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이 서브’ 원조, 배구스타 장윤창 경기대 교수
‘스카이 서브’ 원조, 배구스타 장윤창 경기대 교수
  • 미래한국
  • 승인 2011.04.27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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떴다! 송만기

 

송만기 단국대 경영학 석사. 전 국가대표 하키선수 및 청소년 대표 주장. 극단‘大河’연극 활동.싱어송 라이터 가수로 7집 앨범 발표. 라이브하우스‘뉴욕’대표. (주)웰리치 인베스트먼트 부회장.

아직도 우리는 장윤창 선수를 생생히 기억한다. 스포츠에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배구의 장윤창을 모르면 시세말로 간첩이다. 키가 커서인지 과거의 명성 때문인지 몰라도 그는 어느 곳에 가든 관심의 초점을 모으며 눈총(?)을 받기도 하는 스포츠 스타다.

 

스타 장윤창을 지난주 필자가 운영하는 강남의 조그만 카페 ‘뉴욕’에서 만났다. 장윤창 선수는 큰 키(195Cm)에 훤칠한 모습이었고 교수라는 타이틀이 어울리는 중년의 모습이었다.
장윤창 선수는 충남 논산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육상, 핸드볼, 축구 등 각종 운동에 특별한 소질이 있어 스포츠 지도자들이 탐을 냈다. 배구를 하기 전에 핸드볼과 축구를 해서 배구선수로 활약하면서 체력적 도움이 컸다. 그는 안양중 2학년 때 본격적으로 배구를 시작하면서 숙소에서 생활했다.

제미 있는 일화가 있다. 그는 잘 때 베개를 추리닝으로 둘둘 말아 베고 잤다. 새벽 1시쯤 일어나 둘둘 감긴 추리닝 베개를 가슴에 몰래 품고 나와 옷을 갈아입고 1시간 반 정도를 개인운동에 몰입한다. 그렇게 겨울을 보낸 장윤창은 3개월만에 몇 년을 배구만 했던 다른 선수들보다 기량이 뛰어나게 성장한다.
장윤창은 심야 운동 후 물이 얼어 안 나올 때면 당시 찰고무로 된 BB 배구화 밑창을 불에 태워 수도를 녹였다. 추운 새벽에 차가운 물로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샤워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숙소에 들어가 잠을 잤다는 것이다.

고2 때 국가대표로 발탁

심야운동 후 새벽에 일어나기 힘들어 깊은 잠에 빠지기 일쑤였고, 장윤창이 잠이 많은 것으로 아는 다른 선수들은 고함과 발길질로 그를 깨워 새벽운동에 동참 시켰다. 장윤창이 1~2시에 운동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본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당시 포지션은 세터였지만 측면 공격, 블로킹, 토스 등 모든 플레이를 다 소화해 내는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돼 안양중을 전국적인 강팀으로 만들어 놓는 데 일조한다. 장윤창은 팀이 우승은 못했으나 기량이 출중해 배구 명문이었던 인창고에 들어간다.

장윤창은 1학년 때부터 동기인 유중탁 김인목 이원재 김상권 등과 같이 전성시대를 이끌어 간다. 장윤창은 최고의 스타로 올라서고 있었다. 인창고 시절 우승도 많이 하는 등 대활약을 펼쳤다. 이미 중3 때 청소년 대표가 된 장윤창 선수는 스파이크와 블로킹에 능한 유망주로 눈에 띄기 시작했고, 특히 국내에 몇 안 되는 왼손 공격수로서 두각을 나타내며 1977년 인창고 2학년 때 일찌감치 태극마크를 달게 된다.
그는 자신의 장점으로 끈기와 집념을 꼽는다. 역대 최연소 국가대표의 기록을 갖고 있는 그의 가장 큰 무기는 엄청난 탄력의 서전트 점프였다.

그는 중·고 시절 10㎏에 달하는 모래조끼를 입고 하루 3000번씩 줄넘기를 하며 체력을 키웠다. ‘스카이 서브’ ‘백어택’등 화려한 기술의 배경에는 이처럼 숨은 노력이 있었다.

 
1978년 이탈리아 세계선수권 대회  4강 위업

장윤창은 ‘스카이 서브’의 국내 원조로 유명하다. 80년대 중반과 90년대 초 그가 서브를 넣기 위해 공을 통통 튀기고 있으면 관중석은 그의 호쾌한 스카이 서브를 기대하며 들썩들썩 거렸다. 당시 외국 선수들도 별로 시도하지 않던 스카이 서브를 장윤창이 그의 트레이드마크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 대학 시절인 81년이었다. 중동 원정을 떠났을 때 몇 차례 실전에서 적용해 본 스카이 서브의 정확도와 위력은 생각보다 컸고 국내에 들어와 더 가다듬은 후 사용하기 시작했다.

