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욕의 한중관계 정묘·병자 호란 포로 송환에 얽힌 애환
치욕의 한중관계 정묘·병자 호란 포로 송환에 얽힌 애환
  •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교수·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7.03.27 12:15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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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졸한 중국의 사드 보복

사드 배치를 둘러싸고 한국에 대한 중국의 불합리한 태도는 급기야 중국에 진출한 롯데그룹에 대한 상식 이하의 보복조치로 노골화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 일당독재체제의 중국이란 나라의 정체와 본질에 대해 국민적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있으며 더 나아가 한중관계에 심각한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하기야 ‘원래 중국은 그런 나라’였다.

조금만 세밀하게 한중관계의 역사를 관찰해 본다면 한국사가 중국 대륙 주변에 위치한 지정학적 이유로 인해 중국의 일방적인 침략과 횡포로 인한 고난의 역사임을 기억할 것이다. 실제로 전한의 한무제(漢武帝)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漢四郡, BC.108-314)을 설치한 이후부터 한국의 역사는 중국 대륙으로부터 자주독립을 얻기 위한 힘겨운 투쟁의 역사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중국으로부터 문화적으로 한자와 불교, 성리학을 수입했으며, 정치적으로 당이 신라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켜서 한반도 통일에 일조를 했고, 군사적으로 임진왜란 시절 조선의 요청으로 명군이 오면서 나라를 구했기에(再造之恩) 한국 지배층은 중국에 대한 부채의식을 극복하지 못했다. 16세기 이후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중국에 대한 패권 도전은 한국의 대중(對中) 의존도를 급상승시켰고, 중국에 대한 오래 묵은 역사적 원한은 희석되고, 친중사대주의가 판을 치는 중화의식으로 변환되었다.

북한의 경우, 6·25 침공 때 유엔군의 참전·반격으로 나라가 멸망할 뻔한 위기에서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를 만회했다. 그러기에 김일성은 백두산 북쪽을 모택동에게 갖다 바치면서 친중사대를 했는 바, 이는 제2의 현대판 재조지은으로까지 해석될 수가 있다.

역사도 외면한 조선인 포로 수난

한중관계에서 중국의 횡포와 만행이 가장 두드러졌던 참혹한 기록은 정묘·병자 호란기에 벌어진 조선인 포로 송환에 얽힌 역사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가 정신대·위안부사건으로 도배되는 ‘반일’ 무드 속에서 검인정이든 국정이든 관계없이 역사 교과서에서 누락되고 대중의 뇌리에서 까마득히 잊혀졌다.

▲ 청나라로 끌려가는 조선 포로들. 영화 "최종병기 활'의 한 장면

임진왜란이 종식된 지 약 30년이 지난 후 발발한 정묘호란(1627)은 50여일 만에  조선군을 완전히 굴복시켰다. 이때 잡은 포로들이 약 5만∼10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다음해 후금은 어찌된 영문인지 5만여 명을 조선에 돌려줬다. 그때까지만 해도 후금은 후일 병자호란 시절에서처럼 조선인 포로에 대한 경제적 가치를 덜 느끼고 있었다. 또 후금은 명의 경제적 봉쇄로 인해 조선인 포로의 식량을 감당하기 어려웠으며, 오히려 포로의 송환 대가로 평안도 지방에 대한 병력 주둔과 식량 지원을 받아내려 했다. 심양으로 데리고 간 포로들은 조선 정부와 몸값을 흥정했는데, 점차 가격이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조선 사신들은 심양에 유숙 중에 매일 포로들이 모여 통곡하는 정황을 차마 볼 수가 없어 인삼 2근으로 2인을 속환한 경우도 있었다. 포로 중에는 친족이 존재하고 환가(還價: 귀국을 위한 몸값)의 준비가 가능한 경우에는 속환(贖還: 몸값을 주고 귀국)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연고 포로이거나 속가(贖價: 귀국을 위한 몸값) 준비가 불가능한 경우 그들의 통곡하는 참상은 극에 달했다. 패자의 비극은 승자에게 기쁨과 신분상승의 기회를 안겨줬다. 정묘호란에 출병한 장수들 중에서 조선인 포로를 많이 잡아온 무장들은 포로를 되팔게 되면서 한밑천 톡톡히 장만하게 되어 심양에서 갑부로 행세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병자호란 때 조선인 포로는 재산

10년 뒤에 발발한 병자호란 시에 청국은 전후 처리를 통해 조선인 포로들에 대한 경제적 가치를 더 중시했기에 전투에 주력하기 보다는 대대적인 포로 사냥에 골몰했다. 그리하여 청군은 조선의 저항 능력이 없는 비전투원 특히 부녀자의 포로 획득에 혈안이 된 것이다. 이는 중세판 인신매매행위를 연상하는 것이다. 청군은 빈궁한 백성보다는 거액의 속가를 받을 수 있는 양반 사대부 집안을 주로 표적 삼았다.

가장 비극적 풍경은 1637년 1월 22일, 강화도가 무너지면서 시작된 참극이다. 오랑캐에게 치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자결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청군의 능욕을 피하려는 여인들의 투신도 잇따랐다. 여인들의 몸을 삼킨 바다 위에는 형형색색의 머릿수건들이 낙엽처럼 떠다녔다.

