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진화’ 진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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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한국
  • 승인 2015.05.27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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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가정의 달, 문화 코드로 본 가족

일부일처제 결혼과 혈연으로 구성된 근대적 의미의 가족은 파산 

▲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미래한국 편집위원

미국의 경우 남편은 돈을 벌고 아내는 가사를 돌보면서 두 명 내외의 자녀를 양육하는 가족은 전체 인구의 7%에 불과하다.

최근 통계가 아니라 35년 전 통계다. 사랑을 기반으로 남녀가 결합하여 남자는 가계를, 여자는 가계부와 육아를 담당하는 형식이 미국과 서유럽에서 자리 잡는 데 걸린 시간은 150년이었다.

그런데 이상적이라고 믿었던 모델이 무너지는 데는 불과 25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1960년대 들어 미국의 반전(反戰) 운동은 그 전선을 전(全)방위로 확대하며 인권차별 반대와 성차별 반대로 이어진다.

1960년 피임약 에노비드의 시판으로 시작된 피임 혁명은 원치 않는 임신으로 더더욱 원치 않는 삶을 감수해야 했던 여성들의 삶을 통째로 바꿔놓았다.

하룻밤의 즐거움이 평생의 굴레가 되는 끔찍한 일이 사라진 것이다. 1973년 미국 대법원은 여성의 낙태 권리를 인정했다.

피임에 실패했더라도 사후(事後)조치로 원상태 복귀 가능을 여성의 권리로 못 박은 것이다.

1966년부터 1979년까지 이혼율은 두 배로 치솟았다. 경제 성장으로 일자리는 풍족해졌고, 이제 여성들은 더 이상 빵을 위해 인생을 구걸하지 않아도 되었다. 당연히 합법적인 자식과 사생아의 구분도 사라졌다.

남녀가 결합하여 아이를 낳고 사는 혈연가족은 수명을 다했다는 주장이 나오는 기원이다. 성적(性的) 규제가 느슨한 변두리 어느 소수 인종들 이야기가 아니다. 기독교 국가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근대적 의미의 가족 모델은 일부일처(一夫一妻)제 결혼을 기반으로 한다. 칸트는 결혼을 ‘상호간 성기(性器)의 독점 사용에 대한 계약과 신뢰’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문제는 칸트의 이 정의가 인간 본성과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일부일처제의 기원은 파트너를 고르는 측면에서 유리한 조건의 남성과 불리한 조건을 가진 남성 사이의 협약이었지만, 역시 본능을 억누르는 발상이었다.

사실 위생상 다소 ‘안전’하고 이용 시 ‘편리’한 것을 빼면 일부일처제의 장점은 별게 없다. 계약 측면에서 보자.

서양 민법의 제1조는 ‘계약은 이행되어야 한다’ 이다. 계약의 이행을 강제가 아니라 상호 간 신뢰에 뒀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서로 간 노력해서 어떻게든 유지해보라는 얘기지, 누군가 나서서 강제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오래 버티던 우리나라에서도 얼마 전 간통죄가 폐지됐다. ‘계약과 신뢰’가 사적(私的)인 영역임을 인정한 것이다.

몬타나 대학의 로버트 베이커는 앨리스톤과 공저한 <철학과 성(性)>에서 ‘성적(性的) 쾌감은 본질적으로 이익의 일종이고, 사회적인 측면을 배제하자면 최근 등장한 쾌락이 유효할 경우 예전 것보다 더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근대적 의미의 가족은 이미 파산 

원래 글을 쓰면서 남의 발언을 잘 인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같다 붙이는 이유는 그 주장이 위험해서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학적 연구 영역에서 공적(公的)으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공지하기 위해서다.

좋다는 것, 더 좋은 것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니다. 인간은 더 좋은 것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타인에 대한 고통과 피해는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다).

가족을 일부일처제 결혼과 혈연관계로만 놓고 본다면 근대적 의미의 가족은 이미 파산했다. 여배우 조디 포스터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아이들을 기르며 산다.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는 대륙별로 아이들을 입양하는 중이다. 두 케이스를 합쳐 보자.

백인 남성과 흑인 남성이 짝을 짓고 이들이 아시아계 남자애와 여자애를 입양했다면 이들은 가족일까. 전통적으로는 아니지만 이들이 가족이 아니라고 확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가족은 ‘혈연(血緣)’에서 ‘함께 있는 사람’으로 중심 개념이 바뀌고 있다(사실 혈연이라는 것도 유산 상속의 측면에서 발달해 온 개념이다). 메일리즈는 아예 한 걸음 더 나간다.

다(多)부모 가족 제도가 장차 지배적인 가족 형태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주장인데 성(性)에 관대한, 정신 나간 사회학자의 망상이 아니다.

▲ 가족의 개념이 '혈연'에서 '함께 있는 사람'으로 바뀌고 있다. 사진은 지난 5월 7일 서울 서초구에서 다문화 가정 주부들이 동네 어르신들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주는 장면.

그의 말을 따르면 이혼 부부가 자녀를 데리고 재혼하는 ‘집합 가족’이 보편화 될 것이고, 이 집합 가족이 여러 개 모여 경제와 섹스를 공동으로 부담·소유하는 22세기형 공동체가 등장할 가능성도 높다는 이야기다.

휴 그랜트 주연의 ‘어바웃 어 보이(About a boy)’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의 끝 부분에서 ‘어쨌거나’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먹고 마신다.

그들은 모두 행복해 보인다. 영화는 사회적 파장을 염려해서 결말을 유보하고 있지만, 행간을 읽는 일은 어렵지 않다. 영화는 분명 이런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타진한다.

다른 예측도 있다. 1인 가구의 급속한 증가로 인한 1인 가족 대세론이다. 이는 현실적으로,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하다.

인류는 오랫동안 공동생활을 영위해 왔고 그 기억은 유전자에 촘촘히 박혀 있다. 이 경우 결국 메일리즈의 ‘다세대 일가족’이라는 형식으로 진화하게 될 공산이 크다.

가족사 연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모건이다. 모건의 <고대사회>는 ‘세대 간 집단혼’이라는 ‘혈연가족’을 연구 성과로 내 놓은 바 있다.

이 혈연 가족에서 한 단 계 또 발전한 게 ‘푸날루아(Punalua) 가족’(원시 사회에서, 집단 결혼이 허용된 가족 형태)이다.

여기서는 형제 자매간 성교가 금지된다. 문명으로 근접해 온 것이기는 한데 이 대목에서 다소 난감해진다.

그렇게 진화를 해와 놓고는 결국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다는 말인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가족의 개념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내가 그녀가 딴 데서 낳은 아이와 사는 것도 이상하지 않고, 그녀가 내가 예전에 낳은 아이와 사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일부일처제는 인간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두가 인정했다. 이성(異性) 간의 결혼이 결혼의 전부라는 공식도 파기됐다. 

걱정해야 할까. 위태롭다는 것은 지금의 시각으로 봐서 그렇다는 것일 뿐이다. 가족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50년 후 세상이 궁금하다. 인류는 참 재미 있는 종(種)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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