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거인의 위대한 꿈
소박한 거인의 위대한 꿈
  • 미래한국
  • 승인 2011.05.17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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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이기웅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

 

“근래에 들어 가장 독특한 얼굴을 만들고 있는 도시를 꼽아보라.”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각각의 취향에 따라, 경험에 따라 다 다른 답변을 내놓을 것이다. 미래한국미디어 본사가 있는 출판단지를 여러 차례 찾은 필자는 단연 ‘경기도 파주’를 꼽고 싶다.
몇 년 전 여러 작가들과 파주 출판도시를 처음 찾았을 때 다들 감탄사를 연발하며 이리저리 기웃거리느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책상이 다닥다닥 붙은 좁고 열악한 출판사의 이미지를 한방에 날려 버린 대단위 단지라는 점, 150여동의 건물이 다 다른 모양인 데다 각각의 개성과 건축미를 뽐내고 있다는 점, 그리고 오가는 사람을 거의 볼 수 없다는 점 등이 놀라웠다.

무엇보다도 기라성 같은 출판사들이 한 곳에 모여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문화’는 서울을 벗어나면 큰일 나고, 책을 만드는 개성 강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이웃하고 있다는 건 파격이었다.
낯익은 이름의 출판사를 발견할 때마다 탄성을 지르며 쾌적한 출판단지를 돌 때 모두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출판도시 조성에 얽힌 신화를 털어놓기에 바빴다. 늪지대를 거대한 출판도시를 만든 일,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아름답고 거대한 단지를 이룬 것 등등 일화가 끝없이 이어졌다.

이야기의 끝은 “아름다운 도시를 구상한 독창적인 사람, 거대한 단지를 추진한 무모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로 귀결됐다. 그날의 결론은 ‘한 사람, 혹은 몇 사람의 위대한 결단과 추진력에 의해 역사는 바뀐다’는 것이었다.  

“천천히 알려지는 게 좋아요”

드디어 출판도시를 만든 이기웅 이사장을 만났다. 그가 운영하는 도서출판 열화당에 들어서자 직원이 1층과 2층을 구경시켜 주었다. 서재 스타일의 1층은 천장이 2층 높이까지 특 터져 있어 시원했다. 2층 한쪽에 음악도 감상하고 책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었다. 열화당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누구나 와서 자유롭게 책도 읽을 수 있다. 미술전문 출판사인만큼 미술 관련 책이 많고 종종 그림전시회도 연다. 1층과 2층만 둘러봐도 아름답고 정갈하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이기웅 이사장은 ‘불도저 같은 추진력을 지닌 혈색 좋은 사람’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다소 수척한 모습이었다. 차를 권하며 몇 마디 나누던 이 이사장이 “전기난로를 좀 켜겠다”고 했다. “몸의 발전기는 잘 돌지 않는데 뇌의 발전기는 잘 돌고 있다”고 할 때 열정은 몸이 아닌 뇌에서 발산된다는 당연한 진리를 새삼 깨달았다. 아직도 출판도시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모르는 분이 아직 있는 게 좋아요. 천천히 알려지는 게 좋지요. 빨리 알려지면 홀딱 망해요. 과장되게 알려지는 건 굉장히 위험한 거죠. 요즘 아무 것도 없는데 자기 자랑부터 하잖아요. 그러면 폭삭 망하는 거예요. 금방 들통 나는데…”

예상 밖의 답변을 들려준 그는 대화할 때 ‘느리게, 천천히’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어린이날을 맞아 출판도시가 북적인다고 하자 이번에는 ‘바글바글’에 대해 논했다.

“천천히 하는 게 좋아요.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고, 예수는 2000년이 지나 저를 만나셨잖아요. 서서히 이루어집니다. 좋은 사람이 근사하게 바글바글한 건 좋은 일이죠. 사실 ‘바글바글’은 흉한 비유예요. 의성어가 아니라 의태어예요. 방글라데시에서 사람이 바글바글 하다가 압사했잖아요. 무질서한 걸 표현하는 유치한 비유죠. 바글바글 좋아하면 똑똑한 사람이 바보 됩니다.”

그의 삶의 배경을 알고 나면 ‘천천히 가기’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1940년생인 이기웅 이사장은 강릉 출신으로 유서 깊은 고택 선교장(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 5호)에서 태어났다. 선교장은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의 11대손인 이내번이 1760년에 지은 전통 한옥이다. 관동팔경을 유람하러온 풍류객들이 많이 들러 묵어간 곳으로 9만㎡에 이르는 집터에는 현재 아흔아홉칸 안 채와 사랑채 등 모두 300칸에 이르는 조선시대 사대부 저택의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선교장의 사랑채 이름이 열화당(悅話堂. 기쁘게 정담을 나누는 집)이다. 현재 작은 도서관으로 꾸며놓은 열화당은 옛책을 포함한 3,500권의 도서를 소장하고 있다. 이기웅 이사장이 도서출판 열화당을 1971년에 시작한 것도, 출판도시를 기획한 것도 다 선교장과 연관이 있다.