심양으로 끌려간 포로들은 추위에 떨거나 얼어 죽었다. 같은 해 4월 강화도 등지에서 붙잡힌 조선 여인들이 심양에 도착했다. 그 중 많은 수가 청군 장수의 첩이 되었다. 조선에 갔던 남편이 첩을 데리고 오자 만주족 본처들은 질투심에 몸을 떨었다. 조선 여인의 얼굴에 끓는 물을 퍼붓거나 혹독한 고문을 서슴지 않는 악독한 본처도 있었다. 그 소식을 접한 청국 홍타이지조차 격분했다. 그는 신료들을 불러서 “야만적인 방식으로 투기를 일삼는 여인들이 있을 경우, 남편이 죽었을 때 순사(殉死)시키겠다”고 투기를 근절하라고 경고했다.

청군에 잡힌 포로의 숫자는 얼마인가? 나만갑(羅萬甲)의 병자록(丙子錄)에는 10만 명 이상으로 추론하고 있고, 당시 전후 처리 핵심 인물이었던 최명길의 대명(對明) 보고문에 의하면, 무려 50만 명에 달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산 정약용의 비어고(備禦考)에서는 “청나라로 간 사람은 60만 명이 넘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오랑캐의 포로가 된 자가 반이 넘고 각 진영 안에는 여자들이 무수했다. 이들이 발버둥치며 울부짖으니 청나라군이 채찍으로 휘두르며 몰아갔다.”(연려실기술). 그 당시 조선 인구가 약 500만 명을 웃돌고 있었으니, 인구의 1/10이 없어진 것이다. 포로의 절반이 부녀자였다고 한다. 조선은 경제력에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자명하다.

조선 정부가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강화도에서 납치된 왕족을 포함한 대신(大臣) 가족들의 송환 업무였다. 청국은 1600여 명의 강화도 포로에 대해서는 송환가와 관계없이 돌려줬다. 그러나 본격적인 송환 협상은 청군이 심양으로 철군한 뒤에 행해졌다.

송환 협상은 10년으로 한하고 이 기간이 경과되면 자동적으로 청 국민으로 귀속된다는 결정을 했다. 이 기간은 대일본과의 전후 40여 년과 비교해 볼 때 단기간이었다. 청국은 속환가의 미지불로 인한 미송환 포로에 대해서는 청 국민으로 편입시켜 자국의 노동력 충당에 활용했던 것이다.

조선 정부에게 부닥친 첫 번째 문제는 합리적 속환가였다. 양국 간 교섭이 진행됨에 따라 포로 송환가는 천정부지로 올라갔다. 일반 백성의 경우, 1인당 은 25∼30냥으로 종전 제시한 가격의 5-10배나 증가되었고, 실제 속환가는 이보다 높아서 1인당 은 100∼250냥에 이르렀다. 양국 간 공식 합의가 효력을 상실한 이유는 사적 외교가 횡행하면서 일부 부유층 인사 가운데서 자신들 가족의 조속한 송환을 위해 비공식 루트를 통하다 보니 속가가 날로 폭등하고 말았다. 고위 관직의 아들 속환가가 600냥으로 치솟고 급기야 1500냥으로까지 달하면서 이러한 고가의 속환가는 조정에서조차 큰 물의를 빚었고, 이로 인해 고액을 지불한 관료는 파직과 도성 밖으로 방출되는 처벌까지 받는 경우도 있었다.

속가의 폭등으로 조선 정부의 재정 부담이 증대되었고, 일반 백성들 중에서는 가족 속가 준비로 인해 파산하는 가정이 속출하기도 했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지불되는 속가와 매년 지불되는 공적 화폐의 부담은 조선 사회의 경제적 형편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포로 송환으로 빚더미, 돌아와도 멸시

정묘호란 이후 조선 정부에 닥친 두 번째 문제는 포로 도망자에 대한 청의 쇄환(刷還) 요구를 어떻게 수용하는가였다. 처음에 조선 정부는 양국 간 우호관계를 이유로 이를 거절했으나, 후금 측의 도망자 송환 요구는 더 강경해졌다. 인조는 쇄송 불가론을 천명했지만, 조정 대신들의 의견은 병화를 막기 위해서는 쇄송 불가피론이 대세였다. 병자호란기에는 도망자 송환 문제는 더 심각한 현안 문제로 떠올랐다.

당시 조선에는 전란을 피해 청국으로부터 도망해온 한인(漢人)과 청국인이 포함되었고, 심지어 전란 이전에 조선에 귀화한 여진인 즉 향화인(向化人)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청국은 이들의 압송을 조선에게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유는 청 국민에 대한 도망 방지책이었다. 청국으로서는 조선의 대외관계에 대한 엄격한 간섭과 통제를 통해서 조선의 반청운동을 사전에 제어하려는 일종의 안전 보장책이기도 했다. 즉 ‘조선 길들이기’의 일환인 것이다.

