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사랑에 ‘기득권’은 없었다
그들의 사랑에 ‘기득권’은 없었다
  • 이원우
  • 승인 2012.11.09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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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선에서는 흔히 후보들의 종교관이 쟁점으로 떠오른다. 특히 이번 대선의 경우에는 공화당 후보인 미트 롬니가 몰몬교 신자라는 점 때문에 더욱 그랬다. 타인의 행복을 기원할 때 “God Bless You”라고 말하는 미국인들의 입장에서 종교는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이자 가치관의 연장이다.

한국의 경우는 사뭇 다르다. 종교관을 논하기 이전에 유신론과 무신론의 갈등부터가 매우 첨예하기 때문이다. 어느 종교를 갖고 있는지 뚜렷하게 밝히지 않는 것이 전략적으로 유리할 뿐더러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인상을 남기고 싶다면 종교문제를 아예 거론하지 않는 것이 영리한 선택이다.

여러 종교 중에서도 특히 기독교는 ‘기득권’의 상징으로 인식된 지 오래다. 재산이며 교회 상속에 관한 세속적 논란들이 자주 회자되면서 ‘개독교’라는 모욕적인 언사조차 쉽게 들을 수 있는 것이 냉엄한 현실이다.

 

부끄러운 일이 된 기독교

최근 학원복음화협의회(상임대표 권영석)가 대학생 1,359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를 보자. ‘기독교 신자가 감소하는 원인 2가지’를 묻는 질문에 대학생들은 ‘기득권층 옹호, 교회 세습, 비리 연루 등 이미지 실추(61.6%)’를 첫 번째로 꼽았다.

기독교인(60.7%)과 비기독교인(61.8%) 모두 ‘이미지 실추’를 가장 큰 원인으로 제시했다는 점은 현재 한국에서 기독교 신자임을 밝히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돼버렸다는 방증이다.

대신 사람들은 신의 ‘없음’을 ‘선택’했다.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가시적인 증거 없이는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다”고 단언하는 일이 지성의 상징인 것 마냥 돼버렸다.

점차 그 자체로 종교적 성격을 띠기 시작한 무신론(無神論)이 한국사회 지성담론의 주도권을 차지한 것과 반비례해서, 기독교는 부패한 기득권이라는 오명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 기독교는 기득권을 ‘상징’할 뿐 실질적으로는 더 이상 대세를 점하지 못하는 상태다.

하지만 구한말 처음으로 조선 땅에 상륙했을 당시에만 해도 기독교는 그 자체로 도전정신과 희생정신과 만민평등의 모체였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조선 땅에서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적용되는 복음의 가치를 설파했던 것이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조국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여건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세계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 중 하나였던 조선 땅으로 건너와 선교와 봉사활동을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랑과 헌신의 열정 때문이었다. 그 사랑이 조선의 근대화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장대한 과정 속에 ‘기득권’은 없었다.

현재 한국 기독교의 참상을 목도한다면 마음 아파할 그들의 땀과 노력. 그 흔적은 인구 천 만의 도시로 성장한 21세기의 서울특별시 안에 여전히 잔존한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위치한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는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주장으로 ‘조선을 뒤집어 놓은 선교사’라는 별명을 얻은 사무엘 무어(1860∼1906)의 묘가 있다. 그는 최하층 천민으로 분류되던 백정 박성춘의 장티푸스를 치료해 준 것을 계기로 차별 당하던 백정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양반들과 천민들을 따로 분류해 예배를 드리고 싶다는 신자들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한 것으로도 유명한 무어 선교사는 정작 자신의 장티푸스를 치료하지 못해 1906년 숨을 거뒀다.

그의 관점에서 양반과 천민은 아무런 차이도 없는 ‘형제’일 뿐이었다. 목숨을 내놓고 선교에 힘썼던 그의 노력은 결국 백정 해방운동에도 강한 자극을 줘 조선의 근대화에도 이바지한 셈이 됐다.

불모지와도 같았던 조선 땅을 찾아 먼 길을 찾아온 외국인 선교사들의 숭고한 행적은 폐쇄적 사대주의와 주자학적 신분질서에 갇혀 있었던 조선사회를 일깨웠을 뿐더러 일제시대 이후 대한민국 건국의 동력이 되기에 이른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한복음 15:13)

 

나에게 천 개의 생명이 있다 해도

외국인 선교사들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결코 빠지지 않는 인물 중 하나는 ‘영원한 젊은 선교사’로 길이 남을 루비 켄드릭(Ruby R. Kendrick)이다.

그녀는 1883년 미국 텍사스에서 출생했다. 1905년에 캔자스 여자 성경전문학교를 졸업한 켄드릭은 남(南)감리회에 선교사로 지원했다. 그녀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루비 켄드릭은 텍사스 남감리회 소속의 독실한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 소녀 시절부터 선교사의 꿈을 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꿈을 본격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꼬박 2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연령 제한 때문이었다. 1년은 교사를 하면서, 1년은 대학에서 더 공부를 하면서 시간을 보낸 그녀는 1907년에야 미국 남감리회 여선교사 자격으로 조선(개성)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우선은 한국어부터 배워야 했다.

1908년 켄드릭의 부모는 조선에서부터 수개월에 걸쳐 날아온 딸의 들뜬 편지 한 통을 받아볼 수 있었다. 이제 겨우 기초적인 한국어를 배우고 있던 그녀였지만 편지에는 조선의 자연환경과 사람들의 넉넉한 인심에 탄복하면서도 미래에 대한 걱정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지우지 못하는 20대 여성 특유의 입체적인 심리가 물씬 배어나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이곳은 탄압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저께는 예수님을 영접한 지 일주일도 안 된 서너 명이 끌려가 순교했고, 토머스 선교사와 제임스 선교사도 순교했습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그들이 전도한 조선인들과 숨어서 예배를 드립니다.

