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라드의 전설' 변진섭을 만나다
'발라드의 전설' 변진섭을 만나다
  • 미래한국
  • 승인 2011.05.17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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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떴다 송만기]

 
연예인 스타들을 보면 막연한 호기심으로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들의 삶은 어떻게 시작됐고 스타가 되면 어떤 변화가 올까, 여러 상상을 한다.
나는 오늘 그런 마음으로 변진섭을 만나러 목동 SBS 방송국 로비로 차를 몰고 달려간다. SBS방송국 로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방송국 로비에 들어서니 저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변진섭을 만난다.

“어~ 형! 오랜만이에요~”
귀여운(?) 목소리에 세련된 옷을 입은 변진섭과 매니저를 만난다.
“어이구~ 잘 지냈어?” 일상적인 인사지만 표정으로 반가움을 느꼈다. 언제나 편안한 부잣집  막내아들의 모습과 가수로서의 스타가 아닌 청년 같은 이미지의 변진섭이다.
로비에 있는 빈자리에 앉았다.

“요즘 어떻게 지내?”
“예~ 뭐 이젠 가정이 있고, 애가 둘이나 있으니 행사나 방송을 안할 때는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요. ”
“아이들은 잘 자라지?”
세월로 봐서는 영락없는 아저씨가 다 된 모습이어야 하는데 얼굴은 동안이다.

변진섭은 어려서 아버지가 엄격해 반항심이 있었으나 결국 아버지의 자식 사랑을 나이를 먹고 자식을 키워보니 알게 됐다고 어른스럽게(?) 너스레를 떤다.
“요새도 지인들하고 밤에 잘 놀고 그러니?”
“아니에요~ 요즘은 그렇게 보낼 여유가 없어요. 집사람 친한 사람들과 가끔 만나고 이젠 20대 때와 다른 것 같아요.”

그는 내 눈에 아주 깨끗한 모습만 각인돼 있다. 그러면서도 나이든 지금 가정에 충실하며  자식에 대한 사랑을 베푸는 모습이 어느 부모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나이를 물어봤다.
“마흔 여섯이에요~”
“뭐? 벌써 그렇게 됐니?”
어린 대학생 가수 후배 청년을 만난 것이 25년이 넘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험난한 세월인가? 아름다운 세월인가? 아마도 변진섭은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을 것 같다. 변진섭은 그의 착하고 아름다운 표정과 마음을 이미 노래로 다 표현했지만 대화를 통해 들으니 새삼스럽다.
변진섭을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발라드 창시자(?)라고 하면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감히 그가 발라드의 원조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변진섭을 처음 만난 것은 그가 20대 초반인 87년경 경희대 2학년 재학 시절 강남의 한 카페에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 시절 조덕배 최호섭 등과 어울리며 첫 만남

그를 처음 보았을 때 어리고 풋풋한 대학생의 앳된 모습이었고, 그저 착한 동생이었다. 형인 나에게도 어리광을 부리듯 다른 선배들한테도 편한 동생으로 다가온 것을 기억한다.
그의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의 느낌은 특별했다. 기타 반주에 무척 쉽게 노래를 잘하는 모습이 확연히 눈에 띄어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변진섭은 고음 처리를 대단히 쉽게 했다. 얼굴에도 힘든 표정이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내공이 쌓인 발성이 편하게 느껴진다.

이 당시 변진섭이 잘 놀던 공간은 강남구 방배동 삼호 아파트 뒤쪽이었다. 변진섭을 비롯해서 ‘꿈에’를 부른 조덕배 ‘세월이가면’의 최호섭, 작곡가 김지환, 하광훈 등의 당시 여러 무명 가수들이 방배동 문화의 산실인 여러 카페와 개그맨 주병진이 하던 ‘제임스딘’ 카페, 무명가수 신의준의 ‘아라신’ 전태영의 ‘회색도시’와 물이 좋다던 ‘준’ 등에서 밤마다 노래가 좋아 출연료 없이 기타 하나로 노래하고 즐기던 공간이었다.

변진섭은 이러한 공간에서도 실력 있는 가수로 성장해 갔다.
대학생 신분으로 음악에 미친 변진섭은 다른 여러 곳에서 출연료를 많이 받고 노래를 했지만 이들 카페에서는 그저 노래가 좋아서 소위 수준 높은 고급 ‘딴따라’의 길을 준비했던 시절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곳은 나도 가수 활동과 더불어 놀던(?)공간이었다.

