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한번 核~ 가져 보세”
“우리도 한번 核~ 가져 보세”
  • 황성준 편집위원
  • 승인 2013.03.15 17: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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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카플란의 <전사 정치학>(Warrior Politics)을 읽고

 
“산으로 올라가시겠습니까?” 아부 마부사예프 체첸반군 정보사령관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마부사예프는 계속 필자를 응시했다. 눈에서 레이저 광선이 나오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강렬한 눈빛이었다. 결국 “예,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마부사예프와 만난 것은 1995년 12월 체첸 수도 그로즈니 외곽에 위치한 체첸반군 비밀 아지트에서였다. 당시 체첸반군 주력은 러시아군의 대대적 공세에 밀려 남부 산악지대로 물러난 상태였다.

그러나 마부사예프가 지휘하는 지하조직은 러시아군 점령지역에서 공공연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마부사예프를 만난 비밀 아지트만 하더라도, 러시아군 사단본부 정문과 불과 200∼300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나 할까?

당시 필자는 샤밀 바사예프 체첸반군 사령관과의 인터뷰를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샤밀 바사예프는 러시아 공적(公敵) 1호로서 러시아인들의 최대 공포의 대상이었다.

러시아에서의 바사예프의 지위는 미국에서의 오사마 빈 라덴의 지위와 유사한 것이었다. 워낙 신출귀몰한 게릴라전을 전개해 ‘카프카스의 체게바라’로 불렸던 인물인데 2006년 폭사했다. 아직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는데 러시아 정보기관의 작전이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체첸반군 사령관의 질문 “산으로 올라가시겠습니까?”

아무튼 러시아군과 정보기관이 혈안이 돼 찾고 있는 인물을 만나서 인터뷰를 한다는 것은 정말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러시아군 점령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체첸반군 지하조직, 그것도 그 책임자와 연결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만 하더라도 바사예프와의 만남이 정말 이뤄지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함께 차를 마시며 국제정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마부사예프가 한 사람을 불렀다. 잠시 후 왜소한 체격의 중년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 사람이 당신을 바사예프 장군에게 데려갈 것입니다.그런데 우리는 당신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산으로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아무 것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음과 같은 4가지의 경우의 수가 가능합니다.

첫째, 당신과 사샤(안내인) 모두 함께 돌아오는 경우, 둘째, 둘 다 돌아오지 않는 경우, 셋째, 당신은 돌아오고 사샤는 돌아오지 않은 경우, 넷째, 당신은 돌아오지 않고 사샤만 돌아오는 경우.” 여기까지 이야기한 뒤,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필자의 눈을 응시했다.

얼마나 흘렀을까? 다시 입을 열었다. “단 한 가지는 약속할 수 있습니다. 4가지 경우의 수 가운데 네 번째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사샤를 쳐다보았다. 마부사예프와 눈이 마주친 사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필자를 바라보며 산으로 가겠느냐고 다시 물어본 것이었다.

세계를 흔든 특종의 추억 - 체첸반군의 '빈라덴' 바사예프를 만나다 

바로 이러한 문답을 거친 뒤 체첸반군의 안내를 받아 산으로 올라가 바사예프와 인터뷰할 수 있었다. 이 덕분에 전쟁기자 세계에서 인정받게 됐으며 이때 바사예프가 보여준 스팅어미사일을 찍은 사진은 세계 특종이 됐다.

어떤 측면에서 개인적으로는 바사예프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덕분에 몸값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산에서 내려왔을 때 러시아 당국에 의해 집중조사(?)를 당하기도 했다. 바사예프와 어떻게 접촉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이 사건 이후 친하게 지내던 러시아 군관계자들은 필자를 ‘바사예프 친구’라고 놀리곤 했다.

이 인터뷰로 우쭐했었던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 6·25 당시 서방기자가 지리산에서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과 인터뷰한 정도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으쓱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나중에 되돌아보면 본의 아니게 체첸반군측에 이용당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당시 체첸반군은 자신들이 스팅어미사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고 싶었는데 이를 전해준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진실은 단 1대 밖에 없었다. 그런데 필자가 찍은 사진이 로이터를 통해 특종보도되자 러시아 공군의 활동이 크게 위축됐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쓴 기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인터뷰 응해준 것에 대해 보답(?)적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겨울방학 동안 대학생들과 공부모임을 가졌다. 국제문제 주교재로 사용한 책이 로버트 카플란의 <전사(戰士) 정치학>이었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은 “우리는 위험한 시대에 살고 있으며 새로운 종류의 지도력이 필요한 때”인데 그 지도력은 ‘이교도의 기풍’(Pagan Ethos)을 바탕으로 한 것이란 내용이다. 즉 국제관계는 ‘사랑’과 같은 기독교적 윤리관에 입각한 국내정치와는 다른 도덕적 원칙, 즉 힘(power)에 의해서 이끌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윤리적 도덕적 기반을 버린 ‘속류 마키아벨리즘’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대-기독교적 덕목(Judea-Christian virtue)과 이교도(pagan)의 용맹을 결합시킨 것이 서구의 기사도이며 이를 현대적으로 부활시킬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이 책은 민군(民軍)의 인위적 분리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 민군 통합적인 지휘 구조가 요구되는 시대라고 말하며 민군의 인위적 분리야말로 낡은 19세기적 사고라는 것이다.

이 책은 냉전이란 ‘오랜 평화’(long peace)와 소련붕괴 이후의 이른바 ‘역사의 휴가’(holiday of history) 속에서 야성을 상실하고 순치된 미국사회에 경종을 올리기 위해 쓴 책이다. 그리고 외부의 전사(戰士)집단과 싸우기 위해서는 전사적 기풍으로 무장돼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전사적 기풍이 정말 필요한 곳은 현재 대한민국이다.

통일강국을 위한 마지막 승부수

핵실험을 강행하고 정전협정을 무시하겠다는 북한의 공갈 위협에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반대의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다. 쿠데타로 집권한 것도 아닌데 군(軍) 출신 인사가 많다는 이유로 군사정권 운운하는 자들이 야당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꼴이라니…무(武)를 천시하면서도 무서워하는, 그리고 당파싸움에만 몰두했던 주자학 양반들의 후예다운 주장이라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논리 비약일까?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 하에서 경제를 일으켜 세웠다. 이제 대한민국의 경제력은 가히 선진국 수준에 올라섰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강소국(强小國)을 만들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과감하게 ‘통일 강대국’을 목표로 하자고 한다면 너무 무리한 이야기일까? 사실 강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핵클럽 회원이 돼야 한다.

필자는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핵무장 반대론자였다.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에 도전해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었다. 북한 핵무장이 기정사실화된 이상, 대한민국의 ‘자위적 핵무장’을 무조건 반대할 수 없는 것이 국제사회의 입장이다. 우리는 국제사회, 특히 중국에 “북핵을 저지하라, 그러면 우리도 핵무장을 포기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핵무장을 감행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고 외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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