탤런트 복서 이시영 길러낸 홍수환을 만나다
탤런트 복서 이시영 길러낸 홍수환을 만나다
  • 미래한국
  • 승인 2011.04.22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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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떴다! 송만기!] 송만기의 스타열전

가수며 방송인인 송만기 씨가 문화 예술 스포츠인 등을 직접 탐방해서 인터뷰합니다.

 
송만기
단국대 경영학 석사. 전 국가대표 하키선수 및 청소년 대표 주장. 극단 ‘大河’ 연극 활동.
싱어송 라이터 가수로 7집 앨범 발표. 라이브하우스 ‘뉴욕’ 대표. (주)웰리치 인베스트먼트 부회장.

홍수환 관장을 만나기가 어려웠다. 그를 만나기 위해 스케줄을 세 번이나 바꾸면서 겨우 만났다. 그의 수첩은 전국 방방곡곡에 연사로 다니는 스케줄로 빼곡하다. 그렇게 바쁜 그를 탤런트 이시영 선수가 ‘전국 신인 아마추어 선수권대회’ 우승을 일궈낸 날 강남의 선릉역 2번 출구 쪽에 있는 ‘홍수환 스타복싱 체육관’에서 만났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했더니 ”야~아~ 송만기 씨~“ 큰 목소리로 반갑게 맞아주는 홍 챔프였다. “축하합니다!” “아이 감사합니다~” 이시영 선수의 우승으로 챔프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 글쎄~ KO로 이겨버렸어, 촬영 때문에 바쁜 가운데도 1주일에 서너번씩 나와 연습을 했는데…  어허~ 독종이야… 무척 잘해~ 주먹도 얼마나 매서운지…”그의 목소리는 칭찬과 즐거움으로 가득했고, 본인이 승리한 것 같은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인터뷰 중에도 계속 축하 전화가 이어졌다. 탤런트 이시영 선수는 이미 런던올림픽에 나가는 것 같았다. 본인이 원한다면 악착같이 시켜 메달을 딸 자신이 있다는 것이 홍 관장의 말이다.
대한민국의 영원한 4전5기 신화 홍수환 관장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홍 관장은 1950년 서울 태생이다. 중앙고와 인천체대 체육학과를 졸업했고, 1969년 프로권투에 입문, 1972년 OPBF밴텀급 동양 챔피언에 오르게 된다. 그후 1974년 비행기를 여섯 차례나 갈아타며 무려 30여 시간을 남아공으로 날아가 아놀드 테일러를 꺾고 WBA 밴텀급 세계 챔피언을 거머쥐게 되면서 멋진 역사가 시작된다.

이 당시 언론은 적지에서의 시합이고 이기리라 생각지 않았기에 단 한 명의 기자도 동행하지 않았다. 김준호 트레이너와만 달랑 둘이 그 먼 지구 반대편 남아공의 더반에 간 것이다. 이때 시합이 끝난 후 어머니와의 전화에서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그래 대한국민 만세다!” 라는 말로 일약 스타덤에 오르며 무에서 유를 창조한 대단한 사건이 된 것이다.

아놀드 테일러에게 15회 판정승해 WBA 밴텀급 챔피언을 획득한 다음, 같은 해 12월 28일 페르난도 카바넬라에게 15회 판정으로 1차 방어에 성공한다. 그러나 1975년 3월 14일 알폰소 사모라에게 4회 KO패로 타이틀을 상실한다.

이때의 감회를 물었더니 “우리는 세계 권투를 따라가지 못했지요, 사모라의 펀치는 몸통 안에서 어깨와 팔이 같이 붙어 나와 파워가 대단했고, 별이 그냥 보이는 게 아니라 노란 별이 보였어요~(웃음)~ 그런 그를 이길 수가 없었지…”

1976년 10월 16일 알폰소 사모라에게 다시 도전했으나 12회 KO로 도전에 실패하고 만다. 이때 홍수환은 사모라를 9회 이길 수 있었다고 한다. 나 역시도 그때 시합을 보았고 뚜렷한 기억이 나는 대목이었다. 원투 펀치를 제대로 날렸고 마지막 결정 펀치를 날리려고 하는데 멕시코 심판이 가운데서 딱 막아선 것이었다. 결국 사모라가 살아났고, 12회에서는 넘어지지도 않았는데 TKO패를 줄 때도 멕시코 심판이 일방적으로 경기를 중지시켰다.

 

홍수환은 이렇게 해서 아주 억울한 패배를 기록하게 된다. 도전자는 무승부로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이 홍 관장의 표현이다. 관중석에서는 아기 우유병에서부터 각종 물건들이 링 위로 날아왔고 심판은 경호를 받으며 경기장을 빠져 나갔다고 한다. 그렇게 과거를 회상하는 그의 모습에서 챔프의 억울함이 보였다.
그후 1977년 11월 26일은 바로 역사적인 날이 된다. 지옥에서 온 저승사자 헥토르 카라스키야를 3회 KO로 눕히고 WBA 주니어 페더급 획득에 성공을 하게 된다.

바로 이 시합에서 3회까지 네 번의 다운을 당했지만 굴복하지 않았고 한 방만 먹이면 이긴다는 불굴의 투지는 결국 사고를 치고 말게 된다. 홍수환은 네 번이나 오뚝이처럼 일어섰고, 1분을 쉰 3회에서 카라스키야를 무섭게 로프로 몰아넣더니 통쾌한 KO승을 거두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4전 5기의 신화라고 말하는데 본인은 이것을 신화가 아닌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결과이지 누군가가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고 힘주어 말한다.

