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를 통해 만나는 플라톤 철학
신화를 통해 만나는 플라톤 철학
  • 미래한국
  • 승인 2015.02.04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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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플라톤신화집>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숲 (2014)
 

<플라톤신화집>이라니? 플라톤이 토마스 불핀치처럼 그리스 신화집을 펴낸 적이 있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플라톤이 <신화집>을 낸 적은 없다. 하지만 플라톤은 그의 저작들 속에서 자신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전래의 신화(神話)들을 차용하거나 필요에 따라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변용하곤 했다. 이 책은 플라톤의 여러 저작들 가운데 그런 내용들을 모아 엮은 것이다.

‘미덕의 기원’은 <프로타고라스>, ‘혼의 심판’ 은 <고르기아스>, ‘자웅동체’, ‘에로스의 탄생’은 <향연>, ‘저승’은 <파이돈>, ‘동굴의 비유’, ‘에르의 저승여행’은 <국가>, ‘날개 달린 혼’, ‘매미신화’는 <파이드로스>, ‘우주의 두 주기’는 <정치가>, ‘아틀란티스 섬과 고대 아테나이’는 <타마이오스>와 <크리티아스>에서 각각 발췌했다.


소크라테스와 노자(老子)

플라톤을 읽은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여기서 인용된 신화들은 단순한 신화가 아니다. 신화 속에 플라톤의 정치철학, 관념철학이 녹아 있다.

‘미덕의 기원’에서 플라톤은 정치공동체의 형성에 대해 언급한다. 제우스는 헤르메스에게 정의와 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눠주라면서 “정의와 염치가 소수의 것이 되면 국가가 생길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염치와 정의를 나눠 가질 수 없는 자는 공동체의 역병(疫病)으로 간주하여 죽여 없애야 한다고 내 이름으로 법을 정하라”고 말한다. 정의와 염치가 사라진, 아니 정의의 이름으로 온갖 염치없는 일들이 자행되고 있는 오늘의 우리 시대를 돌아보게 하는 말이다.

‘혼의 심판’을 보면, 사후의 심판관이 권력자들의 영혼을 붙잡으면 “그 자의 혼 안에서 건전한 것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거짓 맹세와 불의로 인해 그의 혼이 매질을 당해 흉터투성이인 것을 발견하는데, 이것은 그 자의 행위 하나하나가 그의 혼에 남긴 자국”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인들이란……’ 하는 생각에 쓴웃음을 짓게 된다.

‘에로스의 탄생’에서, 디오티마라는 현명한 여인은 소크라테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무지의 문제점은 다름 아니라 아름답지도 훌륭하지도 지혜롭지도 않은 자가 그러한 자기에게 만족하는 것이지요. 자기에게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 것을 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요.”

소크라테스가 평생 견지했던 지(知)에 대한 자세, “너 자신을 알라”는 말과 통하는 얘기 아닌가?

같은 이야기에서 디오미타는 사랑에 대한 연구의 최종 목표에 다가가면서 만나게 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아름다운 무엇’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그가 보게 될 것은 첫째, 항상 있는 것이어서 생성되지도 소멸하지도 않으며,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아요. …그 아름다움은 그에게 얼굴이나 손이나 몸의 다른 부위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지도 않으며, 어떤 담론이나 지식은 물론이요 동물이든 대지든 하늘이든 그 밖의 다른 것이든 다른 것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도 나타나지 않아요. 오히려 그것은 언제나 그 자체로서 존재하고 형상이 하나라오.”

어디서 본 듯한 이야기. 바로 <노자>에서 ‘도(道)’에 대해 설명하는 것과 흡사하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파이돈>에서 발췌한 ‘저승’과 <국가>에서 발췌한 ‘에르의 저승여행’이었다.

‘저승’에서는 죽은 자들은 자신의 수호신들의 인도를 받아 저승에 가서 생전의 행적에 따른 처분을 받는다. 지은 죄가 커서 치유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자들은 타르타로스에 던져져서 다시는 나오지 못한다.

큰 죄를 저지르기는 했지만 그 죄가 치유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자들은 타르타로스에서 1년을 보낸 후 밖으로 내던져지며 자신이 죽이거나 폭행했던 자들에게 용서를 받으면 구원된다. 남달리 경건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순수한 거처로 올라와서 대지 위에 살게 된다.


<신곡>의 원형을 만나다

‘에르의 저승여행’에서 전쟁터에서 전사했던 에르는 ‘저승의 일을 인간들에게 전하는 사자(使者)’가 되라는 사명을 부여받고 저승을 두루 여행한 후 돌아와 세상 사람들에게 오디세우스, 아가멤논 등 영웅들을 비롯해 죽은 자들이 저승에서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를 보고한다.

짧은 글들이지만 이 이야기들을 읽는 순간 나는 단테의 <신곡>을 떠올렸다. 시인 단테가 모든 시인들의 우상이나 다름없는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지옥, 연옥, 천국을 여행하면서 생전의 잘못들에 따라 지옥이나 연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역사상 인물들이나 당대 유명인들을 만난다는 설정이 무척이나 닮았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플라톤은 ‘지혜와 정의’의 추구를 통해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역설하는 반면에 단테는 신앙으로 구원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아, 하나 더 있다. 단테의 <신곡>이 플라톤의 신화들의 경우보다 형벌이 보다 구체적이고 형량이 무척 무겁다.


<유토피아>의 뿌리 아틀란티스

<타마이오스>와 <크리티아스>에서 발췌한 ‘아틀란티스 섬과 고대 아테나이’는 그 유명한 아틀란티스섬의 신화다. 플라톤의 시대보다 9000년 전에 대서양에 있었다는 전설의 대륙 아틀란티스의 이야기는 <유토피아>를 비롯해 오늘날까지도 소설, 만화, 영화 등을 통해 다양하게 변주(變奏)되는 이상향(理想鄕) 스토리의 원형(原型)이다.

이들 이야기들은 그리스-로마가 서양 문명에 얼마나 깊은 유산을 남겼는지를 새삼 느끼게 해 준다.

<플라톤>의 여러 저작들을 이미 섭렵한 사람들은 이 책을 굳이 읽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리스 고전, 특히 플라톤의 저작들에 처음 입문하려는 사람(나도 그 중 하나지만)들에게는 큰 부담 없이 ‘맛보기’삼아 읽어 볼 만한 책이다.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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