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공조작? 선수들끼리 왜 그러시나
용공조작? 선수들끼리 왜 그러시나
  • 미래한국
  • 승인 2013.09.12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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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의 역사이야기
 

반응의 제일성은 역시 예상대로 “용공조작”이었다. 8월 28일 이석기 등에 대해 내란음모 혐의로 전격적으로 압수수색이 단행되고 몇몇 통진당 관계자가 검거되자 당대표 이정희는 기자회견을 열고 성토했다. “유신시대에 써먹던 용공조작극을 21세기에 벌이고 있다.”

그런데 이정희에겐 좀 안 된 얘기지만 이번에는 예의 그 ‘용공조작론’이 그다지 설득력을 얻는 분위기가 아니다. 어정쩡하게 눈치를 보던 민주당도 결국 이석기 체포동의안에 대해 당론으로 찬성을 결정했다. 물론 이탈표도 꽤 나오긴 했다. 총 31명의 이탈표가 있었다.

통진당 6명을 빼도 25명이 이탈한 셈이다. 적은 수가 아니다. 통진당에 이를 갈고 있는 정의당에서 이탈자가 나왔을 가능성은 없다. 새누리당이 아무리 웰빙 체질이라 해도 굳이 이석기를 보호할 이유를 갖고 있는 이들은 없다. 대부분의 이탈은 민주당에서 나왔다고 보면 될 것이다.

용공조작? 지금도 없고 예전에도 없었다!

물론 민주당은 공식적으로는 이런 지적에 강하게 반발했다. 새누리당의 역공작이라고까지 했다. 옹색한 얘기다. 민주당 자신도 이탈표는 거의 자신들에게서 나왔음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으로선 극구 부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현재로선 감히 어느 누구도 자신이 그 당사자라고 시인하고 나설 분위기가 아니다.

권력이 무서워서? 아니다. 이석기 체포동의안에 반대했다고 해서 요즘 같은 넘치는 민주화 시대에 공권력이 뭘 어쩔 것인가? 문제는 국민의 시선이다. 국민들이 종북에 넌더리를 내며 그들을 옹호한 자가 누구인지 색출하려는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이정희는 페이스북에 “아버지나 딸이나 위기탈출은 용공조작 칼날 휘두르기”라는 글을 올렸다. 한때는 꽤 통했던 논리였다. 평범한 많은 국민들이 그렇게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예전에는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조차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국민들은 좌당이든 우당이든 간에 용공을 넘어선 종북좌익 자체가 명백한 실체임을 모두가 다 알고 있다.

박정희의 딸 박근혜의 시대, 용공조작은 없다. 그렇다면 “아버지나 딸이나 똑같다”고 한 얘기는 틀린 셈인데… 그러나 이 말은 역설적이게도 맞는 말이다. 용공조작은 예전 박정희 시대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민주진영에선 늘 말해왔다. 독재정권이 민주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용공조작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그 반대다.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졌던 것은 ‘용공조작’이 아니라 오히려 ‘용공조작론’이었던 게 진실이다.

인혁, 통혁, 해전, 남민전! 조작은 없었다!

이것은 주장이 아니다. 고백이다! 386세대 학생운동권 출신들이라면 아무도 그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대학 1학년을 마치고 2학년이 올라가기 직전 겨울방학, 이탈하지 않고 남아 있는 지하 서클의 멤버들에겐 이 시기가 매우 중요했다. 1학년 시기의 기본적인 의식화를 넘어 보다 본격적인 운동가로서의 교육이 이때 이뤄졌다. 핵심은 ‘한국의 변혁운동사’였다.

어느 날 선배가 낡은 복사물 뭉치를 한아름 들고 들어온다. 인혁당, 통혁당, 해방전략당, 남민전 등 4대 공안사건의 공소기록이다. 선배의 첫마디는 이렇다. “용공조작은 없었다. 이것은 모두 사실 그대로다.”

소위 민주진영에서 일관되게 “용공조작 사건”이라고 주장해온 박정희 시대의 대표적인 공안사건이다. 지금도 그렇게 주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민주화운동 보상금까지 받은 사건들이다.

