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기독교 탄압국’으로 몰다
일본을 ‘기독교 탄압국’으로 몰다
  • 미래한국
  • 승인 2015.07.15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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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은의 이승만 탐구] 이승만과 기독교 ②

일본의 한국 기독교 박해를 전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알려 일본을 압박하는 외교방략으로 삼아

중국 대륙에서 당송(唐宋) 교체기에 고려가 한반도를 통일했고, 원명(元明) 교체기에 조선이 건국되었다. 이제 청(淸)의 쇠락과 함께 조선에서도 새로운 국가 건설이 필요해졌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國敎)로 삼았고, 조선은 유교를 국가 지도원리로 삼았다. 조선의 쇠락과 함께 새로운 정신세계를 주도할 종교가 절실해졌다. 

1885년 이 땅에 개신교가 전래된 이래 1900년에 신약성서가 완역(完譯)되었다. 그 결과가 1907년에 전국을 휩쓴 ‘대부흥 운동’으로 나타났고 이것은 곧 ‘백만인 구령(救靈)운동’으로 이어졌다.

국권을 빼앗긴 백성의 실의(失意), 이길 수 없는 침략자 일본에 대한 적개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이끌어줄 지도자를 갈망하던 시기에 개신교가 정신세계를 제시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곧 나타난, 전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폭발적 분출이었다. 

이승만이 감옥에서 개신교로 개종시킨 이상재는 “한국의 유일한 희망은 기독교에 있다. 다른 나라들도 기독교 진리를 통해서만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라고 전도했다.

1907년 한국을 방문한 세계기독청년회 총재 존 모트도 강연에서 “한국은 근대 선교사상 완전히 복음화 된 유일한 비(非)기독교국이 될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나라를 살리는 길은 기독교밖에 없습니다”라고 용기를 불어 넣었다. 이승만을 아낀 존 모트 총재는 후일 세계기독청년회 발전의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주변 정세를 보면 사정은 더 절박하다. 대륙에서 단순한 왕조 교체를 넘어서 중·일·러 3국 사이의 다툼으로 판이 커져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사이의 패권경쟁 시대가 되었다. 이승만은 감옥에서 이것을 알고 있었다. 국가와 교회 

“그때 세월(과거)에 흥망성쇠는 아세아 동방삼국의 집안끼리 하는 일이라 이해득실이 다 그 속에 있다 하려니와 지금 이 세대는 동서양이 상통하며 육대부주가 연락하여 오색인종이 섞여 살며 만국이 경쟁하여 세력을 확장하며 문명을 다투며 구라파의 인물 교화 정치 학문이 제일이라.” 

따라서 조선은 싫든 좋든 세계 정치질서에 편입하게 되었는데, 이에 서구사상을 공부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서구사상이란 기독교, 특히 개신교에 바탕을 둔 경험주의 실학사상이다. 

어머니에게 불교를 버리지 않겠노라고 맹세했던 이승만이 개신교를 개인의 구원을 넘어 민족의 종교로 내세운 이유는 칸트에 의하면 민족국가 독립에 언어와 함께 종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보편적인 평화의 측면에서도 중요성이 있다. 인류 역사에서 첫 번째 평화기구는 국가였다. 두 번째 평화기구가 교회였다. 중세에는 로마교회가 세계 정부였다. 

“교회의 목표는 보편 종교로서 세계제국이다. 이런 면에서 보편적 평화의 씨는 뿌려졌다.  우리는 기독교를 평화의 재정립이라고 말할 수 있다.” 

