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본지 10년 연재 <원예이야기> 주인공 김기선 서울대 교수
[인터뷰] 본지 10년 연재 <원예이야기> 주인공 김기선 서울대 교수
  • 미래한국
  • 승인 2012.06.14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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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함께하는 꽃보다 아름다운 삶

꽃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건강하게 오래 산다고 한다. 한평생 원예 연구에 힘써온 김기선 서울대 교수(식물생산과학부)를 마주하고 보니 근거 없는 속설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눈에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온화한 분위기와 교수실에 가득한 각종 분재의 은은한 향이 잘 어울렸다. 탁자 위에는 실습 후 남은 재료를 차마 버리지 못했다는 분재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사실 그의 전공 분야는 탁자 위에 놓을 수 있는 조그마한 꽃들이 아니라 잔디와 무궁화다. ‘원예’하면 흔히 떠올리게 되는 아기자기한 꽃과는 거리가 있는 품종이다. 이유를 물으니 모교인 서울대의 학풍 덕분이었다고 한다.

“서울대학교가 꽃이 아니라 무궁화와 한국 잔디를 한 이유가 있습니다. 서울대 원예학과를 세우신 류달영 교수님이 무궁화는 나라꽃이기 때문에 국립기관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거죠. 또 당시에는 한국 잔디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지만 사실 세계적으로 매우 우수한 품종이었습니다. 이렇게 우수한 자원을 연구하지 않을 수 없다 하셔서 사비를 들여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사회에서 흔히 원예라고 하면 떠올리는 꽃과 나무는 상대적으로 연구를 덜 하게 된 셈입니다.”

 

무궁화부터 기능성 채소까지

“80년대 후반이 되니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학내에 많은 교수님들이 우리도 다른 대학처럼 순수 화훼를 해야 하지 않겠냐 하는 의견을 제기하셨죠. 그래서 제가 과학재단 지원으로 네덜란드 국립화훼연구소에서 7개월 가량 머무르며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 뒤로는 서울에 돌아와서 화훼 쪽 재배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연구는 크게 세 분야로 나뉩니다. 먼저 개량번식과 분화 만드는 것 등 꽃 피는 기술을 상업화 시키는 일을 오랫동안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번식이 잘 안 되는 식물이 많기 때문이죠. 또 한 분야는 난의 개화를 촉진해서 3년 걸릴 것을 2년에 끝내는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호접란은 난방비를 줄이면서 꽃피는 일의 마무리 단계에 있습니다. 전공인 무궁화와 잔디 연구도 지속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잔디는 축산 분뇨를 쓰는데 냄새가 매우 심합니다. 이 냄새를 없애 골프장에 뿌려 화학비료로 대체하는 실험들을 하고 있습니다.”

실험실에서 진행되는 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실무 현장을 지휘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경제발전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원예 분야가 주목 받기 시작한 덕분이었다. 2006년 열린 국제원예학대회는 동양에서 두 번째로 개최된 대회로, 의학이나 공학 분야가 아니면 모으기 힘든 인원인 1600명의 외국인이 등록을 하는 등 이례적인 성과를 냈다.

2006년에는 코엑스에서 원예박람회를 개최했고 여세를 몰아 2008년 제주도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원예학대회도 진행했다. 원예학과 창립 50주년을 맞이하는 내년에는 순천에서 열리는 국제정원박람회를 전후로 일반인들에게 원예의 필요성을 알릴 예정이라고 한다. 사실 원예에 대한 관심은 최근 일어난 웰빙 열풍으로 급격히 높아진 상태다.

"채소와 과일은 이제 맛뿐이 아니라 기능성 식품으로 각광 받고 있습니다. 조경을 비롯해 도시농업이 주목 받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도시 원예는 요즘 문제가 되는 아토피 문제를 해결하고 공기정화 기능과 원예치료 등의 효과를 보면서 우리나라가 앞서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병원에서 치매 노인들도 원예치료로 기억력이 돌아오는 등 유례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편 원예에 대한 사회의 인식은 높아졌지만 원예교육은 미미한 수준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어르신들을 위한 실버 프로그램도 효과를 보았지만 최근에는 나라의 주역이 될 어린아이들부터 교육시키자는 문제가 거론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교실에 백합을 갖다 놓았더니 학생들의 성적이 좋아졌다는 사례가 있었습니다. 원예교육의 중요성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입니다. 학교폭력 문제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교도소 순화에도 원예치료가 도입되고 있거든요. 실제로 초등학교 학생들이 농사체험을 할 때는 왕따도 없어지고 차별도 없어진대요. 완전히 하나가 되는 거죠. 농업이라는 게 혼자 하는 작업이 거의 없거든요. 상생하는 법을 저절로 배우는 거죠"

원예교육 시설 마련이 시급

문제는 학회 차원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원예수업을 만들기 위해 교과부와 상의했지만 교과목을 만들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안타까운 일이죠. 유치원까지만 해도 도시농업 실습을 많이 하거든요. 그런데 초등학교부터 고3 때까지는 입시 전쟁이 시작되면서 싹 없어집니다. 대학교의 교양강좌는 물론 초등학교 때부터 국어, 산수처럼 비중을 높여 원예교육이 들어가야 된다고 봅니다. 이를 깨달은 초등학교에서는 원예실습을 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명문인 텍사스 A&M 대학교에서 유학하는 등 다양한 교육 현장을 지켜본 김 교수는 외국과 국내 교육의 가장 큰 차이점은 ‘실습의 차이’라고 말했다.

