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역사로 회귀하는가?
유럽은 역사로 회귀하는가?
  • 미래한국
  • 승인 2012.05.2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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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어떻게 그 친절한 독일 사람들이 그렇게 무지막지한 일을 저지를 수가 있었어?”

2001년 8월 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을 그만둔 뒤, 지금 아니면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있을까 싶어 아내, 딸과 함께 셋이서 유럽을 70일간 배낭여행하는 호사(?)를 누릴 기회가 있었다. 유레일 가족패스를 끊은 뒤 각자 배낭 하나씩 메고 기차 가는대로 발길 닿는 대로 여행했다. 그러다가 폴란드 남부도시 크라코프를 거쳐 나치독일의 유대인 강제수용소 아우슈비츠를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만 10세였던 딸아이는 아우슈비츠를 견학한 뒤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잔인한 전시물에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특히 딸아이는 독일인에 대해 매우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여파가 더욱 컸다. 여행 도중에 만난 독일인들은 매우 친절하고 따뜻했다.

그렇기에 아우슈비츠를 방문하기 이전만 하더라도 딸아이에게 독일인이란 ‘친절하고 예절바른 사람들’과 동의어였다. 당시 필자는 딸아이 질문에 적절히 대답하지 못했다. 단지 “눈앞에 보이는 서구유럽의 평화와 번영이 항상적인 것은 아니고 어찌 보면 그러한 평화와 번영의 역사는 매우 짧은 것”이라고 답변했다. 딸아이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나 제대로 이해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유럽은 유혈의 장소였다

그후 11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느덧 대학생이 된 딸과 ‘역사’와 ‘인간’에 대해 많은 토론을 한다. 특히 최근 ‘유럽의 위기’를 지켜보면서 유럽의 미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 과정에서 조지 프리드먼의 <넥스트 디케이드>를 함께 읽었다. 특히 제9장 ‘유럽의 역사로의 회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때 ‘유럽은 항상 유혈의 장소였다’(Europe has always been a bloody place)라는 문장이 중심 화두였다.

 

평화롭고 번영된 유럽의 역사는 매우 짧다. 서구 유럽이 평화와 번영을 누린 것은 ‘냉전’ 이후이며 냉전 이전의 유럽 역사는 전쟁과 유혈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먼 역사는 차치하고라도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결까지 유럽에는 사실상 대형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물론 나폴레옹 전쟁 이후 등장한 ‘비엔나 체제’ 하에서 상대적으로 긴 평화를 누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와 유사한 비교적 장기간의 평화체제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체제’였다.

“냉전(Cold War)의 반대말은?”이란 질문을 던지면 많은 사람들이 당황해 한다. ‘냉전’이란 표현에 강한 선입관이 전재돼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냉전’ 혹은 ‘냉전적 사고’란 거의 욕설에 가까운 어휘이다. 심지어 대한민국의 모든 모순의 근원이 ‘냉전’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현실에 있어서 ‘냉전’의 반대말은 ‘평화’(Peace)가 아니라, ‘열전’(Hot War)이다.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뒹구는 세상’을 ‘평화’라고 생각하고, 이런 세상을 ‘현실의 세계’에 건설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냉전’은 추악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살아있는 현실’과 ‘구체적 역사’를 살펴보면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뒹구는 세상’은 추구해야 할 이상일지는 모르지만 ‘현실’이 아니며 또 그러한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유럽의 역사에서도 확인된다. 냉전체제는 제1차 및 제2차 세계대전 참화 이후의 산물이다.

특히 핵무기의 등장과 맞물리면서 ‘열전’을 피하기 위해 구축된 체제이다. 만약 평화를 ‘전쟁 없는 상태’라고 규정한다면 냉전이야말로 ‘평화체제’이다. 한반도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6.25라는 지독한 열전을 겪은 뒤 더 이상의 직접적 참극을 피하기 위해 구축된 체제가 냉전체제이다. 당시 냉전체제의 현실적 대안은 ‘평화체제’가 아니라 ‘열전체제’이었을 뿐이다.

냉전(Cold War)의 반대말 은 열전(Hot War)

유럽의 냉전체제는 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91년 소련 해체를 통해 무너진다. 그리고 1992년 마스트리흐트 조약(Maastricht Treaty)으로 유럽연합(EU)이 등장하고 1999년 유로존(Eurozone)이 형성되면서 유럽은 유례없는 번영을 맛보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 종말론’을 입증해 주는 증거자료처럼 보이기도 했다.

