연주하곤 했는데 "음악이 클레의 그림을 이해하는 열쇠"라고 말하는 것도 이 같은 배경 때문입니다. 

1900년 뮌헨에서 상징주의 대가 폰 슈투크(Franz  Von Stuck)에게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1901~1902년에는 이태리를 방문해 미켈란젤로와 보티첼리, 틴토레토 등 르네상스 화가들의 작품을 마주하면서 색채와 예술적 영감에 눈을 뜨게 됩니다.

1914년에는 북아프리카 튀니지를 방문해 원색적 환경과 이국적 문화에 심취, 검은색과 회색을 주로 사용하던 색조가 훨씬 밝은 노랑, 파랑, 자주, 녹색으로 바뀌게 됩니다. 바로 직전 1905/1912년에는 파리를 방문해 휘슬러와 고흐, 르느와르 그림에 매료되기도 합니다. 이 시기에 점차 은유적 상징을 드러내며 추상주의로 접근하게 됩니다. 

1924년에는 이탈리아의 시칠리아를 방문해 황금빛 태양과 붉은 노을에서 지중해적 영감을 얻기도 하고 타오르미나, 시라쿠자에서 추상적 풍경을 그렸습니다. 1928년에는 이집트를 방문해 피라미드. 상형문자 등 고대 이집트 문명의 상징들을 기호로 추상화한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클레는 환상적이면서 동심을 강조한 꿈의 세계를 많이 그렸습니다. 대상에 집착하지 않고 조화로운 색채와 음악적 요소를 가미하여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형상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는 미술뿐만 아니라, 천문학, 식물학 등에 박식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바우하우스(Bauhaus)교수로도 활동했습니다. 1914~1918의 1차 세계대전은 클레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14년 마케, 1916년 마르크 등 청기사파 동료들이 전사했고 자신도 징집되어 공군에서 복무했는데, 이후 추상적 경향의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1931년 바우하우스를 떠나 뒤셀도르프로 이주해 작품 활동을 계속했으나 나치의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고, 피부경화증, 우울증 등으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주요 작품으로는’노랑새가 있는 풍경’, ‘세네치오(Senecio)’, ‘꽃의 신화’, ‘꿈의 도시’, ‘나일강의 전설’, ‘검은 왕자’ 등이 있습니다. 

표현주의 사조는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냉소주의, 소외감, 환멸감이 팽배한 성향으로 흐르고.후기에 참가한 그로스(George Grosz), 딕스(Otto Dix) 등은 표현주의와 사실주의를 혼합하여 보다 날카로운 사회 비판 미술양식을 만들어냈는데 이를 신즉물주의(Neue Sachlichkeit)라고 불렀습니다. 

표현주의는 보다 나은 세계에 대한 막연한 동경, 불명확하고 모호한 열망, 난해한 표현방식 등으로 인해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청기사파 화가들이 연속하여 전사하고 스페인 독감 창궐로 인한 사회적인 피폐와 칸딘스키의 러시아 귀환 등이 이어지며 쇠퇴가 가속화되었습니다. 

특히 1933년 이후 나치 정권이 표현주의를 퇴폐예술로 규정하여 크게 탄압함으로써 대부분의 화가들이 미국 등으로 망명하며 그 동력을 잃게 됩니다. 이후 표현주의 화풍은 194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신표현주의와 추상주의, 추상표현주의 등으로 변모하여 그 명맥을 유지해 나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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