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때부터 한반도에 무슬림 집단거주
신라 때부터 한반도에 무슬림 집단거주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6.04.09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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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추적] 한국과 이슬람 교류사

한반도에 과학기술 전수, 고려인삼, 금속활자 유럽에 알려

중국 당(唐)나라의 수도 장안(長安·현재의 시안)은 세계 문명의 집산지로서 페르시아, 바그다드 등에서 온 외교 사절이 빈번히 내왕했고, 무슬림 상인들에 의해 아랍과 서역 지방 물품이 대량 유입되었다. 당과 연합하여 삼국을 통일하고 긴밀한 외교관계를 유지하던 통일신라인들은 장안에서 이슬람 문명권에서 온 외교 사절이나 무슬림 상인들과 다양한 접촉을 했다. 

서기 661년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가 다마스커스를 수도로 하여 우마이야 왕조를 수립했다. 이들은 중앙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장악하고 서유럽에 이슬람 문화를 전했다. 이들은 이슬람교로 개종한 비(非)아랍인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등 차별정책을 펼치자 반란이 일어났다. 이들의 박해를 피해 알라위족의 일부가 신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이븐 쿠르다드비가 845년에 편찬한 지리서 <왕국과 도로 총람>에는 신라에 거주하는 무슬림의 존재가 언급되어 있다. 이 책은 아랍인들이 자연환경이 뛰어나고 금이 많이 나는 신라를 동경하여 다수의 아랍인들이 한반도로 건너가 영구 정착했다는 사실을 기록해 놓았다. 

무슬림들이 우리 역사에 본격 등장하는 것은 고려 시절이다. ‘고려사’ 현종 15년(1024)에는 ‘대식국(아라비아)에서 열라자 등 100명이 와서 왕을 만나 토산품을 바치니 왕이 그들을 극진하게 대접하게 하였다. 또 그들이 돌아갈 때 금 은 옷감 등을 선물로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듬해인 1025년에도 하선과 라자를 비롯한 100여 명이 와서 토산품을 바쳤고, 1047년에도 ‘대식국 상인 보나가 등이 와서 수은, 용치, 점성향, 몰약, 소목 등 귀한 물품을 바쳤다’는 기록이 발견된다. 

▲ 고려의 벽란도 일대에는 수많은 외국인들이 모여 살았는데, 그중 대부분이 무슬림 상인들이었다. 사진은 당시 벽란도 일대 상상도.

개성, 벽란도 일대에 무슬림 집성촌 형성 

고려는 몽골의 침략을 당해 원(元)나라의 제국 질서에 편입되었다. 이희수 한양대 교수의 <한-이슬람 교류사>에 의하면 다수의 무슬림(우리 역사서에는 회회인으로 기록되어 있음)들이 고려 후기부터 개경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정착했다. 이들은 원나라가 고려를 지배했을 때 주로 사신이나 통역관, 관리, 몽골 귀족의 시종무관, 서기, 근위병, 혹은 교역을 목적으로 한 상인으로 고려에 와서 살다가 한반도에 정착했다. 

당시 원 제국의 교역망은 유럽, 터키까지 뻗어 있었는데, 그 동쪽 종착지가 고려의 수도 개성 일대였다. 이 교역망을 타고 수많은 무슬림들과 이슬람 문화가 대량 유입되었다. 고려에 정착한 무슬림과 유럽 상인들은 예성강 하구의 국제항 벽란도와 개성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개성과 예성강 하류의 벽란도 일대에는 최소 4만 명에서 7만 명에 달하는 외국인들이 모여 살았는데, 대부분이 무슬림 상인들이었다. 이들은 ‘예궁’이라는 모스크를 지어 기도를 하고 코란을 낭송했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소개된 고려 가요 ‘쌍화점’에도 무슬림 상인이 등장한다. 쌍화란 투르크계 만두의 일종인데 쌍화점의 내용은 쌍화점(만두 가게)에 쌍화(만두) 사러 갔더니 무슬림 주인아비가 고려 여인의 손목을 잡으면서 은밀하게 유혹하는 내용이다. ‘쌍화점’은 중동이나 중앙아시아 상인들이 이역만리 고려에까지 와서 만두 가게를 열고 살아갈 정도로 우리 민족의 개방성과 대외 지향성을 보여주는 내용증명이나 다름없다. 

덕수 장(張) 씨의 시조는 1274년 충렬왕비가 된 몽골 제국공주의 시종무관으로 개성에 온 위구르인 삼가다. 그는 충렬왕에게 장순룡이란 이름을 받고 고려 여인과 결혼하여 덕수 장 씨의 시조가 됐다. 그는 뛰어난 정치력과 외교 역량으로 충렬왕의 신임을 받았고, 종2품 벼슬(첨의 참리)을 제수 받았다. 

충렬왕 시절 무슬림 민보는 고려에 귀화하여 대장군 벼슬을 제수 받았고, 고려시대 매의 수집과 관리부서인 응방(鷹坊), 통역관 양성소인 사역원에도 다수의 투르크인들이 근무한 기록이 있다. 