“외국교육의 가장 좋은 점은 실습 환경이 잘 조성돼 있다는 것이죠.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다고 하는 서울대학교에도 온실이 하나 없습니다. 실습 때문에 수원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당연히 교과서 위주의 수업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외국은 온실과 정원이 많을 뿐 아니라 산업체와 연계가 잘 돼 있어서 견학 다니기도 좋습니다.”

우리나라는 원예 산업과 대학, 진흥청이 각기 따로 있기 때문에 연계가 잘 되지 않고 산업 자체가 약하다는 게 김 교수의 설명.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부분은 대부분 농민들 개인에게 지원해주는 형태이구요. 꽃 하나를 재배하더라도 영농조합 형태로 기업화한다면 중소기업 규모로 만들 수 있어요. 이 산업이 커져서 사회에 환원하는 연구비를 지원한다면 대학교와 산업체의 연계도 더욱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래 그는 의대에 진학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며 의료선교를 염두에 둔 것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생명을 다루는 일이 버겁게 느껴졌다고 한다.

“생명에 책임을 진다는 것이 신성하게 느껴지면서 의대가 무서워지더라구요. 그때 마침 서울대 농대 선배님들이 오리엔테이션을 오셔서 관심을 갖게 됐죠. 요즘과 달리 당시 학생들은 농대에 많이 진학하기도 했구요. 지금 생각하면 의대에 안 가고 농학 쪽으로 온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축산분야만 해도 동물이 죽으면 압박감이 대단하거든요. 식물을 다루는 사람들은 그런 양심의 가책이 덜 하고 친환경적인 조건에서 작업할 수 있죠. 식물을 본다는 게 참 좋잖아요.”

뜻하지 않은 인생길에 은혜가 한가득

대학 진학 뿐 아니라 이후의 삶도 김 교수의 계획보다는 상황에 따라 흘러간 경우가 많았다. 전두환 정권의 압박 때문에 본의 아니게 유학을 떠나게 된 것도, 유학 후 교수님이 갑작스레 교통사고로 돌아가시자 주위 교수님들과 사모님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자리를 잇게 된 것 등 인생의 중요한 시기마다 뜻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났다. 김 교수는 자연스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앞으로는 더욱 베푸는 삶을 살고 싶다며 북한 이야기를 꺼냈다.

“저희 부모님이 북한 영변 출신이십니다. 원자력으로 유명한 곳이죠. 거기서 저희 할아버님이 최초로 교회를 세우셨어요. 결국 북한 체제로 인해 교회는 다 허물어지고 월남하기는 했지만 늘 한이 있으셨죠. 고향에 돌아가면 다시 교회를 짓겠다고 돈도 모아 놓으셨더라구요. 따로 의논을 한 것은 아니었는데 저도 영변에 대해 늘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저는 저대로 통일이 되면 영변에 갈 계획입니다. 교회를 세워 성가대 지휘를 하고 싶어요. 음악을 따로 배운 것은 아니지만 성가대 지휘는 유학 시절부터 꾸준히 해온 봉사입니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을 늘 체험하게 되거든요. 영어도 가르치고 북한의 부족한 부분인 농업 쪽으로도 도와줘야지요.”

<미래한국>에 100여편이 넘는 칼럼을 게재하게 된 계기도 가족과 지인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기독교 가정에서는 자연스레 정치적 성향도 우익으로 가게 되더군요. 주위의 기독교인들을 보면 입장이 대부분 비슷하구요. 한 10년 전에 서울대의 많은 분들이 <미래한국>에 관여하시면서 저에게도 글을 써보라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몇 십 편 쓰다 끝내겠지 했는데 벌써 백편이 넘었네요. 나름대로 공부도 하고 즐기면서 썼습니다. 소재의 문제도 있고 너무 오래하다 보면 잡고 있는 것 같아 물러나게 됐습니다.”

마지막으로 <미래한국>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기독교와 우익을 대변하는 신문이 많지 않은 가운데 <미래한국>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조중동이 족벌 체제에 너무 크고 비대해졌기 때문에 <미래한국> 나름대로의 메리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좀 더 활동 무대를 넓혔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 글도 제 글이지만 글은 대부분 잡지에서 끝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좀 다치더라도 싸우고 나가면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글·사진/조진명 기자 jaduj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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