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가요제 스타 ‘높은음자리’ 김장수
대학가요제 스타 ‘높은음자리’ 김장수
  • 미래한국
  • 승인 2011.06.10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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떴다 송만기

 
1985년 MBC대학가요제에서 ‘바다에 누워’를 부른 ‘높은음자리’의 가수 김장수를 기억하는가. 이 혼성 듀엣(여성멤버 임은희)의 김장수는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는 대박을 터트렸다.

말이 대상이지 당시 대학가요제 대상의 위상은 정말 대단했다. 언더그라운드 가수 지망생들은 물론 기성 연예계에서도 그것은 ‘대통령 당선되기보다 어렵다’는 말로 통했다. ‘에이~’ 라고 핀잔할지 모르지만 또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하늘의 별따기 보다도 어렵다’는 말이 통용되는 분위기이었다.

전국에 있는 모든 대학에서 수십만 명의 학생들이 저마다 갈고 닦은 실력으로 대학가요제 출전을 꿈꾸던 시절이었다. 지방 예선을 거쳐 본선에서 경쟁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영광이었고, 대상을 받은 사람은 본인의 영예는 물론 소속 학교 홍보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대학가요제 전성시대, 대상·10대 가수상으로 대박  

요즘 거의 모든 대학이 실용음악학과를 설치하고 있다. 실용음악 전공 학생들의 꿈은 지금도 대학가요제나 최근 TV에서 인기 있는 라이브 방송 ‘위대한 탄생’ ‘K2’ 등 노래자랑에 출전해서 입상을 하는 것이다. 요새는 그것이 가수나 연예인이 되는 등용문이 됐다. 목숨 바쳐 출전의 기회를 잡으려 하는 이유는 ‘팔자’가 피기 때문일 것이다. 허각, 존박 이런 가수들이 그런 콘테스트를 통해 인생 대박을 터트리고 있다.
가수 김장수는 MBC 대학가요제 대상을 받으며 당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높은음자리는 이듬해인 1986년 MBC, KBS에서 10대 가수 신인상을 수상했다. 거기에 KBS 가요 톱10에서 ‘바다에 누워’가 5주 연속 1등을 차지하고 그후 ‘나 그리고 별’이 4주 연속 1등을 차지하는 등 기염을 토했다. 김장수와 임은희의 높은음자리는 이어 ‘새벽 새’ 란 노래로 3주 연속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미래한국>의 ‘떴다 송만기’가 당시 태풍을 몰고 온 부산 사나이 김장수를 만났다. 필자와는 허물없는 사이인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매니저가 누구인데 그때 그렇게 잘 나갔어?”
“매니저 없었어, 내가 다 했어...”

대답이 싱거웠지만 김장수는 모든 것을 혼자 밀어붙인 대단한 기획자, 가수, 작곡자였다.
“야, 그때 돈 아주 많이 잘 벌었겠네?”

“그렇지 뭐, 돈은 잘 벌었는데 이게 빛 좋은 개살구라. 지금도 의상비가 50만원인데 그때도 그 물가에 의상비가 50만원이나 했고, 잘 버는 돈이 의상비로 나간 것만 수천만 원이 더 될 걸…” 연예인들이 이런 형태로 지출이 많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새삼 알게 됐다.

잘나가던 높은음자리는 1987년 해체된다. 해체됐지만 남은 돈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팀이 해체되니 팬도 김장수 팬과 임은희 팬으로 나눠진다. 그후 임은희는 노래를 접게 되고 김장수는 본격적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대학가요제에서 자신 있게 노래하던 모습은 그의 오래된 경력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과거 경력을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김장수는 1975년 고2 때부터 가발을 쓰고 부산의 밤무대 나이트클럽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했다. 그가 부른 주 레퍼토리는 ‘삐빠빠룰라’ 같은 올드 팝이었다. 그가 고등학생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그의 멤버들은 그의 뛰어난 가창력과 기타 실력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기용했다.