과학기술문명 한반도에 전수 

당시 한반도에 진출했던 무슬림과 유럽 상인들에 의해 고려라는 국호(國號)가 ‘코리아(KOREA)’로 세계에 알려지게 된다. 고려인들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금속활자와 고려 인삼이 무슬림 상인들에 의해 유럽으로 보급되었다. 

서양이 종교적 근본주의로 인해 중세 암흑기를 헤매고 있을 때 무슬림들은 그리스, 로마의 천문학과 연금술, 항해술, 천문기상학, 수학, 물리학 등을 흡수하여 과학기술을 선도했다. 원나라 시절에 구축된 세계 교역망 덕분에 손쉬워진 동서 교류로 이슬람의 과학기술이 중국에 유입되었고, 무슬림 학자들이 대거 중국에 초빙되어 천문대, 의약원 등을 설립했다. 

이러한 이슬람 과학기술의 조류가 한반도까지 흘러와 100~200여 년 숙성 과정을 거친 후 조선 초기에 꽃을 피우게 된다. 조선에서 서양보다 200년 이상 앞서 측우기, 천문시계인 혼천의를 비롯하여 각종 천문기상 관측기구들이 제작되었다. 이것은 세종의 뛰어난 리더십과 함께 고려 시대부터 흘러온 이슬람의 과학, 수학, 천문학이 토착화되었기에 가능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음력은 이슬람 역법을 우리 식으로 개조한 것이다.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는 정확한 농사 달력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중국의 수시력을 가져다 쓰니 해 뜨는 시각, 달의 움직임이 잘 맞지 않았다. 그래서 세종은 집현전 학자인 정인지, 정흠, 정초 등을 시켜 농사력을 연구하게 했다. 

이 학자들이 중국에 가서 수시력을 연구하다보니 그것의 과학적 토대가 중국 역법이 아니라 이슬람 역법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슬람 역법의 원리를 가져다 중국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맞게 고쳐 썼으므로 그들에게는 맞고 우리에겐 맞지 않았던 것이다. 

정인지는 이슬람 역법의 원리와 이슬람 과학을 배워 우리 역법의 일몰 시간, 동지 같은 것을 모두 대입해서 만든 것이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쓰는 음력의 기초가 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한글 창제도 세종의 독창적 작품이라기보다는 원나라 음운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원나라는 제국 공통어를 제정하기 위해 자기들이 지배하던 중앙아시아 지역의 음운학자를 소집하여 파스파 문자를 제정했다. 이어 등장한 명나라는 파스파 문자 제정에 참여했던 핵심 학자를 원나라에 부역한 죄를 물어 요동 지방에 귀양을 보냈다. 

이들 음운학자의 후손들에게 파스파 문자 이론이 이어져 왔다는 소식을 접한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을 요동 지역으로 보내 음운학을 배워오도록 해서 한글에 그 엑기스를 녹여 부은 덕분에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는 평을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광산업에 종사한 무슬림들 

고려 시절인 1276년 무슬림 알 사마리아가 제주도에서 진주를 채취한 기록이 있다. 무슬림들은 오래 전부터 보석 세공에 특별한 자질을 갖고 있어 왕과 왕실에 가공된 보석을 진상하고 상당한 수준의 사회 경제적 입지를 마련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파악하고 있다. 

조선 초기에도 무슬림들이 한반도에서 보석 채취에 종사한 기록이 보인다. 태종 7년(1407) 1월 17일 실록에 ‘회회 사문(이슬람교 승려) 도로(都老)가 처자를 데리고 함께 와서 조선에 머물러 살기를 원하니 임금이 집을 주어 정착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때 귀화한 도로는 태종 12년(1412) 2월 24일 실록에도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회회 사문 도로에게 금강산 순흥, 김해 등지에서 수정을 캐도록 했다. 도로가 일찍이 우리나라의 수정으로 여러 물건을 만들어 바쳤는데 임금이 좋다고 칭찬했다. 도로가 아뢰기를 “조선은 산천이 수려하여 진귀한 보화가 많으니 저에게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도록 허가하면 얻을 게 많을 것입니다” 라고 했다.’ 

무슬림이 조선에 귀화하여 광산업 면허를 요청했고, 태종이 이를 허가하자 도로는 한 달 후 수정 300근을 캐서 임금에게 바쳤다(태종 12년 3월 29일). 이 사례에서 보듯 조선 초기 무슬림들은 우리 사회의 도처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고 고유 의상과 풍습,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으며 살아갔다. 이들의 모습은 세종의 즉위식 때도 발견된다. 다음은 세종실록의 기록.

‘종실과 문무백관이 경복궁 뜰에 늘어섰다. 임금(세종)이 근정전에 나오니 여러 신하들이 절을 올려 하례하고, 성균관 학생과 회회 노인, 회회 승도들도 모두 참여했다.’ 

