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漢) 무제와 왕망의 실패
한(漢) 무제와 왕망의 실패
  • 미래한국
  • 승인 2012.12.11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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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민주화의 역사적 교훈
      이강호 편집위원

한(漢)이 초기에 흉노의 조공국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의 이런 굴욕적 상황에 종지부를 찍은 인물이 7대 황제 무제(武帝)였다.

무제는 대규모 대외 원정으로 흉노를 정벌하고 동쪽으로는 고조선을 정복해 한사군을 설치하는 등 당(唐) 이전 고대 중국 사상 최대 판도를 확보했다. 하지만 대가가 적지 않아 쇠락의 계기가 바로 이때 발생했다. 거듭되는 외정(外征)으로 인한 재정 부담이 큰 원인이었다.

무제는 흉노 정벌을 위해 주변 각국들과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우호관계를 강화하고 군비를 대폭 확충했다. 우호에도 군비강화에도 공짜는 없다. 여기에 거듭된 대외원정의 부담이 더해지자 급기야 조정 예산마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무제는 이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소금과 철의 전매제도를 실시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것이 무제 이후 한의 약화가 시작된 계기였다.

염철 전매제도

소금과 철은 고대에는 동서를 막론한 전략물자로, 국가가 그 생산과 판매를 직접 통제하는 ‘염철(鹽鐵) 전매제도’는 중국에선 오랜 역사의 제도였다.

춘추시대 제(齊)의 재상 관중(管仲)은 바다에 인접한 산동지역의 입지를 살려 소금생산에 힘을 기울여 국부를 증강시키고 그 힘으로 제환공을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로 올려놓았다.

한편 진(秦)은 서북 내륙지방에 위치하고 있어 소금의 공급이 항상 중요한 과제였는데, BC 3세기 중엽 효문왕 때 재상 이빙이 사천에서 염천을 개발해 소금 문제를 해결했다. 나중에 진시황의 천하통일에 큰 힘이 됐음은 물론이다.

진시황은 천하통일 후에도 염철전매제도를 강력하게 시행했다. 하지만 가격이 턱없이 높아지는 등 후유증이 적지 않았다. 그러자 한을 건국한 유방은 민심을 얻기 위해 이 제도를 폐지했다. 그런데 폐지됐던 제도가 한 무제의 전쟁비용 충당을 위해 부활된 것이다. BC 116년의 일이었다.

교란되는 시장, 몰락하는 상인

무제는 애초 염철전매제도를 한시적으로 시행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것은 무제가 죽기까지 30년간 계속 시행됐고 진 당시 그랬던 것처럼 단기적 효과만큼이나 길고 큰 후유증을 낳았다.

우선 유통경제가 거의 마비되는 상황이 초래됐다. 완전한 화폐경제가 아니라 물물교환이 중요한 역할을 하던 시대였다. 소금과 철은 비단, 곡물 등과 더불어 일종의 화폐 역할도 하고 있던 물자였다. 이것이 국가에 의해 독점되고 가격이 폭등하자 유통이 마비되는 시장교란이 빚어진 것이다.

게다가 예나 지금이나 국영생산이 늘 그랬듯이 소금과 철의 품질도 떨어졌다. 백성들은 품질마저 떨어진 소금과 철을 비싼 값으로 사야 했다. 철 가격의 상승은 농민들의 철제 농기구 사용을 어렵게 만들었고 이것은 농업 생산 약화로 이어졌다. 소금 가격의 폭등은 곡물가격을 떨어뜨려 농업 채산성을 더욱 악화시켰다.

결과적으로 전매수익은 있었지만 다른 조세수입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그런데 백성들의 피폐해진 생활 못지않은 큰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상인들이 입은 타격이었다.

소금과 철은 한 시대 상인들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 중 하나였다. 이미 전국시대 말부터 소금과 철로 부를 이룬 상인들이 출현하고 있었다. 유방이 염철전매제를 폐지하자 이 추세는 더욱 강화됐다. 배와 수레, 승무원까지 거느린 ‘기업화된’ 대상인이 출현할 정도였다.

이들 상인에겐 고율의 거래세가 부가됐고 이것은 농민의 세금과 더불어 한의 국고를 채우는 주요 수입원이었다. 무제의 과감한 대외정책의 바탕에는 이렇게 해서 선대까지 축적된 재력이 있었다. 민간경제의 활성화가 국력 충실로 이어진 선순환이 있었던 셈이다. 무제는 이것을 무너뜨린 것이다.

