朱子를 극단적 추앙한 송시열
朱子를 극단적 추앙한 송시열
  • 이주천 원광대 교수·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7.02.16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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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에 매몰된 송시열의 주자학, 실리를 적대

특집 / 친중사대의 기원

즉위 10년 만에 북벌의 이상을 추구했던 효종이 급사함에 따라 군주의 무모함에 가슴 졸이던 서인 집권층은 잠시 안도의 숨을 쉬었다. 묘호(廟號)는 남송의 효종이 북벌론을 거론한 고사를 언급한 송시열의 권고를 받아들여 ‘효종’으로 정해졌다.

북벌론은 효종의 서거로 무력화되었지만, 병자호란에서 당한 치욕을 청산하려는 복수설치(復讐雪恥)의 구호가 완전히 청산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청(反淸) 의식은 사회 전반에 광범하게 유포되었다. 이렇게 해서 조선은 무려 150∼200년 동안 동양의 최강대국 청국과의 교류를 끊고 자청해서 ‘문화적 쇄국주의의 길’로 나아갔다.

더욱이 임진왜란으로 ‘하늘을 맞대고 같이 살 수가 없는’ 일본과의 교류가 단절된 상태에서 조선의 고립은 더 심화되었고, 자연히 중국이나 일본 측으로부터 서방국가들의 동양에 대한 진출에 대한 정보 수집도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런 배타적 대청외교 및 고립주의는 후일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위정척사의 기원이 되는 것이다.

▲ 송영길 의원을 비롯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2박3일간 중국을 방문해 사드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1월 4일 김포공항을 통해 출국하고 있다. 왼쪽으로부터 정재호, 송영길, 유은혜, 신동은, 박찬대 의원. / 연합

성리학적 대의명분론이 사회적 분위기와 조정 공론에서 우위를 점거하는 상태에서 문호를 개방하고 창피하지만 자세를 낮춰 강대국 청의 문물을 배워서 부국강병을 이룩하자는 국익 차원의 현실주의는 당연히 ‘소귀에 경 읽기’였다.

“멸망한 명이지만 의리로 섬기자”

조선이 지극정성으로 섬겼던 명은 1644년 멸망했고, 남중국에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던 남명정권도 1662년 붕괴되면서 충성하고 섬겨야 할 주군(명)을 상실했다. 그러나 조선 사대부의 심정은 사랑하는 남편이 죽었지만 남편의 사랑의 잊지 못해 오랑캐인 야만족 새신랑(청)에게 강제로 재가(再嫁)를 한 상태이지만 고인이 된 남편(명)을 수십 년 동안 잊지 못하는 심정 바로 그것이었다.

육체를 유린당했지만, 마음만은 명나라를 그리워하고 신종황제에 충성하는 제례를 해마다 거행했다. 조선은 청에 순순히 신복(信服,마음으로 복종함)함을 거절하고 마음의 문을 걸어 잠갔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조선이 오랑캐이며 패권국가인 청을 섬겨야 할 대의명분이 없었고 또 하나는 ‘문화강국’에 대한 자부심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문화강국이란, 성리학적 기준에서 조선이야말로 공자, 맹자, 그리고 주자가 교화시키려고 했던 인의도덕과 예의범절을 제대로 실천하는 모범 사회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조선의 사림 사대부들은 조선이 성리학적 학문적 성과와 그 실천적 차원에서 청보다 비교우위에 있다는 강한 자부심을 가졌다.

그렇다면 16세기 이후의 성리학이 예전의 조선 초기의 훈구파가 연구한 성리학과 다른 특징은 무엇인가? 네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로, 훈구파가 체득한 성리학은 조선 건국 초기에는 형세와 (국가) 이해에 따라 융통성 있게 해석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근본주의(fundamentalism) 성향을 띠게 된다. 건국 초기에는 사대는 조선의 국제적 형세의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한 불가피한 궁여지책에서 천명되었다. 예를 들어, 요동정벌을 주장한 정도전의 경우 맹목적으로 조선의 사대부들이 중국 명나라에 충성하자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개국공신들이 사라진 이후, 조선 중기에 오면서 점차 성리학자들은 사대를 형세나 이해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군신의 의리’라는 맥락에서 이해하였다. 소국이 대국을 섬기기로 했으면, 이미 군신의 관계가 맺어진 것이라고 보고, 정성을 다해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신하의 군신에 대한 의리는 이해나 형세에 따라 좌우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지성으로 섬김만이 허용되는데, 조선은 이런 자세로 명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학자가 이이 이율곡이다. 이율곡은 고구려, 백제, 신라 등 3국이나 고려가 중국을 섬겼던 것은 형세나 이해에 따른 것이요 그들이 갖춘 사대의 예는 겉치장에 불과했다고 비판하고, 조선은 이와 달리 명나라에 심복하여 정성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하기야 임란에서 지원병을 내준 명나라가 생존해 있을 때라면 어느 정도 이해는 가지만, 망한 명나라의 무엇을 붙잡고 충성을 맹세할 것인가?