오늘밤은 유난히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외국인들을 죽이고 기독교를 증오한다는 소문 때문에 부두에서 저를 끝까지 말리셨던 어머니의 얼굴이 자꾸 제 눈에 어른거립니다. 어쩌면 이 편지가 마지막일지도 모릅니다.”

눈물을 삼키며 이 편지를 읽었을 켄드릭의 부모는, 그러나 바로 이튿날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청천벽력 같은 전보를 받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루비 켄드릭 사망. 병명은 급성 맹장염

24년간 키워온 꿈을 단 8개월 만에, 현대의 관점에선 간단히 치료할 수 있는 맹장염 때문에 포기해야만 했던 그녀에게 목숨 하나로는 너무 부족했던 것일까. 조선 땅에 세워진 그녀의 묘비에는 그녀의 편지에서 발췌된 한 문장이 새겨져 있다.

“나에게 천 개의 생명이 있다 해도 그 모두를 조선에 바칠 것이다.”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그녀의 조선 선교는 터무니없이 일찍 끝나버리고 말았지만, 그녀의 죽음은 “내가 죽거든 텍사스 청년회원들에게 가서 열 명씩, 스무 명씩, 오십 명씩 한국으로 나오라고 일러 주세요”라는 그녀의 유언으로 인해 조선 선교의 새로운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됐다.

 

모든 것이 보장돼 있었던 청년

켄드릭보다 18년 전에 조선에서 세상을 떠난 존 헤론 선교사의 경우는 조선 말기에 뿌리를 내딛기 시작한 기독교의 희생정신을 잘 요약해서 보여준다. 1856년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목회자의 아들로 태어나 개교 이래 최우수 성적을 기록하며 1883년 테네시 의과대학을 졸업한 수재였다.

학교는 그에게 뛰어난 교수가 돼 후배들을 양성해 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했다. 하지만 확답을 내릴 수 없었던 헤론은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의학 공부를 지속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기도를 하던 중 ‘땅 끝’으로 가 의료봉사와 선교로 남은 생을 바쳐야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일본에서 ‘조선의 마게도냐인’ 이수정을 만나 한국의 말과 풍속을 배운 그가 1885년 드디어 도착한 ‘땅 끝’의 이름은 코리아였다.

전공을 살려 광혜원으로 들어간 헤론은 갑신정변 도중 개화파의 칼에 찔렸던 민영익을 완쾌시킨 알렌(Horace N. Allen) 선교사와 관계를 쌓아가기 시작했다.

알렌의 뒤를 이어 고종의 주치의로 일한 헤론은 뛰어난 의술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고종은 그에게 가선대부(嘉善大夫)라는 벼슬을 내렸고 조선인들은 그의 한국 이름 혜론(惠論)에 빗대어 그를 ‘혜참판’이라 불렀다.

그러나 환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갔던 헤론에게도 시련은 찾아왔다. 전염병이 유행하던 시기에도 환자들을 위주로 움직이다가 본인 스스로 이질에 걸려버린 것이었다. 고국에서 편안한 30년을 보낼 수도 있었던 영국의 혜참판은, 그렇게 불과 3주 만에 서른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죽음 직전 자신을 아는 한국의 친구들을 모두 불러달라고 말했던 그는 “조선과 조선의 사람들을 더 뜨겁게 사랑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한 뒤 그를 기다리는 많은 환자들을 뒤로 하고 잠자듯 눈을 감았다. 살아생전 헤론의 열정이 무색하게도 너무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이었다.

하지만 평생을 조선에 바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죽음에 대한 대다수 조선 사람들의 입장은 냉엄한 것이었다.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헤론의 묘지는 결정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때는 태양이 작열하는 7월. 언더우드 선교사는 헤론과 함께 작업실로 쓰던 집의 앞뜰에 그를 묻고자 했지만 사대문 안에 외국인의 시체를 묻을 수 없다는 여론이 빗발쳐 매장은 덧없이 지연되고 있었다.

당시 관행은 외국인의 시체를 제물포 근처 묘지에 매장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하지만 이미 부패하기 시작한 헤론의 시신을 가지고 백여 리 길을 간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결국 알렌이 조정과 미국공사관을 드나들며 외교적 성과를 거둬, 헤론은 1890년 7월 28일 양화진 나루터가 보이는 언덕 위에 고이 묻힐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의 시작이었다.

도심 속의 숭고한 정경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는 최초 매장자 헤론을 포함한 총 417인의 묘지가 있으며 이중 145인이 외국인 선교사다(가족 포함). 조선 말기에서부터의 폭풍 같은 역사의 질곡 속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갓난아기들의 묘는 보는 이를 숙연하게 만든다.

처절한 가난 속에서 이 땅에서 살다간 이들의 사연이 그러한데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조선을 향해 바다를 건넜던 외국인 선교사들의 사연은 오죽할까.

물에 빠진 소녀를 구하려다 익사한 아펜젤러, 교육 선교사로서 배재학당에서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이승만을 가르친 벙커 부부, 남편과 딸을 잃고서도 43년간 한국에 머물렀던 로제타 홀 등 외국인 선교사들의 사연은 하나같이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은 자’들의 결기를 품고 있다.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1:15-16)

태어난 곳에서 머무를 생각을 하지 않은 채 길을 나섰던 그들은 유목민이고 또한 개척자였다. 청년에 불과했던 선교사들이 이와 같은 열정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지성을 넘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영성이 존재했던 덕택일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들과 관련된 문제 때문에 많은 오해를 받고 있는 오늘날의 기독교, 그리고 상대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한국인들 모두에게 삶 그 자체로 숭고한 메시지를 남긴 그들의 삶은 많은 영감을 준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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