균수법과 평준법의 여파

그런데 무제는 BC 110년에는 균수법(均輸法)까지 시행하여 상인의 입지를 더욱 축소시켰다. 균수법의 명분은 물가안정이었지만 이 제도의 1차 목적은 국가의 필요물자 조달 시 중간상인에게 지출되는 비용을 줄이자는 것이었다. 요즘으로 보면 정부의 조달청이 직접 상인이 돼 민간의 통운회사와 마트까지 겸하는 셈이었다.

국가가 민간 상인의 역할을 빼앗는 조치였으니 그들의 몰락은 당연한 결과였다. 몰락 상인들의 증가는 결국 전국적인 물류유통망의 경색을 초래했고, 물품 공급의 경색은 당연히 물가 앙등을 가져왔다. 그러자 무제는 균수법 5년 뒤 다시 평준법(平準法)을 시행했다.

일종의 가격관리제도인데 인위적인 물가통제는 예나 지금이나 어떤 경우에도 성공한 예가 없다. 결국 공급만 더욱 위축시킬 따름이다. 당시라고 별다를 리 없었다. 민간의 물류는 더욱 위축되고 민심은 더 흉흉해졌다.

균수법 평준법은 무제 사후 폐지됐지만 그로 인한 사회불안은 결국 황권의 약화로 이어졌다. 강력한 카리스마의 군주였던 무제의 생전에는 문제가 터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제 이후부터 위로는 외척의 손에 권력이 넘어가고 지방에서는 호족이 발호하기 시작했다.

외척 중 가장 중요한 세력은 왕씨(王氏) 일족이었다. 왕씨 가문은 원제(재위 BC 48~32) 때부터 줄곧 권력을 장악하더니 마침내 BC 8년 왕망(王莽)이 황위를 찬탈, 제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신(新)이라 고쳤다. 전한의 멸망이었다.

왕망의 ‘유교 사회주의’의 파산

왕망은 유교적 이상국가의 건설을 명분으로 내걸었다. 신이라는 나라 이름은 그를 위해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는 뜻에서였다. 왕망은 우선 주나라의 제도를 모범으로 정전법(井田法)을 시행,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고 왕전(王田)이라 칭했다. 토지의 매매는 당연히 금지됐다. 그리고 물가를 안정시킨다는 명분으로 균수법과 평준법을 부활시키고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왕망의 정책은 말하자면 ‘유교 사회주의’였다. 그런데 요즘의 먹물들이 걸핏하면 사회주의에 경도되듯 당시의 많은 유학자들도 왕망을 지지했다. 전한의 역사를 정리한 <한서(漢書)>의 집필자 반고(班固)는 그 대표적인 인물인데, <한서>의 목적 자체가 왕망의 건국의 합리화였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왕망의 정책은 큰 반발과 혼란을 야기했다. 토지 국유화는 지방 호족들의 거센 저항을 불러 일으켜 실시 자체가 유보됐다. 균수법과 평준법, 화폐개혁 등은 물가 앙등을 가져오고 상공업을 대혼란에 빠뜨렸다.

실정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왕망은 유교 원리주의자답게 양이론(攘夷論)에 입각해 흉노 정벌에 30만, 남이(南夷) 정벌에 20만의 대군을 동원하는 대규모 대외원정을 감행했다. 경제정책 실패에 대외원정의 군비 증가로 농민의 부담이 커지자 결국 반란의 불씨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미 전한 말부터 농민 폭동이 심심찮게 일어나던 터였다. 왕망의 신정부에 대한 반감 누적은 마침내 적미(赤眉), 녹림(綠林)의 난으로 터져 나왔다. 결국 남양 호족으로 원래 녹림군에 속했던 유승(劉秀)이라는 인물이 왕망을 타도하고 AD 25년 제위에 올랐다. 바로 후한의 광무제이다.

시장경제를 근대 자본주의와만 관련지어 이해하려는 사람에겐 고대 중국 경제에 대한 얘기가 낯설 수도 있겠다. 하지만 교환과 시장은 근대 자본주의 이전에도 당연히 있었으며, 언제나 경제작동의 가장 중요한 원리였다. 그래서 어떤 원인에 의한 것이든 시장교란은 언제나 국가를 커다란 위기로 몰아넣곤 했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시장의 교란은 대개는 어리석은 정부가 자초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한과 왕망의 신 모두가 그랬다. 오늘날이라고 다를 것인가?

경제민주화론이 왕망의 유교 사회주의와는 근본에서 과연 얼마나 다른지 생각해보라! 어리석은 먹물군자들이 예나 지금이나 하등 다를 바 없는 것처럼 그 발상도 새로울 게 있는가? 단지 그때는 ‘신(新)’, 지금은 ‘진보’라 떠들어대고 있을 뿐 아닌가? (미래한국)

이강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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