송시열 역시 명과 조선을 ‘군신의 관계’로 규정하고, 조선과 명 상호간의 ‘의(義)와 은(恩)’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당시 중원을 석권한 강대국은 명이 아니라 청이었다. 조선은 어떻게 청을 대할 것인가? 송시열의 기본 입장은 “소국이 대국을 섬기는 것은 천리이나, 치욕을 참고 원수를 섬기는 것은 인욕(人慾)이다”고 했다.

조선에게 청은 대국인 동시에 원수의 나라였다. 그리하여 송시열은 ‘표면적으로는 청을 섬기지만, 속으로는 ’복수설치‘를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을 끝까지 견지하였다.

송시열은 효종과의 독대에서도 북벌의 성공을 확신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것은 의리를 지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이 굴욕스러운 생존보다는 낫다는 신념의 표출이었다. 이미 명에 대한 사대를 강조한 것은 의리의 표출이었고, 바야흐로 강성한 청에 대한 사대를 거부한 것도 의리의 표출이었다.

두 번째 특징은 모화(慕華)에 있어서 화(華)의 핵심을 예의(禮義)로 본 것에서 훈구파보다 더 집착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 모화란 ‘이민족이 중화의 예의문물을 사모하여, 그것을 수용함으로써 자기 민족의 문화를 발전시킴’으로 정의된다. 즉 종족이나 지리 여하를 막론하고 인륜문명을 건설하면 중화인 것이고, 인륜을 무시하고 ‘힘의 논리’에 입각하면 야만인 것이다. 사림파들은 이런 논리에 훈구파보다 더 고지식하게 충실했다.

모화라면 먼저 연상되는 것이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는 독립문의 전신인 ‘모화관’이다. 이 모화관은 조선시대 명의 사신을 영접하는 곳으로, 명 사신이 조칙을 가지고 오면 책봉을 받을 새 임금이 친히 모화관까지 나오는 것이 상례였다. 모화관 앞에는 영조문(迎詔門)을 세웠는데, 명 사신의 항의 및 이의 제기에 의해 다시 영은문(迎恩門)으로 명칭을 바꿨다.

1896년 독립협회가 조직된 후, 모화관은 사대사상의 상징이었다고 하여 독립관(獨立館)이라 고쳤고,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다. 당시 모화관을 다시 수축한 것을 계기로 최부는 <모화관기(慕華館記)>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명이 예악문물(禮樂文物)과 전장법도(典章法度)의 본산(本山)이면, 이 나라는(조선) 질서가 있고 예교(禮敎)가 빛나서, 중화의 사람들조차 우리를 ‘소중화(小中華)’라고 지칭함을 자랑해야 하고 ‘소중화’(조선)가 ‘대중화’(명)를 흠모하는 것은 당연하며, 군주께서 대중화를 흠모하는 마음이 이와 같으니, 신하들은 윗사람을 본받아 충을, 자식 된 자들은 윗사람을 본받아 효를 다해야 할 것이다.”

세 번째 특징은 16세기 사림이 등장한 이후 향촌사회와 개인의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가례(家禮)의 철저한 실천을 주장하여 시행된 점이다. 이것은 지방에서 사림의 정치적 영향력의 강화로 귀결되었다. 4대 사화(士禍)의 피해에도 불구하고 사림세력이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은 중요한 이유이다.

조선 전기에서는 공사의 양면에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와 <주자가례(朱子家禮)>가 지침서로 제시되었으나, 가례의 실천은 조정 고위대신과 경기 일대의 사대부의 일부에 국한되었다.

