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가 본 영화 ‘노아’
신학자가 본 영화 ‘노아’
  • 미래한국
  • 승인 2014.04.09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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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구 편집위원
 

영화 <노아>를 보면서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부정적인 평가로 기울게 됐다. 처음에 이 영화의 제작 얘기를 들었을 때는 성경으로부터 소재를 빌려 나름대로 상상력을 동원해 뭔가를 말하려나 싶었다. 단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노아 사건의 메시지)와 사람들이 상상력을 동원해 말하고자 하는 바(영화의 메시지)만 잘 분별하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정작 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좀 더 심각하게 생각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이 영화는 성경으로부터 소재를 가져 와서 상상력을 동원해 나름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스토리와 소재를 가져와 이를 상당히 왜곡했다. 결과적으로 성경과 다른 정도가 아니라 반(反)성경적이고 반(反)기독교적인 메시지를 전했다.

성경과 상당히 다른 영화 <노아> 이야기

물론 이 영화는 139분이라는 긴 상영 시간 내내 사람들의 집중도를 유지시키고 또 나름대로 말하고자 하는 바도 있다. 러셀 크로우, 제니퍼 코넬리, 엠마 왓슨, 안소니 홉킨스 등의 쟁쟁한 배우들이 등장하는 상당한 잘 만들어진 영화이다. 그러나 결코 종교 영화도 아니고 기독교 영화도 아니다. 심지어 비(非)성경적이고 반(反)성경적이기까지 하다.

이 영화는 성경과 전혀 다른 이야기(narrative)를 내세운다. 창조 전에는 아무 것도 없었는데, 그 무(無)로부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뱀을 이용한 사탄의 유혹으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인류가 타락한 후에 가인이 아벨을 죽였고, 가인의 후예들이 문화를 발전시켰다. 셋의 후예들 가운데 므두셀라의 손자인 노아가 지시하심을 받아 방주를 만들었고, 그 후 일어난 윗물과 아랫물의 터짐으로 방주에 타지 않은 모든 인간들과 기식(氣息) 있는 것들은 다 죽었다.

그리고 홍수 후에 다른 피조물과 인간의 새로운 시작이 있었다는 것까지가 성경에서 온 스토리 라인과 내용이다. 성경을 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알 수 있듯이 그밖의 모든 것은 이 영화가 성경의 이야기를 아주 자유롭게 개작한 내용이다. 그 개작은 아마도 다음에 이야기하려는 영화의 의도와 관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성경은 노아와 그 부인과 세 아들인 셈, 함, 야벳과 그 자부들이 방주에 탔고 홍수 후에 그들로부터 인류의 새로운 시작이 이뤄진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도는 이 여덟 사람이 준비된 방주에 들어가 홍수로 인한 멸망을 면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노아가 이 영화의 대반전 이전까지는 인류가 종국적으로 다 멸해질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확신했다고 그리고 있다. 그래서 자녀들의 혼인과 자녀 나을 수 있는 가능성을 다 봉쇄한 것이다. 자신의 막내 아들이 마지막 사람이 돼 다른 사람들의 장례를 감당하라고 하는 것으로 이 영화는 그리고 있다.

이로부터 어떻게 인류가 새롭게 시작하고 번성하는가를 그리고 있는 것이 이 영화의 주제의식이다. 함이 스스로 자신의 짝을 찾으려고 했다는 것, 노아의 부인 외의 유일한 여자로 방주에 있게 된 여인이 불임이었기에 모든 인류의 멸망을 원하던 노아가 그녀를 방주에 있도록 했다는 것, 그녀가 므두셀라의 이적으로 나음을 입어 쌍둥이 자매를 낳게 되자 인류가 더 이상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확신한 노아가 그 아이들을 죽이려고 했었다는 것은 성경의 이야기에서 멀리 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성경과 다른 이 이야기는 영화의 중요한 스토리 라인이 된다.

또한 이 영화에 등장하는 감시자들(watchers)의 존재는 성경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인간을 지켜보고 도우라고 보냄 받은 빛의 존재들이 타락한 인간들, 특히 가인의 후예들을 도와서 문화를 건설하게 됐다는 것도 성경의 왜곡이다.

