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주의의 함정
공동체주의의 함정
  • 미래한국
  • 승인 2011.05.20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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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래 편집위원·부산교대 교수

[김정래교수의 세설직론]

마이클 샌델
우리나라에서 마이클 샌들(Sandel)에 열광하는 것은 뜬금없이 불어온 일시적인 유행이 아닙니다. 이면에 우려할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려되는 이유 중 하나는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가 그 형성 동기와 본질을 한참 벗어나서 우리의 의식 저변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폄훼하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비이락(烏飛梨落) 격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공동체주의가 각광을 받게 된 시점이 마르크스주의 퇴색과 공산주의 체제의 몰락 시점과 비슷하게 맞물린다는 점도 우려를 뒷받침하는 또 다른 근거입니다.

저의 턱없이 부족한 공부 탓이 가장 큰 이유이지만, ‘공동체주의’가 학문적 논의뿐만 아니라 정치적 토론이나 문화적 맥락에서도 사용되는 매우 다의적이고 다기적인 개념이어서 한정된 지면에 이 모두를 소개하고 면밀하게 비판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목하 관심을 끄는 몇 가지 논점부터 소개하겠습니다.

공동체주의는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와 반대되는 개념

공동체주의는 ‘덕 윤리학(virtue ethics)’과 맥을 같이 하면서 덕목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공동체주의 논의의 학문적 단초는 자유주의 비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샌들, 맥킨타이어(A. MacIntyre), 테일러(C. Taylor)와 왈쩌(M. Walzer) 등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그리고 학문적인 논의보다는 사회개혁운동의 일환으로 대두된 미국의 에치오니(A. Etzioni)로 대표되는 공동체주의도 있습니다.

롤스의 정의론 비판이 단초가 됐다고 해도, 공동체주의의 주된 비판 표적은 자유주의입니다. 더 정확하게 공동체주의가 공격하고자 한 근원적인 표적은 천부적인 개인의 자유와 권리, 이를 토대로 자기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끌어간다는 개인의 자율적인 판단의 존중, 그리고 이에 대한 정부의 부당한 간섭을 금지토록 하는 17세기의 로크의 민권사상입니다.

물론 앞서 열거한 공동체주의자들이 외견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의 고전적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이 점에서 공동체주의는 공산주의와 다릅니다. 하지만 이들은 개인의 이익보다는 공동체적 가치가 우선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퇴니스의 ‘공동사회(Gemeinschaft)’와 ‘이익사회(Gesellschaft)’에 비견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이익 추구를 중시하는 이익사회보다는 좋은 삶에 관한 공동의 가치를 추구하는 공동사회가 공동체주의 이상에 더 부합합니다.

공동체주의자들이 공동의 가치(common value)에 초점을 맞춘 것은 자유주의자들이 강조하는 개인의 자율적이고 합리적 판단에 의해 도출되는 가치가 ‘내용상’으로 공허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개인이 내리는 합리적이고 자율적인 가치 판단은 공동체적 가치를 떠나서 개인의 자의적인 선택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동체주의의 기저에 정면에 배치되는 이론이 ‘원초적 지위(original position)’에서 사회계약에 참여하는 합리적인 개인을 상정한 롤스의 ‘사회정의론’입니다.

어떤 형태와 내용으로 구성됐건 간에 사회계약이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 이론적 허구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공동체주의자들이 보기에 계약당사자로 등장하는 합리적인 개인은 아무 것도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샌들의 비판이 이를 대표합니다. 합리적인 판단을 할 개인은 칸트나 롤스의 이론에서처럼 ‘추상적인 존재’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추상적인 개인의 집합이 공동체나 사회를 형성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공동체 논의는 흄의 정의주의(emotivism)에 입각해 개인의 선호나 칸트의 보편적 법칙에 의해 개인은 도덕적 판단과 도덕적인 선택을 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진전됩니다. 공동체주의자들은 흄이나 칸트의 윤리설이 이른바 ‘도덕적 원자론(moral atomism)’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면서 도덕적 판단을 하는 개인은 고립된 원자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공동체로부터 여러 가지 도덕적 의미를 부여받는 ‘동질성(identity)’을 가진 존재라고 합니다. 도덕적 행위자인 개인이 지니는 도덕적인 목적이나 이상은 결코 개인적인(personal) 것이 아니라 공유된(shared) 것이며, 테일러의 주장이 이를 대표합니다.