여기에서 만난 변진섭은 후에 신사동에 만들어 놓은 ‘아미’라는 내 조그만 카페에도 자주 와서 노래를 불렀다. 이때까지 변진섭은 무명이었지만 실력이 출중했고, 그의 노래를 좋아하는 팬들이 하나 둘씩 늘어났다. 언제나 그가 놀러 오는 날이면 장사도 잘 됐고 카페 분위기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최고의 연출이 되곤 했다.

그 당시 나 같은 경우는 파워풀한 창법으로 소리를 질렀고 노래는 힘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했는데 변진섭은 정반대였다. 무척 쉽게 노래를 불렀다. 창법 역시 아주 편한 미성과 끝에 만들어지는 비브라토가 매력적으로 만들어졌다. 그가 대단한 가수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대학생 변진섭은 언제부터인가 승용차를 몰고 다녔다. 당시 학생들이 승용차를 몰고 다닌다는 것은 집이 부유한 오렌지족이 아니면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변진섭은 이미 통기타 밤무대에서 최고의 출연료를 받으며 학생 신분에 맞지 않는 큰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변진섭은 자기 승용차를 자기가 번 돈으로 구입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네 차니?” 하고 물으면 집에 있는 차라고 겸손히 말하던 것을 기억한다. 혹시 남에게 건방지게 보일까봐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사실 변진섭은 1985년에 쉘브르라는 한국 최고의 통기타 산실에서 정식으로 오디션을 통해 무대에서 노래를 했다. 그는 이곳에서 언더그라운드 최고의 가수 박강성, 최성수, 남궁옥분, 시인과 촌장, ‘무정부르스’의 강승모, ‘애증의 강’의 김재희  ‘아베마리아’의 김승덕, 최고의 뮤지션 보컬리스트 박진광 등 좋은 선배들을 만나면서 발라드 가수로의 탄생을 예고하며 승승장구한다.

 

쉘브르 시절부터 실력 인정, 이종환 권유로 신인가요제 출전

쉘브르 시절 남들은 다 1,000원 2,000원을 일급으로 받아갔다. 그러나 변진섭은 이종환사장의 특별 배려로 3,000원을 받았다. 본인은 학생이기에 그렇게 받았다고 하지만 그의 능력이 출중해서 3,000원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쉘브르 시절 이종환 사장으로부터 MBC 신인가요제에 나갈 것을 권유받고 출전해 은상을 수상한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기획사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온다. 그렇게 그는 무명시절은 아주 짧게 지나간다. 노래를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프로로 한 걸음씩 옮겨지는 과정에 만난 그의 모습이 대중적으로 성공할 것이란 확신이 든 것은 얼마가지 않아서다.

기타 하나로 방배동 카페 골목에서 기량 닦아

고2 때까지 반에서 2, 3등 하던 공부는 기타를 치면서부터 60명 중 12등 18등 25등 36등으로 떨어지니 아버지는 기타를 베란다에 던져버리고, 노래를 못하게 하고 기타도 못치게 했었다.
5남매 중에서 아주 공부를 잘하던 막내아들이 명문대 의대에도 충분히 들어갈 수 있다고 담임선생님도 말했건만 변진섭은 기타치며 노래만 했다. 그가 소위 ‘딴따라’가 될까봐 아버지는 엄하게 반대를 했다. 그러나 아버지도 변진섭의 머리가 커지니 어쩔 수 없었다.

변진섭은 회상한다.
“이때 어머니가 저 때문에 많이 늙으셨어요. 그런데 제가 노래로 성공하니까 어머니가 제일 기뻐하셨습니다. 아버지는 후에 하신 말씀이지만 가끔 술집에 가시면 밴드를 보고 그렇게 아들이 될까봐 반대하셨답니다.”

대학 시절도 평탄치(?)가 못했다. 변진섭은 고민이 많았다.
노래를 부르고 밤 통기타무대에서 돈을 많이 받고 잘 나갔지만 정체성에 대한 혼돈은 언제나 그를 괴롭혔다.

“내가 가수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었고, 공부를 하면 내가 어떻게 뭘 해야 하지? 좋아서 하는 음악이지만 분명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많은 고민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고민 속에서도 음악에 대한 열정과 끼를 계속 발동하고 있었다. 결국 대학 때 학교밴드 ‘탈무드’ 리드싱어를 하며 공부를 등한시하자 이때도 아버지가 음악을 반대해 힘들었다고 한다.  학교에서 밴드 그룹을 하니 공부는 뒷전이고, 수업을 빼먹으면서 노래 연습만 하니 학점이 나올 리가 없었다. 대학 4학년 때 변진섭은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가 된다. 그러나 변진섭이 스타가 되고도 4학년 때 제때 졸업을 못하고 코스모스 졸업을 하게 된다.