2001년 9·11사건 이후 ‘역사로의 회귀론’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이 역시 유럽과는 무관한 듯이 보였다. 물론 보스니아와 코소보에서의 살육전이 없었던 바는 아니지만 이 역시 변방의 지엽적 사건으로 취급됐다.

그러나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조지 프리드먼을 비롯한 현실주의 국제정치 이론가들이 ‘유럽의 역사로의 회귀’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유럽의 역사 회귀론에 따르면 현재 유럽의 번영과 평화는 정상적인 역사과정이라기 보다는 ‘예외적인 일시적 현상’이다. 서구유럽은 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이에 어울리는 군사력을 갖추지 못했다. 그리고 따라서 국제질서에서 자신의 위상에 맞는 역할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유럽의 평화는 미국에 의해 유지됐다. 영국을 제외하고 유럽 대륙의 대부분의 국가는 나치독일로부터 자신을 수호하지 못했다. 자부심 강한 프랑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를 나치독일로부터 해방시킨 것은 영미 연합군이었다.

군사적으로 드골의 자유 프랑스군이 한 역할은 사실상 미미하다. 물론 군사적 역할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미군, 영국군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참전시킨 ‘자유 폴란드군’(자유 프랑스군보다 훨씬 많은 병력이었음)이었지만 폴란드를 친소진영에 넘겨줘야 했던 사실을 볼 때 정치 외교적 역할이 군사적 역할 못지않게 아니 때로는 더 중요하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독일이 통일될 때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물론 대처 영국 총리도 반대했다. 미국의 설득으로 이들이 마지못해 독일 통일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에 제시한 조건이 나토(NATO)의 온존과 독일이 나토에 잔류하는 것이었다.

즉 나토체제를 통해 독일이 다시 유럽의 패권국가로 등장하는 것을 저지하려 했던 것이다. 독일의 이른바 통일비용을 언급하면서 한반도 통일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의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독일이 통일 때문에 망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큰 타격을 받았어야만 한다. 물론 독일통일 과정에서 혼란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재 독일의 모습을 보면 유럽 최대 강국이 됐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유로존’을 유지시키는 것은 독일경제이며 오히려 이른바 톨레랑스의 프랑스는 파산 위기에 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영국은 유럽대륙보다는 미국과의 동맹을 중시하고 있다. 그리고 네덜란드를 제외한 유럽중심부(European heartland)는 반미적 경향을 띠고 있는 반면 폴란드, 체코 등과 같은 대부분의 주변부(periphery) 국가들은 친미적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른바 구유럽(Old Europe)대 신유럽(New Europe)의 대립구도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유럽 경제위기는 유럽경제에서의 독일의 위상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욱 우려할 만한 일은 독일의 대(對)러시아 에너지 의존도가 날로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은 ‘강한 러시아’를 추구하는 푸틴의 러시아와 맞물리면서 유럽의 기존 판도를 흔드는 주요 축으로 작동하기 시작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폴란드의 새로운 위상과 역할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고 있다. 단, 역사적 배신에 대한 폴란드의 과민 반응이 폴란드의 행동범위를 규정짓는 주요 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지하철역에서 본 ‘톨레랑스’

아우슈비츠를 방문한 뒤 여러 나라를 거쳐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저녁 9시가 넘어 지하철을 탔다. 표를 내고 타는 사람이 없었다. 개찰구를 허들 시합하듯 휙휙 뛰어넘는 것이었다. 역무원은 멍하니 쳐다 볼 뿐 말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열차 안에 들어가니 유럽계 인종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아프리카 흑인이거나 아랍계 인종이었다. 아니 젊은 여성도 보이지 않았다. 한 프랑스인과 이런 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 프랑스인은 처음에는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꺼렸다. 잘못 접근하면 ‘인종주의자’ 내지는 ‘극우분자’로 몰리기 쉽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코냑을 한 잔 한 뒤 말문을 열었다. “지하철에서 경찰이나 역무원이 그들을 막지 못하는 것은 잘못하면 자신의 몸만 다칠 뿐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들을 잘못 건드리면 인종주의자로 몰리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르펜이 인기를 누리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모습에서 이른바 톨레랑스의 본질을 보았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한국에는 프랑스 좌익 지식인들의 담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이 역시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드골이 이룩한 경제기반 위에서 부르주아적 삶을 영위하면서 와인 잔을 들고 프롤레타리아 운운하는 프랑스 지식인들의 모습에서 한국 좌익 지식인들의 허위의식을 보았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매도일까?

황성준 편집위원·동원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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