15년 가까이 대표 선수로 뛰면서 조그만 잡음 하나 없었던 장윤창이다. 여성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막무가내식 대시도 많이 받았지만 절제로 이겨낸 그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며 “진짜 한눈 팔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은퇴할 때 돌이켜보니 내가 뭘 했나 싶기도 했습니다. 운동밖에 몰랐고, 오죽하면 술·담배를 시도해 볼 시간도 없었을까요?…”라고 한다.

1978년 세계 남자배구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대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이탈리아에서 개최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리나라가 당당히 세계 4강에 오르는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대회 직전만 하더라도 많은 이들은 국가대표팀의 선전을 예상하지 못했었기에 그 놀라움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당시 강만수, 이인, 김호철, 강두태 선수가 주축이 된 가운데 장윤창 선수도 고등학교 3학년의 어린 나이에 당당히 출전해 세계 무대에서 어깨를 겨루었다. 이후 같은 해 방콕아시안게임과 이듬해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우리나라는 남자배구 금메달을 차지해 세계 배구의 강자로 떠올랐다.물론 그 중심에 장윤창 선수가 있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인창고를 졸업하고 많은 동기들이 서울대에 진학했다. 물론 장윤창도 1순위로 갈 수는 있었지만 이미 장윤창은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로서 공부보다는 운동으로 성공하고 싶은 마음에 경기대로 진로를 선택한다. 그런데 그는 서울대에 진학한 동기들 보다 지금 공부를 더한다고 하며 웃는다.

선수로서 경기대 재학 시절 라이벌이었던 인하대와 불꽃 튀는 대결을 펼치며 대학 배구를 양분했던 장윤창 선수는 1983년 고려증권 창단 멤버로 입단, 더욱 만개한 플레이를 선보이며 많은 배구 팬들을 끌어 모았다. 이듬해 ‘백구의 대제전’이라 불린 대통령배 남녀배구대회가 창설되면서 그가 있었던 고려증권은 우승을 차지했으며 이후 승승장구의 가도를 달렸다.

93년 시즌 고려증권을 다섯 번째 정상에 올려놓고 화려한 선수 생활을 접고 은퇴를 선택했다. 국가대표 선수로서 모교를 빛낸 공로를 인정해 경기대가 장윤창에게 교수 제의를 했고 결국 장윤창은 무식(?)을 접기 위해 선수 생활이 끝난 후 오랜 꿈이던 공부를 하기 위해 94년 가족 모두가 미국행에 오른다.

당시 손종국 경기대 총장의 추천서를 받고 날아간 곳이 경기대와 자매결연을 맺은 조지워싱턴대였다. 장윤창은 총장이 써준 추천서 하나면 모든 게 이뤄지는 줄 알고 미국에 갔다가 죽어라 고생한다. 평생 운동만 한 그가 공부를 하려니 그것도 한국말도 아니요 영어로 공부를 해야 하니 무척 고생했다.

고려증권에서 다섯번 우승하고 은퇴

조지워싱턴대에서 기초 어학 공부를 하는데 도대체 검정은 글씨요 흰색은 종이로만 보였다. 화장실에 들어가면 스트레스를 풀 수 없어 책을 집어 던지고, “도대체 내가 여기에 왜 왔나?” 하는 자괴감에도 빠지면서 어려운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렇게 모든 게 힘들어지는 상황에서 교수까지 무시하자 실망이 컸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라는 말이 있듯이 장윤창도 희한한 인연으로 살아나게 된다.

미국 사람들은 올림픽 출전을 아주 영광적인 일로 생각한다. 교수에게 자기소개를 콩글리시로 했더니 잘 알아듣지 못했다. 나중에 유학생과 함께 교수에게 가서 그의 도움을 받아 자기가 LA올림픽 출전 선수이며 이러이러한 대단한 선수라고 말을 했더니 그때부터 교수의 태도와 눈 빚이 달라지며 장윤창을 부드럽게 대했다는 것이다.

장윤창은 그때부터 하루에 3시간씩 잠을 자면서 사전과 싸움을 했고, 아주 기초적인 ABC에서 시작된 영어는 사전이 너덜너덜 해지는 1년 6개월이 되니 정상적인 공부에 안착하게 됐다. 중학교 때 추운 겨울날 남들이 잘 때 일어나서 운동했던 그 정신력이 바로 장윤창을 살려낸 것이다. 결국 악착같이 노력하니 글씨가 보이고 입과 귀가 열리게 됐다.

