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의 두 거인, 우남과 백범 바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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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운회 미래한국 편집위원, 동양대 교수
  • 승인 2018.08.08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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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보수주의는 이승만, 김구, 안창호, 조만식,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 등의 우파 민족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다. 김구와 이승만은 한국 독립운동사의 원류로 국민들은 독립운동의 양대 산맥인 김구와 이승만이 서로 제휴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이들의 불화가 결국 한국의 비극을 초래했다. 김구는 뼛속까지 반공주의자였지만, 좌파는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김구를 통일전선에 철저히 이용했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임정과 이를 계승한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은 모두 우파 민족주의 진영으로 이들은 한국 좌파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이승만과 김구는 독립(獨立)과 건국(建國), 호국(護國)을 이끈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다.

이승만과 김구는 한국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양대산맥이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한국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양대산맥이었다.

분단의 책임이 이승만? 좌파의 현대사 왜곡의 시작점

좌파의 대표적 이념 서적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승만은 분단 체제를 성립·강화시키고 민족사회의 진보에 역행시켰다.<해방전후사의 인식>”고 말한다. 1948년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는 이승만의 권력욕과 분단 획책의 결과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좌파 사가(史家) 강만길은 <통일지향 우리민족해방운동사>에서 “8·15 직후 분단을 극복하려던 통일민족국가 수립운동은 반공과 분단을 내세운 미국과 이승만 세력에 의해 좌절“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이승만을 주축으로 대한민국의 건국을 폄하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논리로 확장된다. 그런데 이 말은 과연 사실일까?

식민지였던 한반도의 분단은 우리 민족 스스로에 의해 결정될 사안은 아니었다. 이른바 전시연합국 회담에서 중국, 소련, 미국은 한반도에 대해 저마다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카이로 회담에서 조선의 독립을 약속했지만, 강대국들의 이해가 우선이었다.

임진왜란 때도 한반도 분할안이 제시되기도 했고, 청일전쟁 때는 영국이, 러일전쟁 때는 러시아가 한반도 분할안을 제기했다. 당시 우방국인 미국이나 중화민국(국민당의 중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국으로서는 소련의 팽창을 억제하기 위해 또 일본이라는 본원적 이익(intrinsic benefit)을 위해 한반도를 지킬 필요성이 있었고, 중화민국은 전통적 종주권을 탈환·유지하기 위해 임정을 지원했고 신탁통치도 긍정적으로 봤다.

가장 노골적인 국가는 소련이었다. 일본이 항복(1945.8.15)하자 소련 제25군은 즉시(8.22) 평양에 입성했고, 23일에는 38선에 도착했다. 같은 해 9월 8일 미군이 한반도(인천)에 진주했고, 군사작전 편의상 ‘38선 분할 점령안’을 전격적으로 소련에 제안해 소련은 수락했다. 1945년 11월 경 남한 진주 미군 병력은 3개 사단, 7만여 병력이었고, 북한에는 약 12만 5000의 소련군이 주둔했다. 소련 제25군은 사령부 휘하에 민정부(民政府)를 두기로 하고 로마넨코를 책임자로 임명해 사실상 분단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이후 38도선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소련군과 미군의 군사 분계선으로 구획되었고 북한에는 소련 군정이, 남한에는 미국 군정이 각각 수립되어 ‘사실상 분단’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마치 분단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정치적 모략에 불과하다.

한국의 분단은 전범국으로서의 인과응보적인 성격을 띠는 독일과는 다르다. 한국은 식민지로 피해자였고 강대국들 간의 명백한 합의나 실천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극심한 혼란이 야기되었다. 여기에는 미국과 소련이 일본 관동군을 과대평가해 일본의 조기 항복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상태에서 국무부나 외교부가 아닌 군부에서 군사적 목표에 따라 정책 결정을 한 것이 원인이었을 수도 있다.

베트남의 경우에는 호치민(胡志明)을 중심으로 한 독립 세력들이 견고하게 결집된 데 반해 한국의 경우에는 워낙 거대하고 강고한 일제의 세력에 제대로 대항할 만한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만한 좌우합작도 이뤄지지 않았고 사분오열된 상황이었다.

국내 거의 유일한 독립운동 세력이었던 박헌영 계열도 해방 직전까지는 사실상 궤멸 상태였기 때문에 오히려 일반 국민들에게는 김구나 이승만의 존재가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실제로 이승만과 김구는 대부분의 정파(政派)에서 수반(首班)으로 옹립되었다.