어릴 때부터 책 만드는 일 꿈꿔

 

“어릴 때 선교장에서 큰집과 작은집까지 대가족이 다 모여 살았어요. 어른들이 사랑채 열화당에서 문집과 시집을 만들 때 저는 그 옆에서 먹고 자고 했어요. 열화당에 꿰메다 만 문집이 널려 있고 그랬죠. 문집을 한정부수 50부씩 만들었어요. 어릴 때는 책 심부름하는 게 귀찮았는데 자라면서 ‘이거밖에 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학교 다닐 때 문예반장도 하고 교지편집위원장하고 그랬지요.”

그는 ROTC 장교로 군대의 척박한 현실을 겪고 1966년 사회에 복귀해 출판사에서 일할 때부터 출판도시를 꿈꾸었다.

“출판사의 책상이 삐걱삐걱했어요. 사장님한테 책상 좀 바꿔달라고 했는데 들어주지 않더군요. 청운동에 있는 사장님 집은 으리으리했어요.”

출판사가 아닌 사는 집을 호화롭게 꾸민 사장을 보면서 그는 “최고의 공간을 조성해 책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했다. 좋은 공간에서 좋은 책이 나온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때 이런 현실에서 책을 만드는 건 거짓을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인간이 생각하게 하는 공간에서 책을 만들자’는 결심을 한 것이 출판도시의 출발이죠. 그런 생각은 우리의 선배들이 가르쳐주신 겁니다. 독자적으로 생각한 건 없어요.”

차분하고 여유롭게 얘기하던 그가 갑자기 이 부분에서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이 우리말을 뺏기고 괴로워했습니다. 우리말을 지키려고 한글학자들, 한글운동가들이 정말 고생했지요. 그런데 최남선 선생을 친일파로 몰아 반대하고 있어요. 그런 사람들을 상당히 싫어합니다. 비겁한 사람들이에요. 자기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창씨개명 했으면서 뭐가 잘났다고 남을 심판합니까. 최남선 선생은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초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못났기 때문에 일제에 강점당한 겁니다. 그 문제를 반성해야지 왜 그 시대에 태어난 불행 때문에 고생한 분들을 폄하하는 겁니까. 그래서 어떡하자는 건가요. 우리 정체성 찾기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 말, 우리 책을 진솔하게 만들자’는 생각에서 이 도시를 건설하게 된 겁니다.”

열화당은 잠깐만 둘러봐도 촘촘하게 공을 들인 흔적이 느껴지고 공간 배치가 넉넉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튼튼한 원목 책상은 전혀 삐걱거리지 않았다.  

“저는 집사람하고 24평 아파트에 사는데 행복해요. 우리 집사람은 100% 분리수거를 하고 휴지도 재활용해요. 한번 쓴 휴지로 기름기를 닦아낼 정도지요. 열화당은 돈을 함부로 쓰지 않습니다. 모범을 보이려고 애쓰며 삽니다.” 그는 입고 있는 옷을 무인양품에서 세일할 때 2만원에 산 거라고 소개했다.

 

파주 출판도시를 처음 찾았을 때 다들 감탄사를
연발하며 이리저리 기웃거리느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책상이 다닥다닥 붙은 좁고 열악한 출판사의 이미지를
한방에 날려 버린 대단위 단지라는 점, 150여동의
건물이 다 다른 모양인 데다 각각의 개성과 건축미를
뽐내고 있다는 점, 무엇보다도 기라성 같은 출판사들이
한 곳에 모여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

으리으리한 출판사, 24평 짜리집과 2만원 짜리 옷

“2만 원 짜리 두 벌 사서 번갈아가며 입어요. 제 옷은 다 3만~4만원을 넘지 않아요. 그런 데도 입고 나가면 20만원 줬냐고 물어요. 그렇게 보이면 되는 거죠.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음이 가난하다는 건 마음이 겸손하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겸허하고 물건을 잘 다룰 줄 알아야 해요.”

48만평 늪지대 위에 세워진 파주출판도시는 늪의 생태를 그대로 보존하면서도 금속, 나무, 유리 등 친환경 소재로 만든 진귀한 외형의 건축물로 가득하다. 전문 건축인들로부터 건축전시장이라는 평을 듣는 단지는 세계 출판인들의 필수여행코스가 됐다.

1988년에 범우사, 민음사, 평화출판사, 지식산업사, 문예출판사, 한길사 대표와 함께 등산을 하면서 출판도시를 만들자고 결의했을 때 이 이사장은 48세였다. 비슷한 나이였던 일행들과 의기투합이 잘 돼 꿈이 현실이 된 것이다.