네 번째 특징은 ‘대일통(大一統)’사상에 입각하여 한편으로는 조선과 명은 일체임을 강조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조선의 위상을 명의 신하격으로 규정하였다는 점이다. 일찍이 공자는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다”고 <예기>와 <맹자>에서 언급하여 대일통의 당위성을 설파하는 상징적 표현을 한 바 있다.

송시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자는 <춘추>를 지어 천하 후세에 ‘대일통’의 의리를 밝히심에, 무릇 혈기가 있는 무리는 모두 마땅히 ‘중국을 높이고 이적(夷狄)을 미워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 오직 우리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와 우리 태조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는 같은 때에 창업하고 곧 군신의 의를 맺었으니, (소국을) 사랑하는 은혜와 (대국에) 충성하는 절개가 거의 300년간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송시열은 조선중화주의의 주창자로 자리매김이 된다. 송시열은 화양동(華陽洞)으로 이사를 간 이후 항상 중화의 의관인 나삼(羅衫)과 평정건(平頂巾)을 착용했으며, ‘용하변이(用夏變夷)’라는 맥락에서 “부인(婦人)은 정례(穽禮)를 하고, 동자(童子)는 쌍상투를 함으로써 중화의 제도를 따르라”고 권한 바 있다.

말하자면 송시열은 국적은 조선인이지만, 정신적-사상적 차원에서는 중국인보다 더 중국적인 사대부라고 간주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송시열의 조선중화주의는 ‘조선의 중화화’에 해당되는 것으로 이는 말 그대로 중국(명)에의 동화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송시열의 맹렬 중화주의

송시열의 조선중화주의는 명의 멸망을 계기로 본격화되었지만, 명의 멸망 이전에도 ‘조선이 명보다 더 순정(純正)한 중화’라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명에서 주자학 이외에 양명학이 인기를 끌고 있는 점을 개탄하면서 조선이 의연하게 주자학을 수용하여 모범을 보인 상황을 ‘주례(周禮)가 노(魯)나라에 남아 있는 형국’으로 비유한 것이 그것이다.

송시열은 주자 중심의 학문 체계를 탈피하거나 독자적인 해석에 대한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가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언급한 ‘사문난적론(斯文亂賊論)’ 역시 주자학을 과도하게 근본주의적 입장에서 파악하였기에 유교의 예의(인륜)를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면서도 주자와 다르게 경전을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봉쇄한 것이다.

송시열은 ‘모든 경전 해석은 반드시 주자의 해석을 따라야 한다’고 사대부들에게 지침을 내렸으니, 이는 주자학을 정통으로 규정한 것이고 이외에 다른 영역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주자 절대화(絶對化)’로서 주자학을 무오류, 무결점 및 신성불가침으로 성역화한 것이다.

이에 반해, 남인의 거두이며 송시열의 지인이었지만 후일 그의 정적이 된 윤휴는 주자의 학설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태도를 배격하고 오히려 주자와 대등한 입장에서 독자적으로 경전을 해석하는 방향으로 나가면서 파란을 일으켰다. 윤휴는 자기가 새로 주석하여 가르친다 하고, 주희의 학설이라도 틀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 혼자만 안단 말인가?  공자라 할지라도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 공자도 잘못된 것이 있다”라고 큰소리를 쳤다.

이에 경악한 송시열은 윤휴에게 선현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송시열은 “주자가 논한 바는 그 이후 지금까지 한 가지 이치라도 분명하지 않은 것이 없고, 한 글자라도 흐린 것이 없다”고 하여 마음대로 주자의 주석을 버리거나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 말 것을 경고했다.

성리학의 근본주의 성향과 주자의 절대화 경향으로 인해 예학이 발전하고 예론이 강화되었으며, 이것은 조정에서 예송(禮訟) 또는 예송논쟁(禮訟論爭)으로 나타났다. 그 결과 시간이 갈수록 치열한 정쟁과 상대방 붕당 출신에 대한 가혹한 정치 보복이란 부작용이 초래되었다.

조정의 정치판은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 하는’ 살벌한 형국이 된 것이다. 예송은 예절에 관한 논란으로, 효종과 효종비 인선왕후에 대한 계모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기간을 둘러싸고 현종, 숙종대에 발생한 서인과 남인간의 논쟁이다.