이승만은 천황을 신으로 숭배하는 ‘미카도이즘’과 군국주의로 무장한 일본이 머지않아 태평양을 침공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승만은 천황을 신으로 숭배하는 ‘미카도이즘’과 군국주의로 무장한 일본이 머지않아 태평양을 침공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미국을 충격에 빠뜨린 이승만과 한미방위조약 

이승만은 불과 5년만에 조지 워싱턴대학, 하버드대학, 프린스턴 대학 박사 과정을 마쳤다. 이승만은 1941년 미국에서 영문 저서인 <Japan inside out : The Challenge of Today>를 출판해 미국을 경악시켰다. 이 책에서 이승만은 천황을 신으로 숭배하는 ‘미카도이즘’과 군국주의로 무장한 일본이 머지않아 태평양을 침공할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출간 5개월만에 진주만 공습(1941.12)이 터지면서 미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승만은 일본의 침공로를 하와이 또는 알래스카로 예측했는데 실제로 그의 예측은 매우 정확했다. 초기에 이 책을 본 미국인들이 “미국이 일본과 전쟁을 하면 한국이 독립하니까 자꾸 전쟁을 부추기고 있다”고 비아냥거렸지만 이승만은 자기는 평화주의자로 전쟁을 피하기를 바라지만, “일본은 짐승 같고 신적인 군주의 통제를 받는 민족일 뿐 아니라 기행(奇行)도 하는 민족이라 미리 대비해야 한다”고 응수하기도 했다.

이로써 이 책은 이승만에게 세계적 명성을 얻게 했으며 일본을 알기 위한 예언서이자 필독서로 등극하게 되어 미국 최초의 한국인에 의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아울러 이승만은 미국이 1905년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화 한 것(을사조약, 을사늑약)을 방관했다고 지적하면서 이를 ‘미국의 역사적 책임’이라고 비판했으며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것이 2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Japan inside out>. 이 책은 2015년 비봉출판사에서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되었다.

이승만은 미국인의 시각에서도 탁월한 인물로 맥아더나 많은 미군 장성들이나 정치인들도 그를 어려워하거나 존경했고 미국도 이승만을 함부로 다루기 어려웠다. 이 같은 배경 덕분으로 6·25(한국전쟁) 당시 한국이 궁지에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도) 미국을 지켜주겠다’라고 하는 ‘황당한’ 한미상호방위조약(1953)을 맺을 수 있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세계 역사상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서 체결된 조약 중 일방적으로 강대국에 불리하게 체결된 유일한 조약이다. 당시 전쟁에 염증을 느낀 미국과 북진 통일론을 고수하면서 대립하던 이승만은 1953년 휴전협정을 맺자 곧 ‘반공포로 석방’으로 응수했으며 휴전이 지연되자 미국은 결국 이승만의 요구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조인(1953.7.12)했다.

이로써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8억 달러의 경제 원조 및 20개 사단 60만 대군을 양성할 수 있는 군사 원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확보한 8억 달러와 경제 원조를 바탕으로 국내적으로 수입대체산업의 육성할 수 있었다. 1954년 이승만 정부는 ‘산업부흥 5개년 계획’을 수립해 후일 박정희의 ‘한강의 기적’의 토대를 쌓은 것이다.

이 때문에 북한의 무력적화의 집요한 책동에도 불구하고 70여 년을 전쟁 없는 한반도를 만들어 한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군사적 안정의 토대를 구축했다. 이는 그 어떤 다른 한국의 정치 지도자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좌파나 이승만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은 이승만을 마치 부르봉주의자처럼 묘사해 ‘왕정복고’의 유언비어를 퍼뜨리면서 선동하지만, 이승만은 왕족의 후손(양녕대군 16대손)임을 부끄러워해 나라를 빼앗긴 고종을 매우 싫어했다.

실제로 이승만은 독립협회 해산(1898)과 함께 입헌군주정을 세우려 했다는 혐의로 사형수가 되기도 했다. 후일 이승만은 “나라를 잃은 것은 슬프지만 왕과 양반 상투가 사라진 것은 시원하다”고 했다.

이승만은 기독교 문화와 미국식 민주주의를 철저히 배우고 이를 한국에 심으려 했다. 전통적으로 ‘우물 안 개구리’로 대륙에 매달리던 조선의 후예들과 달리 이승만은 해양문명과 손잡고 ‘아무 것도 없고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신생 약소국’을 주류 문명의 등을 탈 수 있게 했다.

‘한강의 기적’의 시작도 이승만으로부터

대통령으로서의 이승만의 최고 업적은 농지개혁이다. 1948년 12월 라디오 연설에서 “반상과 귀천에 등급이 없고 모든 인민이 평등과 자유를 누리는 근본적 해결책이 토지개혁”이라며 농지개혁법 개정안(1950)을 공포했다.

