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기사(knight)는 홀로 자랄 수 없다
자유의 기사(knight)는 홀로 자랄 수 없다
  • 미래한국
  • 승인 2012.03.16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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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를 모르는 시대

이원우 칼럼니스트

애국가의 고비는 늘 3절이었다.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국가(國歌)답지 않은 밤하늘 묘사에 ‘공활’이라는 낯선 단어가 좀처럼 입에 붙지 않았다. 첫 어절이나마 쉽게 튀어나오도록 하려면 ‘3절 = 세 번째 계절 = 가을’이라고 하는 나름대로의 연상장치를 만들어 둬야 했다. 이 고비만 잘 넘기면 한 호흡에 불러지는 4절은 비교적 쉽게 넘어갈 수 있었다.

올해 서른을 맞은 나는 ‘국민학교’를 졸업한 마지막 세대다. 어쩌면 전교생이 운동장에 집합하는 전체 조회시간에 애국가를 4절까지 불러 본 마지막 세대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가사 중간에 뚫려 있는 빈 칸을 채워야 하는 ‘애국가 퀴즈’를 풀었고, 연필 한 다스라도 받아보기 위해 최대한 예쁜 글씨로 ‘애국가 경필대회’에 나갔던 기억도 난다. 내가 지나치게 좋은 교육을 받은 걸까? 요즘 초등학생들은 당장 1절을 부르기에도 힘겹다는 뉴스가 지난 3·1절 신문 1면을 장식했다. 3절 가사를 쉽게 외우는 나만의 노하우가 머쓱해졌다.

자유로 위장한 편협한 이기주의

 
이 뉴스가 실시간 검색 순위에 오르내린 후 각 공공기관과 학교에서 애국가의 가사를 확인하는 소동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이제 와서 눈에 보이는 가사를 챙기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일까. 애국가가 경시되는 현실 안에는 우리 사회가 놓치고 있는 뭔가에 대한 아주 강력한 암시가 숨어 있음을 먼저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 당장 나에게 눈에 보이는 보상을 줄 수 있는 일이 아니면 하지 않는다는, 자유(自由)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기주의에 지나지 않는 편협한 감정을 우리가 아이들에게 교육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유라고 해서 모든 제약을 무턱대고 거부한 채 혼자만의 이득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진정한 자유주의자는 자유라는 단어에서 가장 먼저 ‘책임’을 떠올려낸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지만 문명이 인간을 구속한다”고 말한 루소는 틀렸다. 진실은 그 반대인 것이다.

갓 태어난 망아지조차 출생 후 하루가 안 돼서 걷고 뛸 수 있지만 인간은 어머니의 보살핌이 없으면 잠시도 생존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로 태어난다. 하지만 우리는 나약함을 차례차례 극복하고 그 과정에서 파생되는 무거운 책임을 이겨내면서 제 몫의 성장과 진보를 이룩해 나가는 존재다.

이 준엄한 현실은 교육의 장(場)인 학교에서부터 왜곡되고 있다. 있는 책임을 없다고 말하는 게 참교육인 것처럼 돼가고 있다. 결국 모든 모순은 학생인권조례로 응집돼 폭발했다. 그러나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라는 일면 그럴듯한 명제로 도배된 이 규칙이 전파하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어른을 만만하게 보는 하극상이다. 학교의 주인이 학생일 수 없으며 그들은 다만 ‘주인공’일 뿐이라는 진실을 말해주는 어른은 아무도 없다. 매사 어디를 가든 자기가 주인공이었으니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학생들의 자의식 과잉은 졸업 후까지 지속된다. 대기업 아니면 취직도 하기 싫고 연봉 7천 밑으로는 결혼도 하기 싫다는 꿈나라 피터팬들이 어느새 너무 많아진 현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학생인권조례의 기본정신은 하극상

 
공동체 의식이 하나의 진영 논리로 왜곡되는 것과 전체주의적 시각을 개인에게 강요하는 폭력적인 태도에 언제나 단호히 반대하는 것이 자유주의자다. 하지만 그 단호함의 기세가 충분할 수 있으려면 우선은 공동체가 뭔지부터 알아야 하는 법이다. 가족과 학교, 나아가 국가가 개인에 부과하는 책임의 무거움을 감각하지 못한 채 말하는 자유는 입김만 불어도 금세 휘발되는 가짜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 모든 권위를 부정한 채 홀로 자기만의 길을 걸어가는 기사(knight) 계급은 자유인의 상징으로 수많은 예술작품 속에 등장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기사들은 원래 권력 안에 속해 있는 집단이었다. 주군이 죽고 나서 새로운 집단을 찾지 않고 혼자만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을 뿐이다. 권력에 종속되는 반(反)자유를 한 번 경험했기에 그들은 좀 더 단호하게 자유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떠나간 주군이 그들에게 그저 원망의 대상이었을까? 그보다는 성장과 극복의 기쁨을 느끼게 해준 ‘고마운 장애물’이라고 보는 편이 훨씬 어른스러운, 또한 자유스러운 시선이 아닐까 생각한다.

수능 시험 날이면 출퇴근과 주식시장 개장까지 늦춰주는 수고를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는 것이 지금 한국의 어른들이지만, 투표권의 있고 없음은 ‘제약을 만드는 자’와 ‘제약 안에 있는 자’라는 중요한 차이를 한 번 더 되새길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아이들이 70억 인구가 복잡하게 뒤엉킨 작은 지구를 거침없이 휘저으며 꿈을 펼치는 멋진 코스모폴리탄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지금은 그들에게 책임의 무거움을 먼저 알려줄 시간이다. 자유의 기사가 휘두르는 칼은 제약이라는 반작용이 있을 때 더욱 매섭고 날카로워지는 까닭이다. 자유의 기사는 홀로 자랄 수 없다. (미래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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