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 일본인은 나쁜 놈과 더 나쁜 놈의 경쟁
영화속 일본인은 나쁜 놈과 더 나쁜 놈의 경쟁
  • 조희문 영화평론가·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7.08.22 13: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낭만과 로맨스가 넘치는 공간으로 보는 경향도

[영화]

▲ 영화 <모던보이>의 홍보스틸

일제시대 배경의 한국영화 속에 등장하는 일본인은 둘 중 하나다. 나쁜 놈과 더 나쁜 놈이다. 드물게 다른 구성을 보인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그 흐름을 따른다.

일본을 적대하는 영화는 <자유만세>(1946)가 처음일 듯하다. 일본의 압제에 저항하며, 나라의 독립을 되찾으려는 독립운동 투사들의 활약을 조명한다. 당시 영화들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독립운동의 내면에 집중하지는 않는다. 이야기(스토리)가 중심을 이룰 뿐 저항하는 독립투사, 흉악한 일본군의 대결 구도를 양식화 한다.

일제시대에는 영화를 통해 항일 의지를 드러낸다는 것은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일이었다. 영화가 미치는 사회적 영향력에 일찍이 주목한 일제는 홍보, 선전에 열을 올리는 만큼 불온한 사상이나 주장을 통제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일제시대에 제작된 영화라야 모두 합쳐 160여 편 정도였지만, 그나마 철저한 검열을 통과한 후에야 상영할 수 있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는 검열 통제를 넘어 조선총독부가 영화 제작을 사실상 대신하는 극단적인 선전 단계로 접어든다.

일제는 옳고 그름을 떠나 저항할 수 없는 절대권력 그 자체였다. 해방은 그 상황을 획기적으로 바꿨다. 마음 놓고 비난할 수 있는 공적(公敵)이 된 것이다. <자유만세>는 독립운동가들의 영웅적인 행동을 그리는 것이기도 했지만, 일본을 적대한 첫 번째 영화이기도 했다.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는 일본군이 얼마나 잔혹한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영화가 아닌가 싶다. 조선인 학도병으로 태평양전쟁에 끌려간 아로운은 적이 아니라 동료들로부터 참혹한 차별을 당한다. 영화 속에 비치는 일본군은 온갖 방법으로 그를 괴롭힌다.

이후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삼은 영화가 여러 편 나왔지만 일본인이나 일본군을 잔혹하고 야비한 존재로 묘사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었고, 그런 탓에 일본은 악, 조선(인)은 선 이라는 이분법이 기준처럼 통했다.

그런 중에서 일본인을 감정과 논리를 가진 인간적 존재로 그린 경우도 더러 있기는 하다. <이조잔영>(1967)이나 <족보>(1978), <문>(1977) <마이웨이>(2011) 같은 영화에서는 일본인 캐릭터가 영화를 이끈다.

 

일본인도 사람이다

<이조잔영>에서는 어느 여학교의 일본인 미술교사가 쫓기는 독립군을 숨겨주는 대목이 등장한다. 그 인연으로 궁중 무용을 전수받은 미모의 기생을 소개받게 되고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 여자의 부모는 일본 경찰에게 목숨을 잃은 사연이 있어 일본인을 증오한다. 젊은 미술교사는 현실 앞에서 고민한다. <족보>에서는 창씨개명을 확대하라는 임무를 맡은 조선총독부 직원의 고민을 묘사한다.

총독부 총력1과에 근무하는 다니(하명중)는 조선의 양반 가문들이 자신의 성씨를 얼마나 소중하게 지키려는지 알고는 고민에 빠진다. 조선인들의 전통과 문화를 지켜주고 싶지만, 상부의 독촉과 압박은 갈수록 심해진다.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집안의 청년들은 징병으로 몰린다.

<마이웨이>는 최근 영화 중에서, 드물게 일본인과의 교감을 다룬 경우다. 1938년 경성. 제2의 손기정을 꿈꾸는 조선 청년 준식(장동건)과 일본 최고의 마라톤 대표선수 타츠오(오다기리 조). 어린 시절부터 서로에게 강한 경쟁 의식을 가진 두 청년은 각각 조선과 일본을 대표하는 세기의 라이벌로 성장하지만 긴박한 시국은 그들을 전쟁터로 내몬다.

중국과 소련, 독일을 거쳐 프랑스의 노르망디 전장까지 이어지는 파란만장의 여정 속에서 두 사람은 국적을 초월한 우정과 전우애를 느낀다. 하지만 준식이 목숨을 잃게 되자 경성으로 돌아온 다츠오는 준식의 이름으로 마라톤대회에 참가한다. 라이벌이자 적으로 만났던 두 청년이 생사를 넘어 진정한 화합을 이뤄 간다는 설정이다.