이승만이 농지개혁을 강행하자 정치권으로부터 ‘독재자’라고 비판을 받았고 이것은 당시 지주계층을 대변하던 한민당 내부와의 갈등을 유발해 이후 한민당이 이승만과 대립하는 하나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좌파는 이승만의 농지개혁을 유상몰수·유상분배라 하여 무상몰수 무상분배인 북한과 비교하여 실패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역사의 왜곡이다. 사회주의 하에서 이뤄지는 토지개혁은 국가가 전 국토를 몰수하는 중간 과정의 형태이기 때문에 국가적 토지소유로 가는 과정에 불과하다.

북한의 경우 ‘지주의 노예’에서 ‘국가의 노예’로 사회적 지위가 바뀐 것뿐이다. 한국의 농지개혁(92.4%)은 일본(90%)보다 더 철저하게 진행되어 대한민국이 ‘전근대 농경국가’를 졸업하게 했다(<농지개혁을 둘러싼 신화의 해체(김일영)>).

농지개혁이 지주들의 많은 반발로 국회에서도 첨예한 대립이 있었지만 이승만은 이해 당사자들을 설득해 적절한 양보를 유도해낼 수 있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봉건제를 타파해낼 수 있었고 사농공상의 신분제 사회로부터 사민평등의 국민국가로 이행할 수 있었다.

이승만의 농지개혁은 세계적 성공 사례로 평가된다. 2004년 8월 브라질 룰라 대통령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브라질처럼 풍부한 자원을 가진 나라에 어째서 5000만 명이 넘는 절대빈곤층이 존재하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한국은 과거 50년대에 농지개혁을 했지만 브라질은 그러지 못했고, 아직도 그것이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라고 했다.

필리핀의 경우 인구의 약 5%가 전체 국토의 약 95%를 점유하고 있어 대부분의 국민들은 소작농으로 그 절반을 지주에게 바쳐야 할 정도로 착취당하고 있기 때문에 경제 발전을 이루기가 어렵다.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에서 필리핀을 능가하겠다고 발표하자 당시 상대적으로 부유했던 필리핀은 이를 비웃기도 했다. 멕시코는 세 번의 토지개혁을 하지만 매번 실패했다. 결국 룰라 대통령의 표현처럼 농지개혁은 한강의 기적으로 가는 토대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이승만은 국민교육에 매진했다. 1949년 6년제 의무교육제를 도입했고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한 결과 1945년 78%에 달했던 문맹률은 1959년 22%로 떨어지게 되었다. 제86회 우남 이승만(李承晩) 포럼에서 신철식 이승만기념사업회 회장은 “해방 후 19개교(8000여 명)에 불과했던 대학은 10여 년 후 1960년 63개교로 늘어났고 대학생은 10만 명을 넘어섰다.

또 약 2만여 명의 해외 유학생을 파견했다. 이들이 근대화와 공업화의 주역을 맡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중에도 대학생을 징발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교육에 대한 집념이 컸던 것인데 이는 전 세계 전쟁사에 유례가 없다”고 강조했다. 역설이지만 이승만을 몰아낸 것도 지식을 갖게 된 바로 그 ‘우남 키즈(Kids)’들이다.

이승만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무엇보다도 공산주의로부터 대한민국을 수호했으며 그 수호의 토대를 구축했다는 점이다. 러시아는 지속적으로 남진정책을 추진해왔고 이 같은 정책은 소련(소비에트 러시아)의 성립 이후 더 강화되었다. 소련은 이른바 군용보급품 열차정부(baggage train government) 전략 즉 소련 군대에 의한 소비에트 정권을 산출하는 전략으로 광범위한 지역에 위성국가를 건설했고 북한도 이 범주에 속한다.

소련의 강력한 세계전략으로 동아시아 전역이 적화의 소용돌이에 빠졌지만 오직 한국만이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냈다. 만약 한국도 적화되었더라면 한강의 기적도 오늘날의 번영도 물거품이 되었을 것이다. 북한의 김일성이 소련의 괴뢰로 온 나라를 짓밟았지만 이승만은 유엔과 함께 세운 나라를 유엔 깃발 아래 미국을 앞세워 지켰다.