그가 1991년에 파주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 사업협동조합 이사장을 맡으면서 구체적인 사업 추진에 들어갔고 1999년 9월 9일 아침 9시에 인포메이션 센터를 오픈했다. 2000년부터 입주가 시작됐고 열화당은 2004년에 입주했다. 지금도 건물이 들어서고 있지만 1단계 사업은 2007년에 완료됐다.

열화당은 최근에 ‘오래된 풍경’ ‘李南奎 한국 유리화의 선구자’ ‘문화의 풍경’ ‘강운구 사진론’ ‘루브르의 하늘’ 등을 펴냈다. 미술서적이거나 사진집이어서 가격대가 만만치 않다. 전문서적에 가까운 책을 주로 내는 열화당을 어떻게 운영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는 “이런 책을 내면 독지가가 생겨요”라고 했다. 또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위치한 강남출판문화센터 건물에서 열화당 운영비가 나온다고 했다.

“친한 사람들이 모여 협동조합을 연습해보자며 만든 거예요. 동업하면 망한다는데 우리는 얼마나 의가 좋은 데요. 강남출판문화센터를 같이 했던 한길사, 민음사도 나란히 파주로 왔어요. 여기로 올 때 그쪽을 팔려고 했는데 안 팔렸어요. 뭐든 자연에 맡겨요. 지분이 많이 올라 거기서 집세가 나와요. 용돈이 들어오니까 그걸로 살아요. 우리 출판사 차장한테 통장 맡겨놓고 돈은 잊고 살아요.”

그는 막스 베버가 “군인과 목사, 교사가 직업으로 성공하면 그 사회는 흔들린다”고 한 말에 출판인도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우창 고려대 교수가 고대 출판부장할 때 말씀을 다루는 ‘교사, 판사, 목사’를 진리의 기구로 거론했는데, 거기에 책 만드는 사람도 포함시켰어요. 그 글을 오려갖고 다니면서 마음에 새겼지요. 3,500년 전 선사시대 때 이미 문자를 가진 인간은 만물의 영장입니다. 영성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 스스로 영장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가 됐어요. 인간은 모순을 안고 살지만 겸허해야 합니다. 책 만드는 심성을 가져야지요. 이 도시를 ‘책 농사 짓는 곳, 책 농장’으로 부릅니다.”

출판사와 저자들이 책이 안 팔려서 힘들어 하는 현실을 얘기하자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굶는 사람 있나요?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고 천국이 저희의 것이라고 했어요. 가난이 축복입니다. 1960년대의 가난은 저의 교과서였습니다. 그때는 그 상황을 굉장히 불행하게 생각했는데, 가난에서 깨닫고 무얼 했잖아요. 직업으로, 생계유지하는 방편으로 출판하는 걸 원치 않아요. 그러면 책 만들 자격 없어요. 가능하면 깨달음이 깊은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책을 만들어야 합니다. 머리로 들어가는 밥과 눈으로 들어가는 밥을 떠올리며 한 권 한 권 조심스럽게 다루는 농부들이 여기에 꽉 찼으면 좋겠어요.”

"가난이 축복입니다. 직업으로, 생계유지하는 방편으로
출판하는 걸 원치 않아요. 그러면 책 만들 자격 없어요.
가능하면 깨달음이 깊은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책을 만들어야
합니다."

땅 공부로 인생 깨닫다

이기웅 이사장은 자신이 최근에 쓴 ‘내친구 강운구’라는 책을 보여주며 흐뭇해했다. 사진가 강운구 씨가 전국을 다니며 사진 찍는 모습을 담은 사진집이다. 30년 지기인 강운구 씨를 따라다니며 ‘땅 공부’를 했다는 그는 부동산으로서의 가치가 아닌 ‘땅의 기운, 땅의 역사성, 사람이 살던 모습, 자연, 지세, 자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움, 인간이 땅에서 겸손하게 살았던 흔적들’을 봤다고 했다.

“땅을 잘 모르니까 강운구가 주목하는 게 뭔가를 봤지요. 그게 공부예요. 강운구가 훈련된 눈으로 한 곳을 응시하면 비호같이 쫓아가서 보고 땅을 주목하는 강운구를 찍었어요. 강운구는 땅을 꿰뚫는 박사예요. 그걸로 박사학위 논문도 썼어요.”

땅이 주는 교훈에 대해 묻자 “구체적인 답변을 하면 바보 됩니다. 제가 말하는 건 완벽하지 않아요”라고 했다. 다만 “우리나라는 최고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최고의 땅을 주셨어요. 그런데 인간들이 다 망가뜨렸어요. 땅이 주는 영감이 있어요. 땅은 종교입니다”라고 덧붙였다.