그에 따라 창조자로부터 벌을 받아 재와 바위를 뒤집어써 마치 영적인 존재가 흙과 바위에 갇히게 됐다는 것은 지극히 비성경적인 발상이다. 그런 존재들이 가인의 후예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일정한 지역에 있게 되고 그들이 노아를 도와서 방주를 만들었다는 것도 비성경적인 내용이다. 더구나 이들이 노아를 돕고 가인의 후예들을 죽이는 일을 함으로써 그 재와 흙과 바위로부터 벗어나 하늘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도 매우 비기독교적인 내용이다.

더구나 홍수를 피하기 위해서 방주에 다른 사람들이 타려고 하는 것을 (죄악에 빠진 인류는 다 멸망해야 한다고 확신한) 노아가 폭력으로 막았다는 것과, 가인의 후예 중의 라멕이 자신의 노력으로 방주에 있게 됐다는 것도 내용이다.
더 심각한 것은 우리가 다음에 논의하고자 하는 바에 있다. 사실 여기에 이 영화의 근본적 문제점이 있다.

 

영화의 비성경적 특성들

반전(反轉) 부분에 이르기 전까지 노아는 죄악에 빠진 인류는 모두 멸망해 죽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상반(相反)된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런 확신을 가지고 손녀들을 죽이려고 하던 노아가 갑자기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생각을 바꿔 인류가 다시 번성하게 되는 토대를 마련한다는 설정에 있다. 이런 설정은 하나님은 모든 정황 가운데 인간들에게 선택할 여지를 주시고, 결국 인간을 위하고 살리는 쪽이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이라는 시사를 준다.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인간의 구원과 생명을 살리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그런 쪽이 옳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사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둘째로,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생명을 살리는 쪽이라고 미리 생각하게 하는 문제이다. 하나님도 이런 전제에 동의하고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 <노아>는 하나님을 인정하되 우리네 인간의 자유로운 결단과 함께 있을 수 있는 하나님만을 용인 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하나님을 떠나 자유롭게 생각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고 싶은 방향을 잘 드러낸다. 하나님 없이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 중의 일부는 하나님이 없는 것을 상정하고 살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자기 주변에 있되 절대적 명령을 하지 말고 우리가 스스로 알아서 생각해 가장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갈 수 있도록 하는 존재로서 계시기를 원하기도 한다. 과정 신학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만이 허용될 때 그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라고 하기 어렵다.

인간의 타락성은 아주 심각해서 이와 같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는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만을 기뻐한다. 결국 이 영화 속의 감시자들(watchers)의 구원과 비슷하게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잘 살면 된다는 식이 된다. 그것은 결국 자력구원(自力救援)의 주장이 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도 이 영화는 기독교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영화 속에서 몇 번 등장한 뱀의 허물을 가지고 축복하는 것에도 그런 함의가 있는 듯하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의도가 의심스럽다. <블랙 스완>으로 인간 내면의 죄악성을 잘 드러낸 그의 좋은 특성이 이 영화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인간 스스로 그 죄악성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시사를 주려고 하는 것 같다.

 

우리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결국 인간은 타락했고 죽어야만 하는 존재인데도 새롭게 기회가 주어져 인간들 스스로가 다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는 이 영화 <노아>의 주장에 대립해 말하는 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바이다. 우리가 처한 상황은 그야말로 철저히 타락해서 스스로 새로운 시작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 가운데서 우리의 노력과 힘씀과 우리의 시도가 아닌 하나님의 주도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이 일어났고 그것을 믿는 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과 새로운 출발의 길이 된다는 것을 주장하고 권하고 선포하는 것이 기독교의 메시지다.

타락한 인간은 이 기독교의 메시지가 너무 지나치게 하나님 혼자 다 하시는 것 같고 자신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같아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영화 <노아>가 말하는 것보다 더 심각하게 타락한 상황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만이 각 사람과 이 사회와 이 세상을 새롭게 출발시킬 수 있고 진정 개혁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심각한 문제 앞에서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를 말해야 한다. 이런 매우 중요한 문제들(crucial issues) 앞에서 ‘이것도 저것도 다’(both-and)를 말하려고 하는 것은 문제의 회피요, 또 하나의 반역인 것이다.


이승구 편집위원
합동신학대학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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