좌파 통일전선 전술로 백범을 덫에 빠지게 하다

김구는 좌파와는 거리가 먼 사람인데 김일성 때부터 좌파가 정치적으로 이용해왔다. 이승만과 독립전략의 차이는 있었지만, 김구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였고 반공주의자였다. 김구는 통일독립촉진회에 친북인사들이 들어오는 것을 크게 경계했으며 북한의 정부 수립을 배신행위로 단죄하고 북한·좌익과 선을 긋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김구는 여순 사건(1948)을 반란, 테러로 규정했고 “순진한 청년들이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하였으며”, “반도(공산주의자)들의 목적은 북한 정권을 남한에 연장시키는 것으로 보인다”고 규정했다.(한성일보 1948.10.28)

김구는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일종의 독재체제로 파악해 <나의 소원(1947)>에서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독재다 …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서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며 공산주의를 비판했다.

나아가 “일부 소위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위하며, 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무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좌파는 한동안 김구를 통일전선에 격렬히 활용하다가도 김구를 ‘테러분자’니 ‘극우세력’이니 하여 비난하기도 하면서 본색을 드러내고 김구가 이끌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를 파벌 싸움에만 골몰한 뒷방 노인네들의 사랑방 정도로 비아냥거리면서 항일 운동의 최고봉은 1930년대 만주의 무장 투쟁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사실은 좌파 조국이었던 소련군에 의한 자유시 참변(1921)으로 무장투쟁은 완전 궤멸되었다. 자유시 참변 또는 흑하사변(黑河事變)이란 일본과 비밀리에 합의를 맺은 소련군이 그 꼭두각시 이르쿠츠크파 한인 공산당세력을 사주해 러시아 아무르주 스보보드니(자유시)에 집결한 임정 지지 대한독립군단을 몰살시킨 사건이다. 이로 인해 무장투쟁은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일본과 협잡했던 소련군의 처사는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인데도 한국 좌파는 침묵한다.

한국 좌파는 언제부터인가 때만 되면 백범기념관에 몰려가 기념행사를 갖고 백범 묘소에 참배하는 등 민족주의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김구는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했고, 1919년 임정에 합류하여, 국무총리 대리, 내무 총장 등을 역임했고, 1921년 임시 정부 내 노선 갈등 이후 일부 독립 운동가들이 임정을 이탈하자 묵묵히 임정을 이끌어 왔으며 1940년 임정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임정은 3·1운동 이후 일본 통치에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위해 설립되었는데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하고 노령정부와 통합했다. 그러나 문제는 돈이었다. 재정 기반을 위해 국내외 공채를 발행하기도 했으나 거의 효과가 없었고 대부분은 재미교포의 성금으로 유지되었으며, 후일 장제스(蔣介石)의 원조금으로 유지되었다.

1920년대 중반 여러 지역에서 독립 단체가 수립되는 등 독립운동이 사분오열되자 임정도 유명무실해졌으며 1926년 김구가 임정의 국무령에 취임했던 당시에도 참여나 지지 기반이 미약한 상태였다. 1931년 김구는 임정의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미주 등지의 한인 교포들로부터 받은 성금을 바탕으로 임정 산하 공작 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창설했다.

1932년 한인애국단 소속 윤봉길 의사의 거사로 일본군 사령관 등 20여 명을 살상하는 성과를 올려 한국 독립에 대한 여론을 대외적으로 널리 알렸지만 임정은 일제의 보복을 피해 여러 곳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로 임정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해 김구와 장제스의 면담이 이뤄졌다.

이후 임정은 중국 정부(국민당)의 지원으로 군사조직도 보유했지만 통수권은 중국군에 있었다. 임정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대일·대독 선전포고를 하여 합법정부로 승인을 받으려 했지만, 국제연맹이나 어느 나라로부터도 국가로 승인을 받을 수 없었다.

미 국무부는 물론 중국 정부조차도 임정을 승인하지 않았다. 이 점에 있어서 좌파의 임정을 기준으로 한 ‘건국절’ 논란은 매우 부적절하다. 국가의 성립은 국토, 국민, 정체 등은 물론 국제적 승인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임정은 이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1948년 12월 유엔총회의 결의에 의해 한반도 전체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 받았지만 임정은 단지 상징적인 정부 구실을 한 것이지 실질적인 정부 기능을 수행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항일 독립운동의 역사를 냉정하게 바라보면, 어느 지역이든지 독립운동은 재정적인 문제에 부딪혀 제 구실을 하기가 어려웠던 것이 현실이었다. 무력항쟁에 대해서 이승만이 부정적이었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 신철식은 “20세기 초반의 일본은 전 세계 3대 강국 중의 하나였고 8000만 명의 국민 중 군인이 700만을 차지했던 시기였다. 조선광복군이 가장 번성했을 때가 4600여 명에 불과한데 이승만 박사는 당시 무장투쟁으로 일본을 이긴다는 것은 유아적인 발상이라고 봤다”고 강조했다(제86회 우남 이승만(李承晩) 포럼).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요즘과는 달리 강대국들의 보복이 심해 민간인 피해가 막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좌파의 건국절 논쟁은 대한민국의 건국(1948)에 대한 의미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다. 좌파는 이전에는 임정에 대해서도 그 실상을 토대로 비하하더니 이제는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하기 위해 임정을 들고 나왔다.

