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치 않았다 해도 외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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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한국
  • 승인 2012.07.24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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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 토리노(Gran Torino)>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새삼 다시 소개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할리우드의 보기 드문 보수우파 영화인이라는 점만 다시 한 번 상기해두자.

그는 지금까지 수많은 영화에 출연했을 뿐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는 영화감독으로도 매우 뛰어난 작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만하면 은퇴하고 쉬기 시작했어도 한참이 지났을 나이에 또 한 편의 걸작을 내놓았다. 2009년 개봉한 <그랜 토리노(Gran Torino)>라는 영화다.

인터넷의 영화 감상평들을 들어보자. “감동적인 영화인 줄 몰랐다. 처음으로 영화보고 눈물 흘림.” “3번 봤다. 그 이상 설명이 필요한가.” 등등…

정치적이지만 감동적

예외 없는 평가는 ‘감동’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매우 정치적인 영화다. 이렇게 정치적인 메시지가 전면으로 올라와 있는 영화에 ‘감동’이라는 단어를 쓰기는 쉽지 않다. 더욱이 특정한 정치적 색채를 극히 선명하게 드러내는 영화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미국 개봉 당시에도 그랬지만 뒤늦게 이 영화를 접한 한국 영화팬들의 평가도 각각의 정치적 입장이 어떻든 일단은 공히 찬사를 보냈다. 무엇보다도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뛰어난 영화인, 아니 이제는 거장이라 불러도 부족한 느낌조차 주는 위대한 장인의 힘이다. 그러나 단순히 솜씨가 좋아서가 아니다. 가슴을 울리는 메시지가 있다.

<그랜 토리노>는 까탈스러운 리버럴의 입장에서라면 불편하리만큼 보수적 색채가 짙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 뿐 아니라 직접 주연으로도 나선 주인공 월트 영감은 우선 존재 자체가 보수다. 부인의 장례식을 치르는 첫 장면에서부터 완고하고 비타협적인 고집불통이 확 보인다.

장례 미사에 참석한 아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는 아직도 1950년대에 살고 있어.” 1950년대? 그렇다. 주인공 월트 영감은 한국전 참전 용사다. 손자들이 지하 창고에서 할아버지의 오랜 보관품들을 뒤지는데 한국전쟁 당시의 사진이 보이고 ‘훈장’이 나온다. 그리고 그의 집 앞, 성조기가 떡 하니 게양돼 있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곧 느끼게 된다. 그 성조기는 1년 365일 항상 그렇게 버티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쯤만 돼도 ‘보수’라면 일단 반감부터 갖고 보는 자들의 입장에서라면 불편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사실 영화의 내용은 표면적 그림 이상이다

고립주의자의 원치 않던 인도주의적 개입

월트 영감의 바로 옆집에는 베트남 소수민족 출신 가족들이 산다. 영화의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 옆집의 소년을 괴롭히는 ‘불량배’들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물리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전개 구조가 마치 미국의 국제정치적 족적 자체를 그대로 상징하고 있다.

월트 영감은 매우 ‘고립주의’적이다. 담장조차 없는 바로 옆집 이웃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작은 인연조차도 갖고 싶어 하지 않는다. 심지어 매우 ‘인종주의’적인 감정을 숨기지도 않는다. 그런데 우연히, 그야말로 우연히 옆집의 소년을 괴롭히는 그와 같은 베트남 소수민족 출신 양아치들을 몰아내게 되면서 문자 그대로 ‘엮이게’ 된다.

영화는 월트 영감이 처음부터 무슨 정의감으로 옆집의 그 일에 ‘개입’하게 된 것이 아님을 짐짓 강조한다. 월트 영감은 소동을 벌이다 자신의 마당 잔디밭으로 넘어 들어온 놈들에게 총을 겨누며 다만 이렇게 외칠 뿐이다. “내 잔디밭에서 나가라!”

다만 자신의 고립적 영역을 지키고자 했을 뿐인 행위가 이웃 소년에 대한 도움이 됐다는 식이다. 그러나 영화를 계속 보다보면 월트 영감이 단지 만사를 외면하는 게 아니라 기실 내면에는 정의감이 충만한 따뜻한 사람임을 알게 된다. 월트 영감은 원치 않게 엮인 인연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소년을 보호하기 위한 ‘인도주의적 개입’을 멈추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그 때문에 결국은 자신을 ‘희생’하게 된다.

회색 없는 세계의 불편함

이쯤 되면 이 영화가 단순한 휴먼 스토리 이상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영화에 대한 인터넷 게시판의 각종 평들을 보면 보수 진보 운운의 정치적 글들이 난무한다. 하지만 그 노골적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손쉬운 진보적 비난은 약하다. 다만 “한국의 보수답지 못한 보수에 비해서” 운운 등으로 구분을 시도하는 것들이 주로 눈에 띈다. 그만큼 보편적 울림이 큰 것이다.

이 영화에는 회색지대의 모호함이 없다. 善과 惡은 처음부터 이분법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난다. 선량한 사람이 있고, 깐깐하지만 정의로운 인물이 있다. 그리고 구제불능의 불량배라는 惡이 날뛴다. 善과 惡의 이분법을 난폭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현실세계를 회색의 모호함으로 사유하기를 즐겨하고, 그것을 또 세련된 자세로 여기는 자들에겐 매우 비현실적 구도일 것이다. 하지만 소위 세련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주장하든 惡이 때때로 그처럼 노골적인 형태로 횡행하기도 하는 게 진짜 현실이다. 이 불편한 진짜 현실이 닥쳐왔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그랜 토리노>에서 월트 영감이 최후로 선택한 방법은 보는 이의 가슴이 먹먹해지게 한다. 보는 이에 따라선 그 선택은 매우 비현실적으로 보이기까지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방법론이 어떠하든 방관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방관은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그 자체로 악의 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원치 않았다 해도 피할 수 없는 선택에 직면했을 때는 기꺼이 도리를 다하는 것, 인간의 인간다움은 바로 거기에 있지 않는가? 그리고 세상이 그래도 지탱되는 건 惡이 날뛰는 순간에도 바로 그 인간다움을 지키는 이들이 있기 때문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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