▲ 영화 <헤어화>의 한 장면

영화를 통한 복수, <한반도>와 <박열>

<한반도>(2006)는 일본의 한반도 강제 점령이 거짓이라는 상황을 설정하고, 뒤틀린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명성황후가 일본군에게 참살당한 뒤 고종황제는 뒤따라 닥칠 더 큰 국난을 대비하기 위해 새로운 옥새를 만든다는 것이다. 가짜 옥새를 만들어, 정상적이지 않은 문서에는 가짜 옥새로 날인하고, 제대로 된 문서에는 진짜 옥새를 찍어 진위를 구분했다는 설정이다.

일본이 조선(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조약 문서에 찍힌 고종황제의 날인은 가짜이기 때문에 진짜 옥새를 찾아서 비교하면 이 문서의 효력은 사라진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이후의 과정은 진짜(?) 옥새를 찾으려는 시도로 채워진다.

일본의 조선 강점이 불법이고, 새로운 증거를 찾으면 그 역사를 뒤집어 무효화 할 수 있다는 발상이 기발하기는 하지만, 당시의 국제 정세나 조선의 자위력에 대한 성찰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문서에 찍힌 도장 하나만 바꾸면 지난 역사가 달라질 수 있다는 설정은, 그렇게 해서라도 일제 강점기 시대를 지워버리고, 고종황제로 상징되는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는 위안이다. 그야말로 영화적 상상력이 철철 넘치는 구성이다.

영화를 이용한 복수는 <박열>(2017)에서 더 두드러진다. 일본에 살던 박열과 그의 연인 가네코 후미코는 관동대지진 이후 재일 조선인 학살 사건을 조선인 탓으로 돌리려는 일본 정부의 계략에 저항한다.

주로 감옥과 재판 과정을 통해 표출되는 두 사람의 행동은 천황을 부정하고, 조롱하는 것으로 파문을 일으킨다. 실존 인물의 행적을 바탕으로 했다고는 하지만, 기이한 캐릭터의 대사를 통해 군국 일본의 비열한 내면을 보여준다는 설정은 서글픈 자위처럼 보인다.

일제시대를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은 모더니티가 만개하는 낭만적인 공간, 낭만적인 시대로 그리는 것이다.

현재 필름이 남아 있는 극영화 중에서 가장 오래된 <청춘의 십자로>(1934)라는 영화는 일제 강점기 당시의 경성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젊은이들의 로맨스가 중심을 이룬다.

당시 최첨단 패션을 소개하는 창구 역할을 했던 미츠코시백화점(현재 신세계백화점)에서 쇼핑하고, 현대적인 레스토랑에서 맥주잔을 기울이며 유혹의 멘트를 날리는 경성 한량들의 모습은 요즘 강남 유흥가를 누비는 제비족들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경성 시내를 멋진 자동차로 달리고, 명품점에서 최신 유행의 장신구를 여자 친구에게 선물하는 등의 풍경은 일제시대가 맞나 싶을 정도로 멋과 낭만이 넘쳐흐른다.

<애란>(1989) <사의 찬미>(1991) <원스어폰어타임>(2008) <모던보이>(2008) <해어화>(2015) 같은 영화들은 일제시대를 낭만과 사랑, 치열한 비극이 공존하는 특별한 공간으로 설정한다. 일본 제국주의 군대나 관료들은 여전히 악당처럼 설정하고 있는 것은 변함없지만, 통찰적 시각 대신 그때를 살았던 개인들의 삶에 더 다가간다.

<애란>은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애욕의 전쟁을 그린다. 조류학자인 요시무라(박영규 분)는 일본인이지만 일본의 군국주의 정책에는 반대한다. 아내, 아들과 함께 조선 땅 어느 바닷가 마을에서 은둔 생활을 한다. 하지만 아내와의 생활은 원만하지 못하다.

그곳에 징집을 피해 숨어다는 조선인 청년과 아내의 동생 즉 처제가 등장한다. 처제 모모에는 한때 요시무라에게 연정을 품었던 이력이 있다. 불편해진 요시무라가 자리를 피해 경성으로 떠난 사이, 그곳에는 젊은 청년과 남편에게 불만을 느끼는 중년의 여인, 저돌적인 젊은 여자 셋이 얽히는 치정의 긴장이 흐른다.

▲ 영화 <청춘의 십자로>의 홍보전단

일제시대는 낭만시대?