공유된 가치를 강조하는 공동체주의는 ‘전통(tradition)’과 그 속에서 일어나는 ‘실천행위(practice)’를 존중합니다. 합리적 판단을 하거나 도덕적 선택을 하는 개인은 면면히 이어온 전통 속에 몸담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 전통 속에서 구전되는 이야기(narration)는 단순한 구술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형성하는 알맹이입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맥킨타이어가 주장한 내용입니다.

물론 앞서 열거한 공동체주의자들이 외견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의 고전적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이 점에서 공동체주의는 공산주의와 다릅니다. 하지만 이들은 개인의 이익보다는 공동체적 가치가 우선한다고 주장합니다.

공동체주의, 개인은 합리적 선택할 수 없다고 비판

공동체주의는 얼핏 보면 버릴 것 하나 없는 모두 ‘지당한 말씀’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전통’, ‘가치의 근원’, ‘동질성’, ‘인격형성’의 특징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공동체주의가 ‘지당한 말씀’이 아니라 ‘진실처럼 보이는 허위(half-truth)’에 빠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통을 존중하는 것을 보면, 공동체주의는 분명히 버크(E. Burke)를 비조로 하는 보수주의(conservatism)와 상통합니다. 그러나 공동체주의를 보수주의와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전면에서 보수적 가치에 해당하는 전통, 전통문화 등을 수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양자간의 ‘전통’은 그 의미가 확연히 다릅니다. 보수주의는 전통 속에 담긴 내용을 유연하게 변형시켜 가는 역동성을 인정하는 반면, 공동체주의는 전통의 변화 가능성에 경직된 입장을 견지합니다.

보수주의는 정형화되고 고정된 의미의 전통을 고수하지 않습니다. 보수주의는 한편으로 제도와 권위를 무시하고 미래를 자신의 의지대로 바꿀 수 있다는 오만에 빠지는 진보주의에 반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현재의 의미와 가치를 과거의 맥락에서 파악할 줄 알고, 이를 다시 미래의 변화에 원용시켜 ‘안정적으로’ 대응하고자 합니다. 반면에 공동체주의의 ‘전통’은 행위나 도덕적 판단의 근원(source)이 되며 가치를 전통에 붙박힌 것으로 봅니다.

에치오니
공동체 가치가 인격형성의 근원이라는 주장은 진실처럼 보이는 허위

공동체주의는 모든 가치판단의 근원을 공동체적 전통에서 찾는다는 이유로 그것에 고착해 전통이 변형돼 가는 현상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공동체주의는 공동체의 문화 내용과 가치가 공동체 생존을 위해 진화하고, 물리적, 생태적 환경 변화에 적응하고, 끊임없이 타 공동체와 외래문화 등과 접촉하는 공동체의 역동성과 유연성을 간과합니다.

가치판단의 근원으로서 공동체를 불변의 고립된 실체로 보아 공동체가 답보 상태에 빠질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전통과 문화는 역동적입니다. 공동체 가치를 존중한다고 이를 정태적이고 편협한 것으로 치환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주의자들은 공동체가 가치 근원이고 자아형성의 기원이 되므로 공동체적 가치에 복종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여기서 개인이 공동체에 복속된다는 당위가 도출됩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개인의 선택과 가치판단의 토양을 제공한다는 공동체주의의 논점은 유연하고 개방적인 공동체 가치 형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개인은 경직된 사고에 경도되고 공동체는 폐쇄된 체제로 퇴행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공동체주의와 달리 보수주의가 개인의 자유와 이에 따르는 책임과 법치 준수를 강조하는 것은 이 맥락에서 정당화됩니다. 

다음으로 공동체적 동질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동질성’이라는 것이 보편적인 가치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를테면, 공동체주의는 ‘한국의 기독교 문화는 한국의 전통(공동체)에 기인했다’는 진술에 동의해야 합니다. 이 진술도 ‘진실처럼 보이는 허위’입니다.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와서 한국적 특성에 맞게 정착됐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기독교가 한국의 공동체 사회에 기반을 두고 정착했다고 해서 기독교적 가치가 한국의 전통적 가치라고 하면 이는 어색한 주장이 됩니다. 어느 사회의 기독교이건 지향하는 ‘보편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예컨대, ‘삼위일체’는 기독교의 핵심이 되는, 전통과 문화를 초월해 성립하는 기독교의 보편적인 가치입니다. 삼위일체를 부정하면, 그것은 이미 기독교가 아닙니다.