한반도에 정착해 살던 무슬림 지도자들은 궁중하례 의식에 초청을 받아 정례적으로 참석했다. 이를 회회조회라 불렀다. 그들은 궁중조회에 참석하여 꾸란 낭송이나 이슬람식 기도를 통해 국가의 안녕이나 임금의 만수무강을 축원했는데, 이를 회회송축이라고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음력 정월 초하룻날 세종 이하 문무백관이 경회루에 도열한 가운데 꾸란을 낭송한 기록이 자주 보인다. 

한반도에 온 무슬림들은 고유의 명절을 즐겼고, 중앙아시아 민속의상과 모자를 쓰고 위구르어를 사용했으며, 예궁이라 불리는 종교사원을 건립하고 이슬람교 예배의식인 대조회송축을 조정에서 행하기도 했다. 이렇게 지속되어 오던 종교적, 민족적 동질성은 세종 시절 조정 대신들이 임금에게 올린 건의에 의해 이슬람식 예배와 전통복장을 금지 당하게 된다. 다음은 세종 9년(1427) 4월 4일 실록의 기록이다. 

‘“회회교도는 의관이 보통과 달라 사람들이 모두 우리 백성이 아니라 하여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합니다. 이미 우리나라 사람인 바에야 마땅히 우리나라 의관을 입는다면 우리나라 사람과의 혼인도 자연스러워질 것입니다. 또 대조회 때 회회교도의 기도하는 의식도 폐지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이때부터 옷차림과 이슬람교도 특유의 종교의식을 금지시킴으로써 그들은 고유의 문화풍습을 버리고 조선에 동화되어야 했다. 1427년 칙령 이후 19세기 후반까지 무슬림들의 한반도에서의 활동을 알려주는 일체의 기록이 없다. 

이들이 다시 우리 역사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19세기 말이다. 1898년 만주에서 동청철도가 건설되면서 다수의 투르크인 엔지니어와 노동자, 상인들이 만주로 진출했다. 투르크 상인들은 러시아-몽골-만주-한국을 잇는 소규모 무역을 통해 자본을 축적했고, 이들 중 일부가 한반도 북쪽 지방에 정착했다. 

▲ 이태원 거리의 무슬림을 위한 서점과 여행사.

종로, 명동 양복점의 원조는 무슬림 

투르크인들은 전통적인 목축업 외에도 중국이나 몽골로부터 양모와 양가죽을 구입 가공하여 러시아 각지와 만주, 한국, 일본에 공급했다.

또 모스크바의 공장들로부터 각종 면제품과 모제품을 공급받아 중국 시장에 판매하면서 투르크인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1900년에는 동청철도주식회사로부터 부지를 분양받아 투르크인들이 몰려 사는 하얼빈의 프리스탄 지역에 모스크를 건립했는데, 이 무렵 하얼빈에만 250명의 투르크인이 거주했다고 한다. 

1909년 압둘라시드 이브라힘이 조선을 방문한 후 조선 사회상을 담은 <아시아여행 보고서>를 이스탄불에서 출간했다. 이브라힘은 이 보고서에서 한일합방 직전 일본의 침략 앞에 무력하게 국권을 빼앗겨가는 조선이 처한 암담한 현실을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희수 교수의 <이슬람>이란 책에 의하면 1차 세계대전 당시 동부전선에 파견됐던 투르크 군인들이 종전과 함께 만주나 한반도 지역으로 도주했다. 또 러시아 당국에 의해 시베리아 강제노역에 보내졌던 상당수의 투르크인들이 혼란을 틈타 탈출하여 만주와 한반도에 정착했다. 

1920년 경 소비에트 혁명 당국의 박해를 피해 만주로 이주한 600여 명의 터키인들 중 200여 명이 일본군의 보호 아래 한반도에 분산 정착했다. 이러한 터키인들이 주축이 되어 1920년대부터 한국전쟁까지 무슬림 공동체를 형성하고 서울, 부산, 대구, 인천, 목포, 대전, 평양, 신의주, 청진, 흥남 등에 집단촌을 형성했다. 

한반도의 투르크인들은 주로 의류 도소매업과 포목점, 양복점을 경영했다. 서울 종로와 소공동 일대에 번창했던 양복점은 러시아에서 넘어온 터키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이들은 오사카 도쿄 등지의 도매상에서 의류와 포목, 화장품, 시계, 가정용품, 독일산 수입품들을 들여다 한국과 만주에 판매하여 부를 축적했다. 

이들은 1928년 서울에 무슬림 터키협회를 구성하고 자체 학교와 문화회관 등을 소유했다. 또 서울시청 뒤편의 2층 건물을 매입하여 예배소와 학교 등을 운영했고, 서울 근교 홍제동에 이슬람 공원묘지를 조성했다. 무슬림들이 한국에 대대적으로 나타난 것은 6·25 전쟁 때 터키군의 참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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