<사의 찬미>(1991)는 일제시대 초기, 관비 장학생으로 도쿄대학에서 유학하던 성악가 지망생 윤심덕과 와세다대학 유학생이던 부잣집 청년 김우진, 그들 사이에 연결된 홍난파 등의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진 러브스토리를 재현한다.

그들이 마주하고 있는 시대를 인식할수록 감당해야 하는 마음의 무게가 더 무거워지는 암울함, 열정 속에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같은 것들을 분위기로 곁들인다. 탈출구를 찾지 못한 채 방황하던 윤심덕은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를 오가는 여객선에서 바다에 몸을 던지고, 이를 비관하던 김우진조차 그 뒤를 따른다.

윤심덕과 김우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그런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세간의 여론은 두 사람의 비극적인 사랑을 화제로 삼는다.

<모던보이>(2008)도 한껏 멋을 부리기는 마찬가지다. 조선총독부 1급 서기관 이해명은 단짝친구 신스케와 함께 놀러 간 비밀클럽에서 멋진 댄서로 등장한 조난실이란 여자에게 홀라당 전신을 빼앗긴다.

알고 보니 조난실은 독립운동을 하는 비밀요원. 그 여자를 만나서 노닥거리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의심스러운 사고가 잇따라 터진다. 여자를 의심하면서도 사랑에 눈먼 총각은 상황을 입체적으로 관찰하지 못한다.

<해어화>(2015)는 일제시대 경성의 가요계를 무대로 삼는다.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조선권번에 팔려 기생이 된 소율과 연희는 친구이면서 라이벌. 최고 작곡가 윤우의 곡을 받기 위해 경쟁한다. 그 사이에서 작곡가와의 사이에 로맨스도 얽힌다.

송강호, 이병헌, 정우성 등 당대 한국영화의 톱스타들이 출연했던 코믹 액션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도 일제시대를 병풍삼아 이리 뛰고 저리 달리는 판타지 중의 하나.

1930년대 만주. 온갖 잡다한 사연의 인간들이 무법자처럼 살아가는 곳. 돈 되는 건 뭐든 사냥하는 현상금 사냥꾼 박도원, 최고가 아니면 참을 수 없는 마적단 두목 박창이, 잡초 같은 생명력의 열차강도 윤태구. 이리저리 말을 돌려보아도 결국은 강도 아니면 마적인 셈인데, 어쩌다 보물지도를 발견하고는 한꺼번에 보물을 향해 달려간다.

여기에다 일본군, 마적단까지 끼어들면서 이미 혼란스러운 만주가 아예 난장판으로 변한다. 칼과 총, 대포까지 등장하고 말과 자동차 오토바이, 기차가 경쟁하듯 달린다.

최근 영화 흐름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변화는 일본인에 충성하며 민족의 반역자 노릇을 하는 조선인들을 일본인보다 더 나쁜 인간으로 단죄하려는 것이다. <암살>(2015)이나 <밀정>(2016), 최근의 <군함도>에서 보이는 그림들이다.

<암살>은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임시정부는 조선주둔군 사령관과 친일파 강인국을 암살 표적으로 삼는다. 세 명의 저격수가 선발되어 작전에 나서는데, 이들의 활동은 내부의 배신자로 인해 심각한 위기를 맞는다. 배신자는 해방을 맞아서도 호의호식하며 독립운동가 대우를 받는다.

독립운동의 배신자로 지목해 재판에 회부되었던 그가 오히려 독립운동의 영웅처럼 석방되자 암살 작전에 나섰던 생존자 중 하나가 그를 처단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일본군을 저격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자연스러운 구성이지만, 친일파를 암살 대상으로 삼거나 재판에서 무죄를 받은 인물에 대해서까지 민족 정의의 이름으로 처단한다는 것은, 친일청산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현실적 평가를 대입해 끝내 단죄하고 만다는 이념적 설정으로 보인다.

<군함도>는 최근 흥행을 시작하면서 관심을 모았지만, 일본인과 일제시대를 바라보는 시선이 친일적이지 않느냐는 논란에 휘말리면서 곤란을 겪은 경우다. 군함도(하시마)에 강제로 끌려간 징용자들이 섬을 탈출하면서, 조선인을 괴롭히던 인물을 참수하는 것으로 응징을 시도한다.

군함도가 흉악하고 난폭한 공간이기는 하지만 집단 탈출을 통해 일본의 통제에 저항한다는 심리적 카타르시스를 유도한다. 실제의 군함도를 배경으로 삼지만 결국 가상의 공간으로 바뀌는 것이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