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기 출격시켜 무조건 폭격하시오”
“전투기 출격시켜 무조건 폭격하시오”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6.04.27 10: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정희 탄생 100돌] 박정희 정신의 창조적 계승을 위하여(2)

박정희는 부자나 빈자, 권력자나 약자를 차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대했으며, 청와대 청소부나 목수들에게도 꼭 존칭 사용

혁명가들은 대부분 수천, 수만의 목숨을 명령 하나로 죽여 없애는 냉혈한으로 기억된다. 그렇다면 인간 박정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1973년 대학 교수를 지내던 박승규가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새로 임명되었을 때 박정희는 그에게 ‘대인춘풍(待人春風) 지기추상(持己秋霜)’ 즉 ‘사람(백성)을 모실 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하고, 자기의 몸가짐에는 추상처럼 엄격하게 하라’는 휘호를 써 줬다. 이것은 박정희 자신의 좌우명이었다.

회의 때 박정희가 앉은 탁자 위에는 메모지, 재떨이, 필기도구가 놓인다. 박정희는 그것들을 직선으로 다시 맞춘 다음 두 손을 무릎 위에 놓는다. 이것이 사회자에게 회의를 시작하라는 신호였다. 이처럼 그의 행동거지에는 늘 근엄함이 배어 있어 냉엄하다는 인상을 풍겼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박정희의 한쪽 면만을 본 것에 불과하다. 박정희는 자신이 퇴근하지 않으면 청와대 직원들이 퇴근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일단 2층으로 퇴근했다가 밤중에 다시 집무실로 내려와 밀린 서류 결재와 같은 일을 보는 때가 많았다.

자신의 감정을 절제할 줄 아는 인물

박정희는 청와대 1층 집무실에서 2층으로 퇴근하여 식사를 한 후 접견실에서 가족들과 함께 영화를 감상하곤 했는데, 어느 날 김두영 당시 대통령 제2부속실 행정관이 보니 상영된 영화는 ‘고구마 온상 재배법’, ‘밤나무 재배법’, ‘독도를 지키는 경찰관’ 등 문화영화가 전부였다. 

더욱 놀란 것은 박정희가 탁자 위에 메모지를 놓고 영화 내용을 열심히 메모하고 있었다. 다음날 대통령은 독도에서 근무하는 경찰관들에게 위로금과 선물을 보냈다.

지인들의 회고에 의하면 박정희는 매서운 성격이었으나 예의바르고 자상했으며 인정이 많은 인간유형이었다. 부자나 빈자, 권력자나 약자를 차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대했으며, 청와대 청소부나 목수들에게도 꼭 존칭을 썼다. 또 상대방이 어려워서 감히 말을 못 꺼내고 있는 것을 알아채고 고충을 해결해 줬다. 이렇게 도움을 받은 사람이 부지기수이며, 이들은 죽을 때까지 박정희의 은혜를 잊지 않고 긴밀한 인간관계가 형성되곤 했다.

그는 또 자신의 감정을 무섭게 절제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아침에 어느 장관에게 화를 내고 호되게 나무랐다가도, 다음 면담자를 맞을 때는 언제 그랬던가 할 정도로 평상심으로 돌아가 있었다.

김재규를 변호했던 한 변호사의 사연

1973년 봄에 충청도 시골에 사는 한 처녀가 육영수 여사 앞으로 편지를 보내왔다. 사연인즉 시골마을 산사(山寺)로 올라가는 길목에 조그만 가게를 차려놓고 장사를 하던 시골 처녀가 절에서 고시공부를 하면서 생활용품을 사러 가게를 자주 찾은 서울 총각과 서로 좋아하게 되어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청년이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에는 태도를 돌변하여 “위자료를 줄 테니 관계를 청산하자”고 한다는 요지였다.

육 여사는 이 편지를 박정희에게 전달했다. 박정희는 법무부 장관에게 조사를 시켰는데, 이 여자의 편지 내용대로였다. 박정희는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고 정의와 진실을 수호해야 할 법관으로는 자질 면에서 곤란하지 않겠는가”라는 의견과 함께 신직수 법무장관에게 처리를 맡겼다.

이 사람은 법관에 임용되지 못하고 변호사로 개업했는데, 10·26 사건 뒤 수십 명의 변호사들이 김재규 변호를 자원했을 때 초기 변호인 명단에 이 사람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저명한 서양학자 김성식 전 고려대 교수는 10·26 사태 5주년 동아일보 특집 ‘박정희 18년 역사는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박정희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박 대통령은 자기 지시에 거역되는 점에는 추상같으면서도 의리를 지켜야 하는 경우에는 굉장히 감동적인 면을 나타냈다. 어떤 문화인에게 훈장을 수여할 때는 자신도 그 문화인만큼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줄 정도로 대단히 겸손하고 겸허한 데가 있었다.”

▲ 박정희 대통령은 명절이 되면 선물을 전달할 대상자들을 골라 직접 봉투를 썼는데, 아들 지만 씨의 교장에게는 사적인 경우라는 이유로 대통령 직함을 쓰지 않고 '박정희'라고 이름만 써서 보냈다.

그는 자신의 권위에 정면 도전하지 않는 한 과거의 정적(政敵)들을 끝까지 돌봐줬다. 추석 등 명절이 되면 수첩을 꺼내놓고 선물이나 금일봉을 전달할 대상자들을 골라 직접 봉투를 썼다. 아들 지만 씨가 다닌 중앙고등학교 교장에게까지 인사를 했는데, 사적(私的)인 경우에는 대통령 직함을 쓰지 않고 ‘박정희’라는 이름만 썼다.

박정희는 지방에 갈 때는 옆에 앉은 가족에게 지나치는 마을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설명하곤 했다. 저 마을의 소득원은 무엇이고, 이 터널의 길이는 몇 미터라는 식으로 손바닥 들여다보듯 설명해주곤 했다.

둘째 영애 박근영 씨에 의하면 한번은 휴가 때 아버지 승용차에 동승해서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는데 도중에 근영 씨가 녹음기로 듣고 있던 음악을 잠시 끄라고 하더니 아버지께서 눈을 감고 경건하게 묵념을 했다. 경부고속도로 공사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기술자들을 추념해 세운 위령탑 앞을 지나면서 박정희는 차 안에서도 그들의 명복을 비는 묵념을 했던 것이다.

“전투기 출격시켜 무조건 폭격하시오”

박정희 대통령 내외는 1974년 6월 현대조선소에서 23만 톤짜리 유조선 아틀란틱 배런호의 진수식에 참석하기 위해 울산의 현대조선소 영빈관에 내려가 있었다. 행사 당일 아침 국방장관으로부터 긴급 보고가 들어왔다. 동해상에서 소형 경찰 경비정이 북한군에 의해 북쪽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장관에게 “뭐하는 거요? 강릉에 있는 전투기를 출격시켜 무조건 폭격한 뒤 우리 배를 끌고 오시오”라고 지시했다. 잔화기를 들고 있는 박 대통령의 손이 분함을 참지 못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박정희는 전화를 끊고는 비서진에게 “더 이상 전화 받지 마! 지시를 여러 번 하면 혼선이 생겨”라고 했다.

공군 전투기들이 출격했으나 짙은 안개 때문에 목표물을 찾지는 못했다. 그러나 북한의 우리 경비정 납치는 성공하지 못하고 북으로 쫓겨 갔다(김두영 지음, <가까이에서 본 인간 박정희, 인간 육영수>).

인터넷에서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박정희 대통령의 노래를 들으실수 있습니다.
http://youtu.be/XsLAvRqwDOk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