앞서 본대로 임정은 독립운동 전체를 대변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독립의군부(1912), 대한광복회(1915), 조선국민회(1915) 등을 시작으로 한국광복군(1940), 화북청년연합회(1941), 조선독립동맹(1942)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단체가 난립했다.

한국 독립운동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일제에 대항하는 민족해방운동이 하나의 결집된 세력으로 통합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지역적 분산, 이념적 분산 등으로 독립운동의 방향이 복잡다기(複雜多岐)했기 때문에 해방 후 극심한 혼란상을 노정한 것이다. 일제의 패망 직전에도 임정 해체론과 유지론이 대두되기도 했다. 여기에 열강의 각축 또한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로 등장했기 때문에 한반도의 분단은 불가피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전의 좌파의 주장과 같이 임정이 골방 늙은이들의 사랑방식으로 매도되어서는 안 된다. 임정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다만 한국 독립운동의 특성 상 워낙 다기한 흐름이 있었기 때문에 총체적인 대표성을 가지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상징성도 무시할 수 없다.

다시 우남과 백범에게로

앞서 본대로 김구와 이승만은 철저한 반공주의적 민족주의자였으면서도 박헌영, 김원봉 등이 비견할 수 없는 독립운동의 족적을 가진 지도자들이었다. 김구는 한 살 위인 이승만을 깎듯이 우남 형님, 우남장(雩南丈)이라며 존대했으며 이승만이 나가던 교회에까지 따라 나갈 정도로 극진히 예우했다.

그러나 장덕수의 암살(1947.12)로 김구가 곤경에 처해 이승만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이승만이 이를 거절하자 서로 결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김구(한독당)는 우익진영 단결에 노력하고 한민당의 김성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에 찬성했으나 장덕수는 한독당과의 통합은 당을 임정 요인들에게 헌납하는 것이라며 주장했었다.

1947년 11월 김구는 남한 단독선거는 민족 분단을 초래할 것이라는 경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1948년 1월 김구가 남북협상에 참여하려 하자 신익희, 조소앙 등이 만류했으나 듣지 않았다. 이는 철저히 소련 군정청의 민정청장 레베데프가 세운 각본대로 진행되었던 것인데, 나중에 이를 간파한 김구는 형식적 인사말만 했지만 김일성과 소군정은 그를 철저히 이용하고 말았다.

김구와 이승만은 민족의 통합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해방 후 복잡한 정치 지형으로 볼 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좌파의 입장에서 보면, 이승만과 김구는 이용 또는 제거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박헌영과 여운형도 이승만을 이용하려 했고, 소군정과 김일성도 김구를 이용하려 했는데, 노련한 이승만은 이를 거절했고 혁명가인 김구는 이용당하고 말았다. 그 후 김구는 김일성이 2차 회의를 제의해 왔을 때는 단칼에 거절했다.

앞서 본대로 이승만과 김구는 독립운동의 양대 산맥이었고 국민들은 이들의 제휴로 독립국가가 성립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 시기 소군정 하의 북한과는 달리 남한은 사분오열된 상황이었다. 당시의 상황에서 국제정치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던 이승만을 제외하고는 민족 분단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없었다.

다만 김구는 인공(조선인민공화국, 좌파가 급조한 정부)을 배척했지만 좌우 세력들이 민족통합을 부르짖는 김구를 중심으로 집결하려는 흐름이 있었고, 임정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한민당 세력들과의 갈등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 미묘한 갈등과 이후 벌어진 장덕수의 암살과 두 거인의 결별 등은 한국사의 불행한 전조였으며 소련의 괴뢰인 김일성의 등장은 비극적 미래를 잉태할 수밖에 없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백척간두에 선 현재의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지금이라도 이승만과 김구는 화해해야 한다. 더 이상 김구가 좌파의 통일전선 전술에 이용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파는 김구를 다시 제대로 민족 우파의 제단(祭壇)에 모시고 와야 하는 역사적 책무를 지고 있다. 이 역사적 화해를 통해 대한민국 수호를 위한 민족주의 세력이 재건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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