고교 시절부터 나이트클럽 공연, 학교성적도 최상위권

그가 노래를 하게 된 재미 있는 일화가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74년 낙동강 옆에 있는 경남 양산의 물과 쇠가 있다는 ‘물금’이란 곳에서 콩쿠르에 출전했다. 여기서 보기 좋게 떨어졌다. 김장수는 오기가 생기고 열을 받아 도저히 잠도 잘 수 없을 만큼 자존심이 상했다. 이때부터 영화배우의 꿈을 접고 가수로 방향을 새로 설정하고 음악에 미치게 된다.
영화배우가 되기 위해 무에타이를 비롯 복싱 등 각종 스포츠에 심취하며 준비했었는데 노래자랑에서 탈락한 것을 계기로 가수의 길을 가려고 결심한 것이다. 부단한 노력 끝에 고2가 되자 밤무대 가수를 할 정도로 실력이 향상된다. 이제 김장수는 통기타 가수로 부산의 여러 카페에서 실력 있는 가수로 활동하게 된다.

당시 부산에서 활동하던 무명 가수들로 장계남 이택림 유가화 등이 있었다. 김장수는 가수로의 실력이 출중해져 결국 대학에 들어가 노래로 성공하며 ‘물금’ 동네 노래자랑 탈락의 한풀이를 하게 된다.
김장수는 중학교 때부터 소위 ‘노는 애들’ 그룹에 있었다. 그러면서도 공부를 열심히 했다. 공부를 잘했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실업계인 부산공고 자동차학과에 들어갔다. 거기서 자동차기능사 자격증도 따면서 반에서는 늘 1등을 했다.

밤에 노래하느라 집에도 안 들어가면서도 반에서 1등을 할 수 있었던 건 그만큼 자기관리에 철저했기 때문이다. 그는 군대에 다녀온 후 부산 동의대 체육학과를 수석으로 입학했다. 공부도 잘했지만 운동도 만능이어서 중2 때부터 중3 때까지 축구, 무에타이, 복싱, 태권도를 했고 중2 때부터 기타연습을 하며 노래도 꾸준히 했다. 그리고 대학가요제 부산 예선을 거쳐 1등을 하며 서울에 입성하고 1985년 드디어 대학가요제 대상을 받는 ‘인간 승리’를 일궜던 것이다.   

그는 오랜 무명가수로서 갈고 닦으며 스타가 되기 위한 준비를 철저히 했다. 본선에 출전하기 위해 서울에 와서 뱉은 첫 외마디 함성이 “서울을 먹자!” 였다.
서울에서 춘천으로 가는 구 도로에서 마석으로 가게 되면 큰 대로변 왼쪽에 ‘김장수의 높은 음자리’라는 카페를 볼 수 있다. 그곳이 김장수가 하는 라이브 공간이다. <미래한국> 인터뷰 장소도 그 카페였다.

 

김장수와 함께한 산악자전거 타기, 필자는 병원 신세 

카페 내부에는 조명이 화려하게 너울져 있고, 화려하고 큰 무대가 중앙에 있었다. 최고급 음향기기에서 멋진 음악과 김장수의 라이브 화면이 대형 화면에 보였다. 내부 의자들도 편안한 소파로 잘 꾸며져 있었다.
얼마 전에도 이곳에 와서 김장수의 라이브를 보았다. 그의 실력을 다시 한번 실감하는 자리였다. 방송을 통해 본 것과도 큰 차이가 있었다. 화려한 무대 매너며 가창력은 청중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고, 그날도 꽉 찬 청중은 그의 노래에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 공연에서 가수 김장수의 준비된 과거와 지나온 세월이 대중을 위해 봉사하는 가수라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됐다. 음악으로 받은 감동은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 사는 행복도 새롭게 느껴지는 산소 같은 역할이 되기에 김장수 음악은 대중에 대한 봉사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그는 여러 소외된 사람들을 돕고 있고, 봉사활동에도 많이 참가한다.