조선 정부는 초기에는 도망자들에게 온정을 베풀었지만, 청국의 강경한 요구와 나아가 조선에 대한 무력 침공 재개를 위협하자 이에 굴복하고 말았다. 더구나 청국은 도망 포로의 숫자보다 언제나 많은 숫자를 요구했다. 조선 측은 이러한 청국의 무리한 요구에 반박 내지는 변명보다는 충실하게 그들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으려는 데 급급했다.

조선 서북 변방지대 백성들은 포로가 아니었는데 숫자를 채우기 위해 포로가 되어 압송되는 참담한 현상까지 벌어지고 만다. 청국은 성명과 거주지를 기록한 690명의 향화인의 송환을 요구했으며, 결국 조선은 1차적으로 58명의 인원을 찾아서 보냈고, 추가 조치를 취했다.

세 번째는 송환된 부인(婦人) 들의 처리 문제였다. 이를 둘러싼 갈등과 대립은 유교국가를 지상 목표로 삼았던 조선에 사회윤리적 차원에서 커다란 상처를 안겨줬다. 즉 속환녀(贖還女)로 호칭된 이들은 양반 사대부 가문의 부녀자로 청군에 끌려갔다가 정절을 상실하고 귀환한 무리로 여겼다.

당대 유교적 윤리관으로서는 이들을 가문에 다시 들여보낼 수는 없었다. 정절을 상실한 부녀자의 가문은 자손 대대로 과거에 응시하거나 관직에 등용될 수 없었기에 각 가문에서는 실절(失節)한 부녀자의 용납을 기피 내지는 거부한 것으로 이는 큰 사회적 문제로 불거졌다.

속환녀들이 귀국하자 사대부들은 실절한 아내와의 이혼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렸고, 조선 정부는 유교적 명분과 인도적 차원의 사이에서 곤경에 빠졌다. 정부 대신들 간에 이혼을 주장하는 이이론자(離異論者)와 재결합을 주장하는 복합론자(復合論者)로 대립했는데, 국왕과 일부 대신들만이 이혼에 반대했지만, 이혼론은 사회 전반의 추세였다.

대부분의 사대부 자제들은 모두 다시 장가를 들고, 다시 합하는 자가 없었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으니 ...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기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라고 하여 충신론과 열녀론 및 정조론을 동등한 차원에서 내세웠다. 사실상 청군에 잡혀간 것 자체가 ‘허물’로 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었다.

이는 당대 성리학적 세계관에 기초한 명분의 반영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포로가 되기 전에 자살을 했어야 한다는 말인가? 정묘·병자 양 호란의 비극은 인조와 조선 사대부들의 정치적 군사적 무능과 무지에 그 무한책임을 물어야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부녀자들이 당한 고통과 인권 유린은 누구도 보상해주지 못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대부 가문의 속환녀는 그 가문으로부터 축출 당하는 비운으로 인해 자결하는 사태가 속출했다.

힘들게 조선으로 돌아온 여성들은 환향녀(還鄕女,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라고도 불렸는데, 이 때부터 행실이나 몸가짐이 바르지 못한 여성을 빗대어서 사용하는 용어로 변질되었고, 후일 발음이 변형되어서 화냥년으로 되었다고 전해진다. 또 그 환향녀가 낳은 아들을 오랑캐 자식, 호로자식(버릇없고 막 되먹은 아이)이라 칭하여 멸시하여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어쨌든 이 문제는 병자호란이 종결된 지 30년 즉 제2세대가 경과할 때까지 조야에서 주요 논쟁거리였을 뿐만 아니라 국론분열을 심화시켰다.
 
포로는 조선 정부도 버린 난민

시간이 흐르면서 포로의 속환 문제는 정부 차원이 아니라 ‘개인의 문제’로 전환되는 추세를 보인다. 그런데 피로인이 된 지 수십 년이 경과한 뒤, 현종대 28년 만에 도망쳐 온 안추원과 숙종대 37년 만에 도망쳐 온 안단의 사례를 보면 피로인의 비극적 삶이 얼마나 고단했던가를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안단은 입국 자체를 거부당하여, 울부짖으면서 청으로 다시 끌려갔고, 안추원은 귀향했지만 생계 대책이 막막하여 다시 좌절하고 말았다. 이렇게 백상의 참상을 ‘나 몰라라’하는 군주와 사대부 지배층 밑에 각자 도생하는 백성들의 고통은 장기간 지속되었는데, 과연 우리 역사 교과서마저 한중관계의 실상과 그들의 고통스런 기록을 정녕 외면해서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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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림 2017-03-28 12:25:37
아! 오늘날 중국사대에 빠진 이들이 얼마나 많은 가? 대통령되겠다 하는 자들 가운데서도. 일본보다 더 잔학하고 오랜 기간 한반도를 유린한 그들을 일본보다 더 미워하고 있는 치매병 환자들이 오늘 우리들이란 말인가?
역사를 알지 못하는 백성이 존속하고 흥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큰일이다.

백요셉 2017-03-28 10:02:17
#코리어#님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지적해주신 부분 수정 보완하도록 하겠습니다.

코리어 2017-03-27 18:04:43
왼쪽 세로로 된 구글 광고가 기사를 가려 읽기 힘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