“정말 죽기 실어 피 땀 흘려 공부했습니다, 가족이 있고 명에도 있고, 자존심도 있는데 이렇게 죽기는 싫었습니다… ” 그는 이런 각오로 공부에 매달렸다. 4년간의 노력 끝에 스포츠 경영학 석사를 취득한다.
석사를 따고 박사과정을 하기 위해 공부에 매진하는 중에 IMF가 터졌다. “800원대 하던 달러가 1800원까지 치솟았습니다. 학비 등 경비가 3배는 더 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박사까지 하고 싶었지만 벌어놓은 돈도 바닥이 나고 있었고 결국 짐을 쌌죠.”

장윤창 선수는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한국에 왔다고 해서 그에게 호락호락 좋은 자리가 나올 리 없었다. 결국 한국체대 박사과정에 입학하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학위를 받는다. 박사학위 취득 후 시간강사로 한 시간에 2만8,000원을 받고 2년간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

드디어 2003년 꿈에 그리던 교수가 된다. “미국생활에서 어려웠을 때를 넘기지 못했다면 지금 이런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꿈이 있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어려움을 이기고 성공했습니다. 아직도 부족한 면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노력 중이고, 배구선수에서 인간 장윤창으로 사는 한 저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보람된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그는 본인이 노력해서 얻은 성공이 남에게 받은 사랑이 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장윤창은 학교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그가 받은 사랑을 돌려주기 위해 학교 밖에서 하는 일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전.현역 스포츠 스타인 마라톤의 황영조를 비롯 핸드볼 임오경, 사격 이은철, 육상 이진택, 레슬링 김원기 등 많은 스타들과 함께 봉사단체 사단법인 '함께 하는 사람들'(함사모)을 만들어 회장을 지낸 후 지금은 고문으로 봉사활동에 발이 닳도록 뛰어다니고 있다. 어렵고 힘든 곳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해 연탄도 배달하며 봉사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장윤창은 한국으로 돌아온 직후인 99년 시작해서 아직까지 이런 봉사를 계속해 오고 있다.

 장윤창 교수의 두 아들 '대한'이와 '국민'이

두 아들 ‘대한’‘민국’으로 작명

회원이 5000명에 달하는 ‘함사모’의 봉사활동은 규모가 크다. 매달 한 번씩 불우 이웃을 대상으로 자장면 나눔 활동을 하고 있고 상반기에는 '희망 마라톤', 후반기에는 '일일 호프' 등을 열어 도움을 필요로 하는 단체들을 돕고 있다.

그는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가족은 부인과 아들 둘이 있는데 두 아들에게 대한과 민국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큰 아들이 장대한이고 작은 아들이 장민국이다. 아이들 이름을 합하면 ‘대한민국’이다.
“고2 때 루마니아에서 세계선수권대회 예선 경기가 있었어요. 공산국가니까 애국가 틀고 태극기 걸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죠. 경기장도 루마니아 수도에서 버스로 5시간이나 걸리는 시골에 있었고. 어렵게 가져간 태극기를 걸고 경기 시작 전에 애국가를 듣는데 가슴이 뜨거워지더라고요. 그 날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대한과 민국으로 짓겠다’고 결심하고 일기장에 썼어요. 혹 아이가 딸 둘이면 우리와 나라로, 아들 하나 딸 하나일 때는 대한과 나라로 정했지요.” 이런 이유로 아이들은 ‘대한민국’이 된다.

해외 시합을 어려서부터 하게 되면 애국심이 깊어지게 된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얼마 전 정대세 북한 축구선수가 북한대표로 시합에 나서면서 하염없이 우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똑 같은 경우다. 나도 1977년 하키 청소년 대표 주장으로 대만 시합을 처음 갔을 때 태극기에 경례를 하면서 정대세처럼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도 여러 번의 기억이 나는데 장윤창 역시 그런 감성적 애국심 발로가 자식의 이름을 ‘대한민국’으로 짓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두 아들은 아주 착하게 잘 성장했다. 큰 아이는 농구를 하다가 지금은 공부에 열중하고 있고, 동생 민국이는 연세대 4학년 농구선수로 키가 2m다. 농구를 아주 잘하고 있고 프로에 진출할 것이라고 한다. 부인도 키가 167cm의 큰 키이고 가족이 모든 장신들이라 장윤창은 카니발 11인승을 타고 다닌다. 아무래도 키가 크니 승용차는 불편하다는 것이다. 장윤창의 할아버지가 8척 장신이었고, 아버지 역시 키가 크셨다고 한다. 또한 어려서 줄넘기를 많이 하고 점프를 많이 한 것도 그가 키가 큰 원인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장윤창은 이제 스타 운동선수에서 제자를 가르치는 따뜻한 멋진 교수로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그를 진정한 스타라 말하고 싶고, 영원한 배구선수 장윤창으로도 기억되기를 바란다.
그의 교수 생활과 가족에게도 영원한 행복과 햇살이 따뜻이 비치기를 팬과 친구로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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