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사랑한 바람의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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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한국
  • 승인 2014.07.31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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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작가 생텍쥐페리 사망 70주년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마음으로 보아야만 분명하게 볼 수 있어.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거든.’

위의 구절들을 듣는다면 누구나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를 떠올릴 것이다. ‘어린왕자’는 어른들의 위한 동화, 20세기 최고의 프랑스 문학작품, 250개 언어로 번역된 소설 등 각종 찬사를 받아왔다. 생텍쥐페리가 실종되기 1년 전 완성된 이 작품은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으며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동시에 많은 이들이 생텍쥐페리의 삶을 분석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오고 있다.

2014년 7월 31일은 그가 지중해 상공에서 실종된 지 70년이 되는 날이다. 많은 이들은 생텍쥐페리를 어린아이의 천진함을 가진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혹은 모험심 강한 조종사쯤으로만 인식하고 있다. 하늘에서 이런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을 그는 과연 그를 따라다니는 수식어에 만족할까? 사망 70주년을 맞이해 그의 삶을 재조명한다.

생텍쥐페리와 부인 콩쉬엘로

제멋대로에 바람기까지 다분한 남편

‘어린왕자’속 장미와 어린왕자는 순수하고 애절한 사랑의 대명사다. ‘어린왕자의 장미’라고 불리는 생텍쥐페리의 부인 콩쉬엘로는 어린왕자의 장미와 닮은 부분이 많다. 이야기 속 장미는 너무 연약해 병으로 덮어 보호해 줘야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강인함을 어린왕자에게 보여주려고 계속해서 노력한다.

실제로 콩쉬엘로는 천식을 앓았으며 생텍쥐페리와 결혼 생활 중 여러 어려움에 맞닥뜨렸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실종되는 날까지 그의 옆을 지키며 그가 작품을 쓰면서 조종사로 활동할 수 있게 내조했다. 그녀는 엘살바도르의 부호가문 출신이었지만 남미 출신이라는 이유로 생텍쥐페리의 가족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생텍쥐페리와의 결혼 생활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생텍쥐페리는 비행으로 많은 시간 집을 비웠고 숱한 여성들과 염문까지 뿌리고 다녔다. 이를 견디지 못한 콩쉬엘로는 결국 생텍쥐페리에게 이혼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변호사를 대동한 자리에서 생텍쥐페리는 콩쉬엘로에게 격렬하게 키스하며 말한다.

“당신이 다른 곳에서 사는 것은 용납할 수 없소. 법적인 것과는 상관없이 난 당신을 사랑하오!”

그러고는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이혼이라는 심각한 일생일대의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반적인 행동은 아니지만, 콩쉬엘로는 그런 생텍쥐페리에게 다시 반했으니 둘은 천생연분이었던 게 아닐까.

어느 날 비행을 앞둔 생텍쥐페리는 콩쉬엘로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내게 당신의 손수건을 주오. 그 위에 <어린왕자>의 후속편을 쓰리다. 당신은 이제 더 이상 가시가 있는 장미가 아니라오. 언제나 어린왕자를 기다리는 꿈의 공주라오.”

그렇게 말하고 떠난 생텍쥐페리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1998년 9월 7일 프랑스 남부 해안에서 그가 탔던 비행기 제조번호가 동일한 비행기 파편과 그의 물건으로 추정되는 물건이 발견됐다. 발견된 물품 중 하나는 아내의 이름 ‘콩쉬엘로’가 선명하게 새겨진 은팔찌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그녀와 함께였다.

 

행동주의 문학가, 불량 조종사

대다수의 생텍쥐페리의 작품에는 공통점이 있다. ‘비행’이 소재가 되거나 주제가 된다는 점이다. ‘남방 우편기’, ‘야간 비행’, ‘전시 조종사’, ‘인간의 대지’ 모두 생텍쥐페리 본인의 경험을 다듬어 완성된 작품들이다. 생텍쥐페리는 사막에 추락했다가 살아남은 경험, 완전하지 않은 1940년대의 비행기 때문에 조종사가 매번 겪어야 하는 위험과 두려움을 자신의 작품에 고스란히 남겼다.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의 작품에 나오는 사건들에는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박진감, 진실성, 그리고 현실성이 담겨있다.

비행에 대한 생텍쥐페리의 열정과 사랑, 신(新)항로 개척 의지, 그리고 동료 조종사들에 대한 그의 의리는 누구도 따라갈 수 없다. 하지만 그는 그다지 모범적인 조종사는 아니었다. 그는 비행기 검사나 동체 감독에 무신경했고, 동료 조종사가 운전하는 조종사석에 앉아서도 공상에 빠지기도 했다. 항로를 벗어나 비행해 주의조치를 받는 일도 잦았다. 모범적이지 않았던 그의 비행 습관이 결국 그를 위험으로 몰아넣던 것은 아닐까.

1943년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무렵 생텍쥐페리는 뉴욕에서 작품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언론은 그가 전쟁을 피해 뉴욕에 머문다는 보도를 잇달아 내놓으며 그를 비겁자로 묘사했다. 그 과정에서 생텍쥐페리의 작품 ‘전시 조종사’는 판매금지를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생텍쥐페리는 자신이 매국노로 취급받는 사실에 분노하며 프랑스로 돌아가 전투기 조종사가 되기로 마음먹고 1943년 자신의 옛 부대에 복귀했다.

하지만 그의 나이는 이미 40대 중반. 과거 비행기 사고로 왼쪽 다리마저 불편했던 그는 전투기 조종사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전투기 조종을 하게 됐지만 한참이나 어린 동료들과 같은 훈련을 받으며 임무를 수행했던 생텍쥐페리는 1여 년이 지난 1944년 7월 무렵 육체적‧정신적으로 빠르게 지쳐갔다.

그의 마지막 정찰 비행은 1944년 7월 31일이었다. 유난히도 맑고 화창했던 그날, 그는 정찰 비행을 자원했다. 생전의 그는 “목숨을 내건 위험한 모험이야말로 인간의 소명을 가장 숭고하게 실현하는 것”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말대로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고, 자신이 그렇게도 사랑했던 비행기 안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생텍쥐페리에 대한 또 다른 ‘반전’ 한 가지. 많은 사람들이 어린왕자와 생텍쥐페리를 동일시하지만 생텍쥐페리의 사진을 본다면 실망을 금치 못할 것이다. 생텍쥐페리는 M라인의 대머리를 가지고 있고 매력적인 얼굴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물론 그렇다 해서 그의 내면에 자리했던 아름다운 말들의 가치가 하락하는 건 아니다. 그가 하늘에서 사라진지 70주년이 되는 2014년 7월 31일에도 작가 생텍쥐페리의 작품은 여전히 빛나고 있다.


양희경 인턴기자 hkyang1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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