로마제국을 이어받은 것은 로마교회였고, 그 후 이를 이은 국민국가가 출현해도 신성로마제국의 호칭은 정통성의 대명사로 이어져 왔다. 유럽 역사는 기독교의 역사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로마교회의 평화는 타종교 사이에 이른바 성전(聖戰)을 막지 는 못했으나 그 전 시대와 비교하면 로마교회의 영적(靈的) 역할은 수행한 셈이다. 당시에는 국가의 개념이 없었다. 국가가 탄생하면서 로마교회를 대신할 제도가 필요해졌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를 정의할 국제법도 필요했다. 칸트는 로마교회를 대신할 세속의 역할을 할 수 있는 평화연합체를 제안했다. 이것이 국제연맹이나 국제연합 같은 자유국가연합체다. 

기독교는 중요한 독립운동 수단 

이처럼 교회는 영적 평화연합체였다. 근대에 와서 미국의 대륙회의가 ‘독립선언문’에서 “대의를 들어 만국대주재(the Supreme-Judge of the World)의 판결하심을 바라는” 것도 여기에 해당한다. 이승만이 바로 이 만국대주재의 영적 평화연합체를 중시한 것은 그가 세계 대세를 판독했다는 증거다. 

그 이유는 그가 일본의 악정(惡政)만으로는 독립을 호소하는 명분이 약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 다른 서구 열강도 그들의 식민지에서 악정을 실시하고 있었고, 가재는 게 편이었다.

토지의 착취는 공통적인 악정이었다. 식민 모국의 악정에 대하여 식민지 백성이 암살과 테러로 맞서는 것은 열강들에게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고, 그것을 무력 탄압의 구실로 삼는 일도 허다했다. 일본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처단에 재빠른 한일 병탄으로 응수했다. 

▲ 이승만 대통령이 1913년 저술한 <한국 교회 핍박>. 이승만은 일본이 한국의 기독교를 핍박하고 탄압하는 사탄국가라고 공격해 서양 열강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승만은 일본의 악정을 서구 식민 모국의 그것과 차별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일본의 한국 기독교 박해다. 열강을 비롯하여 전 세계 5억 기독교인에게 이것은 커다란 명분이 된다. 특히 미국 교회에게 이것은 효과적이었다. 영적 평화연합에 호소하기 위해 이승만은 망명하여 제일 먼저 착수한 저술이 <한국교회핍박>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준다. 

여기서 그는 105인 사건을 가리켜 “기독교인들은 (한국) 국민 전체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규정했다. 어떻게 보면 서양의 역사 자체가 ‘기독교 박해-기독교 공인’의 역사다. 이 과정에서 핍박받던 민족이 자유를 찾았다. 

일본이 한국 기독교를 말살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한다는 것은 역사에 역행하는 것이고, 인류 대의에 어긋나며, 신앙의 자유에 반하는 것으로, 더욱이 기독교 정신에 거슬리는 일이었다. 이런 점에서 신도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의 아킬레스건이다. 

이승만은 모든 독립운동 대회에서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끝내는 순서를 잊지 않았다. 그가 세계 여론에 호소하는 순서를 보면 교회 순회로 시작한다. 그리고 일본의 한국 교회 박해를 빠짐없이 강조한다. 기독교는 이승만에게 중요한 독립운동 수단이 되었다. 그가 비폭력 외교방략을 택한 배경과도 무관치 않다. 

체코-슬로바키아 건국의 아버지 마사리크도 독립운동에서 열강 특히 프랑스의 식민정책을 건드리지 않는 방법을 택했다. 그에게 프랑스의 도움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열강에게 호소한 방법은 가톨릭 구교를 강권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체코-슬로바키아 개신교 박해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같은 가톨릭 국가라도 우방인 프랑스와 차별을 뒀다. 그것은 다른 가톨릭 국가와 달리 가톨릭의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전쟁을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마사리크는 말한다. “오스트리아의 가톨릭, 독일의 루터교, 러시아의 정교회, 어느 것도 전쟁을 막지 못했고” 스스로의 멸망을 자초했다. 개신교야말로 체코 민족의 새로운 희망이라고 그는 보았다.

김학은 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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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 2015-07-25 14:33:52
이승만 추종자로구먼,,,ㅊㅊㅊ 속을뻔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