학과장인 김무성 지도교수가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를 보유한 것만으로도 학교가 홍보되고 대단한데 졸업을 안 시켜준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라면서 변진섭에게 시험 볼 기회를 제공해 경희대 한방재료 가공학과를 반학기 늦은 가을에 졸업하게 된다. 그는 김무성 교수가 이글을 본다면 그때의 배려에 감사함을 전하고 싶단다.

변진섭의 할아버지는 재벌이었다.
변진섭이 88년 ‘홀로 된다는 것’이 히트하면서 스타가 되고 돈을 많이 벌게 된다. 잘 살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움이 자라 돈을 많이 벌 때 모든 경제권을 어머니에게 드리고 얼마를 벌었는지를 몰랐다고 한다.
“그때 첫 곡이 뜨고 2집에서 ‘너에게로 또다시’ 가 뜨고 그 당시 번 돈이 얼마나 될까?”
나는 슬쩍 질문을 던진다.

“그때 1년에 한 10억은 벌었을 거예요~”
“10억이나? 야~ 신났겠다.”
88년의 일이다. 나는 그 당시의 기분을 묻는다.
“그런데 그게 계속 똑 같은 수입이 안 되고 적어지던데요~
“그때 23년 전의 10억이면 지금 가치로는 100억 정도 될텐데...“
나는 부러운 듯 혼자말을 했다.

1집 ‘홀로 된다는 것’에 이어 2집 ‘너에게로 또다시’는 더 대박이 난다.
나는 생뚱맞게 질문을 해본다.
“본인 노래 중 어떤 노래가 제일 좋아?”
예상 밖의 노래를 말한다.
“‘너에게로 또다시’요.”
“오잉~ ‘홀로 된다는 것’ 일 줄 알았는데...”
두 번째 노래를 물으니 ‘너무 늦었잖아요’ 세 번째를 물으니 ‘희망사항’이라고 답한다.

‘너에게로 또다시’가 가장 애착

사실 발라드란 분야는 변진섭 전에도 있었지만 그렇게 많이들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변진섭이 성공하면서부터 발라드가 한 장르가 되면서 변진섭으로 인해 생긴 분야라고까지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시 말해 변진섭 같은 스타일 노래와 목소리가 발라드 분야라는 구체적인 장르로 형성이 분명하게 된 것이다. 장르가 변진섭을 통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변진섭은 팬들로 인해 많은 에피소드가 있다.
노래가 히트하면서 심야방송을 하게 된다. 12시에 방송이 끝나면 많은 학생들은 그의 동선을 다 알고 방송국과 집 앞에서 30~40명씩 떼지어 기다린다. 지방 학생들은 대책도 없이 상경해 변진섭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변진섭은 매일 탈출을 해야 했고, 참으로 어려운 일도 많이 생긴다. 어머니는 지방에서 온 학생들에게 밥도 사주고 여관도 잡아주어 단체로 자게도 해주는 일이 거의 매일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당시에 돈을 많이 썼다고 한다.
매일 많은 팬레터가 집에 왔다. 선물도 마찬가지다. 하루는 어떤 여학생이 학 천 마리를 접어서 상자 안에 넣어 보낸 일도 있었다.

변진섭은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기에 팬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늘 잊지 않고 있다고 한다. 많은 팬들 중에서도 어려운 사람을 보면 남모르게 도왔다. 변진섭은 대학 입학금이 없는 학생을 비롯해서 많은 어려운 형편에 있는 팬들을 도와주었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변진섭은 아주 따뜻한 사람이다.

6월부터 전국 7개 도시 콘서트에 나서게 된다.
나는 가수 변진섭을 어려서부터 보아온 사람으로 그가 앞으로도 또 한번 대박 나는 인생이 돼 소외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행복감을 갖기를 기대한다. 마음이 착하고 깨끗하고 노래 잘하는 가수 변진섭! 그가 우리 독자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한다.

“미래한국 독자 여러분! 언제나 행복하시고 건강하시고 하시는 사업과 일들이 저처럼 한번쯤 대박 나시길 기원합니다. ‘미래한국’을 꼭 구독해서 여러분의 좋은 글을 보고 세상을 배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변진섭 씨! 아름다운 모습을 꼭 다시 한번 보여주기를 팬으로서 기대합니다.”

독자들의 답일 것이다.
그의 멋진 활동을 기대한다.

 

인터뷰/ 방송인 송만기 manki712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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