공동체 가치가 인격형성의 근원이라는 주장도 역시 ‘진실처럼 보이는 허위’입니다. 인격은 그 개인이 성장한 공동체의 영향을 받지만, 그 영향이 일방적이고 개인이 이에 대해 수동적인 것은 아닙니다. 인격형성에는 공동체 가치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적용합니다.

개인이 추구하고자 했던 것에 대한 기대와 좌절, 이 과정을 통해 길러진 합리적 판단 능력은 자신의 인격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인이지만, 이것을 공동체 가치에서 도출된 것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의 합리적 판단능력의 실체를 부인하는 억지입니다. 개인의 가치, 즉 인격은 공동체 가치에 강제로 복속시켜서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점에 비추어 개인의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판단 능력, 정부의 가치중립 준수 등 자유주의의 보편적 가치는 존중돼야 합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공동체 명분에 의해 제한·훼손 우려

에치오니가 강조하는 미국의 공동체주의는 보수주의의 엄격성과 자유주의의 허용성을 절충하는 일종의 ‘제3의 길’입니다. 그러나 이 절충방식에 따른 공동체주의는 금지-허용의 경계가 매우 자의적이라는 근본적인 맹점을 지닙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공동체 명분에 의해 자의적으로 제한, 훼손될 가능성이 상존합니다. 또한 이 절충방식에 의해 개인이 자유와 권리를 누리는 만큼 공동체 의무를 다할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강조하는 것은 “국가가 너 자신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지 말고, 너 자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어라”라는 케네디 대통령의 유명한 취임 연설을 상기시킵니다. 국가 시혜에 의존하지 말라는 교훈에도 불구하고 케네디 대통령의 발언은 개인이 국가에 대한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그릇된 발상을 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공동체에 대한 개인의 책무는 개인의 가치가 공동체 가치에 앞서 존중될 때 물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책무 부과는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전체주의를 끌어들이는 단초를 제공합니다.

끝으로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샌들의 반(反)시장적인 주장을 검토해 보겠습니다. 어느 공동체주의자보다도 샌들이 대중의 인기를 끄는 것은 ‘공정’ 때문이 아니라 반(反)부자, 반(反)기업 정서에 뿌리를 둔 반시장적인 태도 때문입니다.

샌들의 반시장적 사고는 그의 책뿐만 아니라 최근 국내 일간지의 인터뷰(조선일보 2011년 4월 16일자)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탁아소에 아이를 맡기는 부모가 지각하면 벌금을 부과하는 방식과 미국 댈러스의 학생들에게 독서를 권장하면서 50달러를 주는 보상체계가 모두 실패한 것을 예로 들면서 이를 ‘시장의 실패’라고 서슴없이 단정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장의 실패가 아니라 행동주의 S-R 이론의 실패입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시장주의가 ‘공동체를 약화시키고’ ‘민주주의 사회의 토대를 무너지게’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래서 ‘시장’과 ‘시장주의’에 모종의 제재가 가해져야 마땅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하는 샌들의 논거가 궁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시장은 언제나 사익(self-interest)에 의해 움직입니다. 경제적 관점에서 사익과 탐욕엔 차이가 없지요. 탐욕은 인간관계에서 악덕으로 통하지만, 이런 악덕을 활용해 공동선을 이룩하는 것이 시장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장이 행해야 하는 도덕적 연금술(moral alchemy)입니다. 시장이 어떻게 하면 제 위치에서 자기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모두가 고민하고 토론해야 합니다.”

여기에 두 가지만 보태겠습니다. 하나는 지난 호에서 지적한 바 있듯이, 사익(이기심)과 탐욕은 전혀 다릅니다. 이 둘을 동일시하면 개인의 가치가 실종됩니다. 다른 하나는 ‘시장’이 공정하고 도덕적인 것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국가가 시장에 개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 개입을 말하는 순간부터 그것은 이미 시장이 아닙니다. 이것이 공동체주의가 좌파 이데올로기와 통하는 점입니다. 공동체주의가 우려할 만한 이유를 여기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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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맘 2011-05-21 20:01:27
별로 아들에게 권하고 싶지 않더먼요.. 난 자유주의신봉자이자. 한국우익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