그러나 지금 뭐라고 하든 간에 그때는 분명히 말했다. “용공조작이 아니라 솔직하게 말해 분명 실체가 있는 분명한 변혁운동이다.” 변혁운동? 쉽게 말해 좌익혁명운동이라는 얘기다.

그렇게 배우는 과정을 거친 멤버들은 드디어는 자신을 그 맥을 잇는 또 한명의 변혁운동의 전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교육을 받은 학생은 1년 뒤 자신의 후배들에게 똑같은 교육을 시키며 똑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용공조작은 없었다”고!

충격은 무슨 충격?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이 불거지자 한승헌, 백낙청, 황석영 등 이른바 진보성향 원로인사라는 사람들은 이런 반응을 내놓았다. “충격적이다… 건전한 상식에서 한참 벗어났다.” 한때 이석기 일파와 당에 같이 몸담았던 심상정 등을 비롯 소위 진보진영 도처에서 그런 식의 반응이 쏟아졌다.

충격적? 누군가의 표현을 빌겠다. 알 만한 선수들끼리 왜 이러시나? 지금까지 전혀 몰랐다가 이제야 알고 놀랐다는 투인데, 과연 몰랐다는 것인가? 천만에 말씀이다. 386세대는 물론 그 이상의 원로들에 이르기까지 그 실상을 모르는 이가 누가 있었단 말인가?

한국의 변혁운동사를 배우면서 운동권 멤버들이 알게 된 게 또 한 가지 있었다. 그들 자신이 소속돼 있던 지하 서클의 뿌리가 1960년대 초 좌익 이념 서클에 뿌리를 두고 연면히 이어져왔다는 것이었다. 더러는 통혁당의 신영복에 더러는 소년 빨치산 출신의 박현채에 맥이 닿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런 사실을 소위 진보진영의 원로라는 자들은 전혀 몰랐다는 건가? 박정희 시대 소위 反유신 투쟁을 하던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건가? 물론 일반 국민들은 잘 몰랐다. 그러나 적어도 선수들 양당사자들은 실상을 모두 알고 있었다. 박정희 자신과 反유신 진영 안에 도사린 좌익세력들은 서로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른바 민주진영 내의 순박한 분자들, 좌익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들은 그런 문제들을 잘 몰랐거나 혹은 좀 알아도 대단찮은 문제로 생각했다. 반독재 민주화라는 명분에 골몰했던 김영삼 등이 대표적으로 그랬다.

그러나 이른바 재야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김대중 등은 그런 사실을 모르는 게 전혀 아니었다. 1971년도 대선 당시 뿌린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이라는 소책자의 저자는 마르크스주의자 박현채였다. 김대중의 주변에는 그런 류가 계속 모여들었다.

박정희의 고심

박정희가 정치적 위기 탈출을 위해 공안사건을 조작했다는 건 이치에 닿지 않는다. 냉정하게 말해 그 공안사건들 당시 박 정권은 그럴 필요가 없을 만큼 충분히 권력이 강했다. 그리고 당시 그 사건들은 사실 그대로였다.

박정희는 그 실상을 잘 알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박정희는 순수한 반독재 민주화 세력과 용공좌익세력의 분리를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좋은 뜻에서든 마키아벨리적인 정치적 판단에서든 그랬을 것이다.

박정희와 맞섰지만 강력한 반공주의자였던 이철승은 박정희와 타협했다. 그러나 김영삼은 박정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김영삼은 재야진보진영 즉 다시 말해 좌익진영과 연계된 김대중 등과 함께 하는 길을 갔다.

이후의 한국의 정치사는 그렇게 전개됐고 때문에 유신시대는 지금도 공식적으로는 정치적 폭압과 암흑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도사리고 있었던 좌익세력의 문제는 그렇게 ‘민주’라는 이름 아래 가려진 채 지금껏 이어져왔다. 그게 지금 이석기 일당을 매개로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끝날 것인가? 아니다. 진짜 싸움이 이제 시작된 것이다.

이강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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