김장수의 아들 김시환은 숭실대 실용음악과를 수석으로 들어갔다. 매일 밤 아버지 카페에서 연주를 하는 그의 기타 실력은 아버지 못지않게 출중하다. 김시환은 특히 퓨전 음악에 심취해 있다. 퓨전 뮤지션 ‘야니‘를 좋아한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아서인지 드럼 건반 등 모든 악기를 잘 다뤘다. 
김장수는 마석에 산다. 1주일에 서너 번 산악자전거(MTB)를 탄다고 한다. 그는 ‘가슴이 뻥 뚫린다’며 MTB를 예찬했다. 그가 타는 자전거는 1,500만원 정도 하는 고가이다. 필자도 자전거 매니아이기는 하지만 주로 포장된 도로에서만 탄다. MTB를 해본 적이 없어 궁금했는데 김장수가 산악자전거를 타자고 제안해 함께 타봤다.

지인과 함께 셋이 천마산 17km를 종주했다. 비포장이고 돌이 많은 고비탈 산을 타고 올라가는 그의 실력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분하고 안정되고 숨도 차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노련했다.
200m쯤 올라갔을까? 나는 도저히 숨이 가쁘고 힘들어 페달을 밟을 수 없었다. 10년 경력의 김장수는 전혀 동요 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그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나에게 큰 소리로 코치했다.
“핸들을 당겨! 앞으로 가슴을 숙이고! 페달을 천천히! 기아는 1단!”
필자는 도저히 오버페이스로 올라 갈 수가 없었다.

“난 내 능력으로 안 된다. 다시 내려갈게. 너희들이나 타고 가!” 300m도 못가 포기 선언을 했다.
필자와 같이 주일마다 연예인 축구를 하고 체력에는 자신이 있는 사람이 MTB로 산을 탄다는 것이 불가항력이라니...충격이었다. 바이크에서 내려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만기야!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약수터니까 거기까지만 가자~”
“얼마나 가야 되는데?”
“응, 조금이다~” 그는 경상도 사투리로 다정히 말한다. 물론 웃는 모습이다.
“젠장, 저놈은 뭔 체력이 저렇게 좋아 아무렇지도 않지?” 속으로 생각하며 김장수의 말에 출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등성을 하나 넘었다. 그런데 필자는 가슴이 또 터질 것 같았다.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나는 더 이상 못간다, 못가!” 마지막 항변인가 했더니 이런 일은 몇 번이고 반복됐다.
김장수는 전혀 힘들지도 않은 모습으로 필자를 달랬다.
“만기야~ 이제 다 왔데이~ 저것만 넘으면 된~다.”

속고 또 속았다. 그러다 보니 정상에 다다랐고 곧 내려가는 길만 남게 됐다.
결국 17km를 세시간 반 정도에 넘었다. 김장수는 이 코스가 초보코스라며 조금도 힘든 척을 안했다. 이날 필자는 ‘인간 승리’를 했다. 인간미 좋은 김장수 때문에 첫 산행을 무사히 마친 것이다. 그 후로 필자는 양쪽 무릎이 아파 병원에 가야 했고, 엉덩이 근육과 팔 등의 통증으로 1주일 이상 고생했다.

‘장수’하는 엔터테이너 김장수 

그에게 산악 자전거 타는 요령과 방법을 배워 이젠 어떤 자전거 코스도 탈 자신이 생겼다. 이렇게 김장수는 마석에서 카페를 하고 산악자전거를 즐기며 살고 있었다. 그러면서 많은 팬들을 즐겁게 해주는 엔터테이너로 살아가고 있다.

김장수와 인터뷰할 때 그의 부인 이희정 씨도 함께 했다. 차분하고 지적인 이미지로 김장수를 편하게 해주는 듯했다. 그는 연예인 축구팀 ‘싱어스’에서 신나게 축구도 한다. 멋진 가수 김장수가 최고로 장수하는 ‘장수 가수’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맑은 날씨에 ‘김장수의 높은음자리’ 카페를 나오면서 괜히 기분이 좋아지며 콧노래를 부르는 것은 왜일까. 

“저 바다에 누워~ 외로운 물새 될까, 뚜뚜르 뚜뚜뜨르르르…”

 
인터뷰/ 방송인 송만기 manki7124@hanmail.net

가수 방송인, 라이브하우스 ‘뉴욕’ 대표, (주)웰리치 인베스트먼트 부회장, 극단 ‘大河’ 연극 활동, 싱어송 라이터 가수로 7집 앨범 발표,  전 국가대표 하키선수 및 청소년 대표 주장, 단국대 경영학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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