상대가 네 번이나 넘어지니 다 이겼다고 생각한 카라스키야는 정신이 풀렸고, 그 틈을 탄 홍수환은 한 방을 먹인 후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마침내 지옥에서 온 저승사자는 KO로 무너지며 홍수환은 또다시 승리하여 타이틀을 획득한다.

‘4전5기’.그 후 이 말은 한국 스포츠계에서 기적 같은 승부, 집념의 도전을 일컫는 대명사가 됐다.스포츠계 뿐만 아니라 학생, 기업가, 정치인, 실업자, 장애우 등도 이 1977년 11월 27일은 한국 스포츠사가 기억해야 할 감동의 날이 된 것이다. 맞을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단 하나 분명 기회가 올 것이란 생각에 버텼더니 작은 틈에서 대 반전을 이끌어내 역전승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가 된다.

그후 1978년 2월 1일 유타가 가사하라 15회 판정으로 1차 방어에 성공, 1978년 5월 7일 리카르도 카르도나에게 12회 TKO패로 타이틀 상실한 후 계속 도전했으나 결국 타이틀 획득에 실패한다.
1980년 그는 염동균 선수와 마지막 은퇴경기를 하기까지 50전 41승(14KO) 4무 5패의 전적을 기록한다. 그가 아직도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로 승리를 쟁취한 후 “어머니”와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던 복서의 모습일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홍수환은 국가 재건의 국민정신을 만든 인물이기에 우린 그를 4전 5기의 신화라고 부를 것이다.

이제 다른 질문으로 일본의 대지진에 대해서 물어본다.
“일본의 고통을 우리는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과거에 잘못 행했던 여러 일들을 우리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30대에 일본군들에 의해 나무에 매달려 몽둥이로 맞아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는 30대에 혼자 돼 어렵게 살아오셨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모습에서 억울함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렇게 당하고도 지금 도와주기 위해 발 벗고 나서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성숙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역사 교과서를 왜곡하고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지만 대한민국이 일본이 어려움에 처하자 그들을 도와주고 있다는 게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홍수환 관장은  그들의 아픔이 빨리 치유되기를 바라며 역사 인식도 바로 하기를 기대했다.

 

동생 홍수철 씨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홍수철이란 사람이 내 동생이지만 존경스럽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생은 많은 유혹을 물리치고 목회자로서 주님을 영접하고 있고, 나에게 심적인 평화를 주고 있는 훌륭한 목회자입니다. 언제나 고맙게 동생을 사랑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어디에 있느냐고 하니 “구리시 인창동 삼성 래미안 아파트 앞에 있는 ‘예빛교회‘입니다. 저도 옥희와 거기에 나갑니다.ㅎㅎ”라고 친절히 말하는 모습에서 정말 동생을 사랑한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미국에서 한국으로 가수 활동을 처음 하러 왔을 때 들어간 프로덕션이 바로 홍수철 이승철 김범룡 김상배 란 가수가 있었던 곳이라 홍수철 목사는 특별히 잘 알고 있고, 그의 훌륭한 인품도 잘 아는 바라 감회가 새로웠다.

부인인 가수 옥희 씨에 대해 질문을 던졌더니 “좋은 사람입니다. 우린 서로 주님을 영접하면서 사랑하고 있고, 모든 코디도 집사람이 다 신경을 써주는데 대충이 통하지 않아 가끔은 짜증이 납니다만 어쩝니까? ㅎㅎㅎ…” 부인 옥희 씨를 무척 사랑한다는 애처가 챔프다.

홍수환 관장은 10여년간 앵커리지와 LA에서 미국생활을 했다. 미국에서 보낸 여러 고생 이야기도 있고 재미 있는 일화도 있다고 한다. 어려서 미군부대 근처에서 살면서 미군부대를 다녀 영어를 잘하게 됐고 언젠가 그가 링에서 마이크를 잡고 영어로 말하는 것을 보며 국민들이 놀랐던 것을 기억한다.
올해 우리 나이로는 62세다. 어언 환갑을 넘긴 홍수환은 건강한 모습이고 요즘 명강사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최근 각종 모임의 특강에서 밝힌 그의 어록 몇 구절을 인용한다.

“‘4전5기’의 의미보다 사전(事前)에 준비해서 오기(傲氣)로 덤비는 것이 더 중요하다.”
“될까, 안 될까 하는 생각이 안 되게 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때론 미친 듯이 몰입하라.”
“누구에게나 한 방은 있다!”
라는 것이 요즘 그가 자주 인용하는 어록이다.

홍수환 관장에게 마지막으로 <미래한국> 독자들에게 인사를 부탁했다.
“사람들은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끝없는 도전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한번만 다운이 돼도 포기해 버리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저처럼 네 번이나 넘어져도 이기겠다는 신념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저는 이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성공했습니다. 모든 것은 노력의 결과에서 얻어집니다. 오늘 제가 이 지면을 통해 송만기와의 인터뷰 내용이 세상에 나갈 것입니다.

<미래한국>이란 이 주간 매거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독자 여러분들의 사랑과 관심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사가 좋은 잡지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오늘 제가 ‘떴다! 송만기!’ 섹션에 초대 손님으로 나온 것에 영광과 감사를 드리고 <미래한국>이 미래를 책임지는 좋은 잡지가 되기를 바라며 인사에 대신합니다.”

인터뷰 중에도 많은 복싱 연습생들이 땀을 흘리며 아주 열심히 연습들을 하고 있었다. 3분마다 울려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며 세계적인 복싱영웅 4전5기 신화 홍수환 관장에게 굳게 악수를 나누며 목례를 하고 문을 나섰다.
봄 햇살이 따뜻이 나를 반겨주는 오후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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