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이 진실을 소환하다
거짓이 진실을 소환하다
  • 이원우
  • 승인 2013.05.21 11: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백년 전쟁’ 반작용으로 ‘생명의 길’ ‘우남 이승만’ 등 속속 발표


2013년은 6·25 휴전 60주년의 해다. 이에 따라 1953년의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좌우 진영 모두에서 우남 이승만 선생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콘텐츠들을 발표한 것이다.

이승만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곧 대한민국의 탄생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승만과 대한민국의 역사를 두고 벌이는 치열한 현재의 공방이 ‘역사 전쟁’으로 불릴 만한 이유다.

이 전쟁은 2012년 11월, 대선을 한 달여 앞둔 시점에 시작됐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한 ‘백년 전쟁’이라는 동영상을 공개한 것이다.

이 영상은 시작과 함께 괴벨스와 히틀러를 보여준다. 그런 뒤 이승만과 박정희를 연결시켜 교묘한 뉘앙스로 그들을 친일파-반역자로 몰아가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또한 무혐의 처분된 사건을 기소된 것으로 왜곡하거나, 범죄자들에게나 사용하는 범죄인 식별사진 프레임 위에 이승만의 사진을 얹어 놓는 등 악의적인 수법으로 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증폭시켰다.

도합 200만 회 이상 재생되며 큰 반향을 일으킨 ‘백년 전쟁’은 당연히 “날조와 왜곡”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3월 13일 청와대 인왕실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과 사회원로 12인과의 대화에서도 ‘백년 전쟁’의 조작 문제가 화두에 오를 정도였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사(大使)를 지낸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백년 전쟁’의 날조와 조작 문제를 국가안보 차원에서 주의 깊게 살펴 줄 것”을 당부했다.

왜곡, 또 왜곡 … 반격 줄 이어

이인수 박사를 비롯한 이승만의 유족들은 이 문제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들은 지난 2일 ‘백년 전쟁’을 만든 민족문제연구소를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했다.

혐의는 사자(死者) 명예훼손. 같은 날 기자회견을 개최한 이들은 ‘백년 전쟁’을 선조 이승만에 대한 ‘인격 살인’으로 규정했다. “이 영상물을 민간연구소 주도 하에 국사학자들이 협력해 만들었다는 사실에 경악한다”며 고소 배경을 밝히기도 했다. 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관계자 역시 “ ‘백년 전쟁’은 대한민국의 국격을 훼손하고 선배 세대 전체를 부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인호 교수의 조언이나 이인수 박사의 법적 대응은 ‘백년 전쟁’의 이승만 공격에 대한 방어적 피드백으로 볼 수 있다. 덧붙여 우파 진영은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반격에도 착수했다.

대표적인 것이 동영상 ‘생명의 길’이다. 4월 26일 제1편이 공개된 이 영상은 ‘백년 전쟁’의 왜곡과 날조를 조목조목 비판한다. ‘백년 전쟁’이 이승만부터 MB정권까지의 100년 역사를 다룬다고 밝힌 것과 궤를 맞춰 ‘생명의 길’ 역시 1898~1997년의 100년을 추적할 예정이다.

반격이 시작되자 민족문제연구소 측은 ‘백년 전쟁’을 ‘예술 작품’으로 정의하는 입장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 9일 환경재단 레이첼카슨홀에서 기자회견을 개최한 이들은 문제가 된 범죄인 식별사진 문제에 대해 “영화 <유주얼서스펙트>의 한 장면을 패러디 한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또한 ‘백년 전쟁’을 “감독의 상상력이 가미된 역사 다큐”이자 “창작 예술품”으로 정의하기도 했다. 이들은 사단법인 시대정신 측에서 제안한 역사 논쟁(공동심포지엄)에도 참여 의사를 밝혔다가 ‘남북관계 상황과 내부적인 일정’ 등을 이유로 불확실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거짓을 용납할 수 없었다”

한편 ‘생명의 길’ 이외에도 우남 이승만의 업적을 조명하는 시도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지난 11일 서울 중구 정동에 위치한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홀에서 개최된 제27회 이승만포럼에서는 김지호 前 교양다큐채널(CTN) 회장이 발제자로 나섰다.

이 자리에서 그는 2003년에 제작한 다큐멘터리 <우남 이승만> 7부작을 완전히 새롭게 재구성했다고 말하며 오는 6월 25일 TV조선을 통해 공개할 계획을 밝혔다.

이날 김지호 前 회장은 <우남 이승만> 제작 과정에서 새롭게 밝혀진 세 가지 사실을 공개했다. 첫 번째는 ‘이승만의 귀국 과정에 얽힌 일화’다. 해방 후 이승만은 미 국무부의 귀국 방해 때문에 맥아더의 도움을 받고 나서야 서울에 들어올 수 있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에 의하면 이승만은 당시 민간인 신분이었으나 군용기에 탑승하기 위해 미 군복을 착용했다.

허나 김 前 회장은 당시 이승만이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전략정보국) 대령이라는 정식 군인 신분으로 마닐라를 거쳐 도쿄에 들어왔다고 밝혔다.

이승만이 OSS 대령 신분을 획득하는 조건은 한반도 입국 후 미국에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었으나 이승만은 정보를 하나도 제공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 前 회장은 “미 국무부가 이승만에 대한 불평을 토로하는 내용의 미공개 서류가 있다”고 말했다.

두 번째 새로운 사실은 대한인동지회 김원용에 관한 것이다. 한때 이승만의 신임을 받았던 젊은 김원용은 동지회 내부 정보를 동지회와 갈등관계에 있었던 대한인국민회 측에 넘겨주는 등 일탈 행동을 반복했다.

대한인국민회가 대한인교민단으로 개편되면서 이승만 측과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는데 김원용은 교민단에 또다시 내부 정보를 넘겨주면서 결국 파면을 당하게 된다. 이후 신진당과 민주독립당 등을 창당하면서 김원용의 활동은 점점 좌익 계열로 수렴했다. 김원용과 김호는 이승만과 대한민국 정부를 비판하는 활동에 남은 생애를 보낸다.

이번에 소개된 마지막 일화는 이승만의 베스트셀러 ‘Japan Inside Out’(1941)에 관한 것이다. 제국주의 일본을 규탄하는 이책은 이승만이 한인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추진했던 동지식산회사가 파산하는 절망적 상황 속에서 집필됐다.

본래 ‘독립운동사’를 쓰고자 했던 이승만의 이 책은 처음엔 미국인들의 관심을 얻지 못했으나 호놀룰루 지역을 시작으로 적극적인 판로 개척을 시도해 결국 미국의 각 학교와 도서관에까지 진출한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승만에 대한 합리적인 평가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음해하려는 시도 속에서 더 속도를 높여가고 있다. 우남 이승만을 친일-반민족주의자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왜곡과 날조마저 서슴지 않는 일군의 세력이 오히려 더욱 빠른 속도로 이승만에 대한 진실을 소환해 내고 있는 형국이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