형식적으로는 어느 붕당이 성리학적 예법의 의거한 정통노선인가를 저울질하는 논전이었지만, 실제적으로는 그것을 구실로 삼아 정적을 제거하려는 정치투쟁적 성격을 띠었다. 1차 예송 논쟁(1659년)에서 승리한 송시열은 자신을 사형에 처하라는 남인의 공격에 분노하면서 그의 정치 스타일은 타협을 불허하는 노선으로 경직되었다. 결국 그는 2차 예송(1674년)에서 패하여 사약을 받았다(1689년). 그의 나이 83세였다.

의리, 절개, 충절의 대명사 송시열! 그는 문묘(文廟) 8인에 입적한 성현의 반열에 올랐지만 그 만큼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도 많지 않다. 유학자 황유는 송시열계의 대명의리를 다음과 같이 비난했다. “자기 자신을 위해 (북벌론을) 도모하여 안으로는 자강의 실질이 없고, 밖으로는 고상한 이름을 기탁하여 단지 아름다운 이름을 자기에게 취할 뿐이다.

국가에 화를 끼치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니 어찌 국왕을 존중한다고 하겠으며, 의리를 밝히는 데 있다고 하겠는가? 오직 ‘명(名)’ 한 자로서 세상의 권력을 농락하고 있다.” 즉 송시열계의 대명의리는 허구이고 오직 정권 장악에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념이 다르면 斯文亂賊으로 몰아

이런 근본주의적, 원리주의적 성향에 말년에는 권력 의지가 겹쳐져 많은 정적을 만들었다. 평생 동안 군왕의 면전에서 서슴없이 체면을 가리지 않고 직언을 쏟아낸 인물이다. 군주는 군주다워야 하는데, 성리학적 가르침에 철저하게 순응하여 왕도정치를 하는 군주가 참다운 군주이며, 이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섬길 수 없는 것이다. 그가 군주를 보필하는 최우선 가치기준은 루이 13세를 보필했던 추기경 리슐리에의 ‘국가이성’(reason of state)이나 국익(National interest)도 아니었으며 오로지 성리학적 가치가 절대기준이었다.

그러기에 숙종은 귀찮게 구는 송시열이 미워 남인을 기용했다고 전한다. 송시열의 인간적 장점은 그는 자신을 찾아오는 이에게는 누구에게나 깍듯이 대하였고, 사람을 만날 때는 누구에게나 열린 자세로 대하였다. 신분에 구애됨 없이 누구에게나 편견 없고, 사심 없이 대하였다. 그러나 단점으로는 성리학이나 주자, 공자와 맹자를 비판하거나 유교사상을 부정하는 자는 원수로 여기고 거침없이 공격하고 규탄한 점이 치명적 결함이었다.

정계만이 아니라 학계에서도 성리학적 교리와 원리원칙에 충실했던 송시열의 제자들이 판을 치는 바람에 성리학의 교조화 및 성역화가 이뤄져 주자의 해석이 독점됐으며 다른 시각의 해석을 가하는 경우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갔다.

사문난적이란 성리학 또는 유교 이념에 반대하는 사람 또는 사상을 비난, 공격하는 데 전가의 보도로 사용된 용어였다. 사문(斯文)은 유학(儒學)을 가리킨다. 고려 말에 사문난적이라는 용어가 등장했으며 성리학이 국시가 되면서 반역자에 준하는 역적 취급을 받았다.

성리학이 교조화·성역화된 조선시대 중후반기에 이르러서는 상대방 붕당의 당인들을 정치적으로 매장시키려는 용어로 활용되었다. 정쟁이 가열되면서 정치판은 강퍅해지고 유머는 사라졌으며 정치 보복의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윤선도, 윤휴, 허목, 윤증, 박세당 등이 사문난적으로 몰려 곤욕을 당했다.

중세 유럽에서 가톨릭 교회에서 정통교리가 아니면 이단으로 몰려 목숨을 잃은 경우와 유사한 일이 중세 조선의 조정에서 다반사로 벌어졌다. 과연 조선은 도대체 언제까지나 역사의 무대로 사라진 명을 흠모하면서 의리를 지킬 것인가? 북벌이 물거품이 된 상황에서 조선이 희구한 성리학적 이상국가의 모델은 어떻게 달성하려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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