꿈꾸던 출판도시와 꿈이 실현된 지금의 출판도시, 과연 괴리감은 없을까. 이기웅 이사장은 “도시 계획적으로나 출판 산업의 성과를 봤을 때, 많이 좋다”고 했다. “활성화가 안 됐다고 하는데 저는 짧은 기간 동안 활성화됐다고 봅니다. 집값이 올라야 된다고 하는데 물론 올라야겠지만, 그러려고 지은 건 아니지요.”
그 보다는 기록문화재인 책, 그 가운데 사전의 출판이 궤멸 상태에 빠진 것을 걱정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때 사전을 가장 먼저 개발했어요. 디지털시대여도 기본이 서야 합니다. 100권이든 200권이든 종이 사전을 만들고, 디지털로 보급을 해야 합니다. 인간은 존재자체가 종이책을 제작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북시티에서 기본적인 작업을 하지 않으며 실패합니다.”

균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는 조중동과 한겨레, 서울신문을 종이신문으로 꼭 읽는다고 했다.

“끊임없이 개혁을 해야 합니다. 출판도시를 ‘어린이로부터 배우는 도시’로 설정해서 지난 9년 동안 어린이 축제를 열었어요. 착한 농부와 어린이 같은 마음으로 책 농사를 짓고, 교정을 보고, 말을 선택하고, 몇 부 찍을까 고민하고, 환경을 생각하자고 후배들에게 지겹게 얘기했습니다.”

요즘 이기웅 이사장은 출판도시 2단계 사업 추진 일로 분주하다. 1단계는 출판업체가 주로 입주했다면 2단계는 싸이더스F&H, MK픽처스, 청어람 등 영상 관련업체가 참여했다.  나아가 3단계도 생각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100만평이 넘는 논을 보면서 꿈꾸고 있습니다. 책농사와 벼농사가 함께 노니는 곳이 됐으면 좋겠어요. 1단계는 허허벌판에서 입주자와 건축가들이 위대한 생각을 하면서 위대한 힘을 동원했어요. 2단계는 선한 계약을 했어요. 자신감의 발로라고 할 수 있지요. 3단계는 꿈을 꾸며 말을 아끼는 중입니다. 현재 구상한 것을 건축가가 그리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3단계는 국가가 해야 합니다. 수십 년 걸릴 겁니다. 역사의 한 점이라고 생각하며 일하는 거예요.”

바쁜 그가 요즘 국제문화도시교류협회 대표직을 또 맡았다. 현재 선교장을 지키고 있는 조카 이강백 씨(고택소유자협회 회장)가 국제문화도시교류협회 이사라며 우리의 아름다운 뿌리 네트워크를 국제적인 아름다운 도시들과 연결하는 일이 주 사업이라고 했다.

20억 원 땅 기부, 열화당도 기부 예정

“자서전쓰기 캠페인, 안중근 알리기 캠페인, 영혼도서관 건립에 관여할 계획이긴 한데 아직 잘 모르겠어요. 인근 헤이리에 20억 원 상당의 땅이 있었는데 국제문화도시교류협회에 기부했어요. 10억은 집사람 이름으로 등기가 돼 있었어요. 기부 의사를 밝히자 선선히 ‘원래 당신 건데 그러세요’ 하더군요. 엄연히 당신 이름으로 등기돼 있고 인감증명이 있어야 한다니까 ‘그럼 내꺼 맞네’ 하더니 바로 찍어줬어요. 강남출판문화센터도 꽤 올랐는데 그것도 기부할까 해요.”

이 이사장은 “부자는 아니지만 부자 노릇을 잘해보려고 한다”며 웃었다. 열화당 건물도 기부할 예정이라고 했다.

“우리 아들이 유산을 하나도 안 받겠다고 하니 열화당 전체를 기부해서 재단 정신에 맞는 책을 만들도록 할 예정입니다.”

열화당은 처음부터 라이브러리 개념으로 지은 건물이다. 신관과 구관을 연결한 큰 규모의 4층 건물 구석구석이 작은 도서관으로 꾸며져 요소요소에 책들이 진열돼 있다. 특히 오랜 기간 모은 고서가 즐비했다.
이기웅 이사장은 이런 저런 정리가 끝나면 또 땅 공부를 하러 갈 거라며 밝게 웃었다. 

“그동안 땅 공부한 게 다 이유가 있더군요. 땅 공부를 하니까 사람의 역사, 땅의 역사, 족보가 다 보여요.”
땅 공부가 지금 하는 일에 두루두루 도움이 된다는 이기웅 이사장은 살아 있는 동안 계속 봉사할 거라며 밝게 웃었다.

인터뷰/이근미 편집위원  www.rootlee.com
사진 / 이승재 기자  fotolsj@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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